헤이세이 27년(2015년) 8월 14일

내각총리대신 담화[각주:1]


[각의 결정]


 종전 70년을 맞이함에 있어, 지난 대전大戦으로의 노정, 전후의 행보, 20세기라는 시대를 우리들은 차분한 마음으로 되돌아보며 그 역사의 교훈 속에서 미래로의 지혜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100년도 전의 세계에서는 서양 여러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나라들의 광대한 식민지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압도적인 기술우위를 배경으로 하는 식민지배의 파도가 19세기 아시아에도 몰아쳐 왔습니다. 그 위기감이 일본에게 있어 근대화의 원동력이 된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입헌정치를 내걸고 독립을 지켜냈습니다. 러·일 전쟁은 식민지 지배에 있던 많은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세계를 휩쓸었던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민족자결의 움직임이 확산되었고, 그때까지의 식민지화에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이 전쟁은 1천만 명이 넘는 전사자를 낳은 비참한 전쟁이었습니다. 사람들은 '평화'를 강하게 바라고 국제연맹을 창설하고, 부전조약을 낳았습니다. 전쟁 자체를 위법화하는 새로운 국제사회의 조류가 생겨났습니다.


 당초에는 일본도 보조를 같이했습니다. 그러나 세계공황이 발생하고, 구미 여러 국가가 식민지 경제를 연결시킨 경제의 블록화를 진행시키자 일본경제는 크나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그런 가운데 일본은 고립감이 심화되자 외교적, 경제적인 경색을 힘의 행사에 의하여 해결하고자 하였습니다. 국내의 정치시스템은 이를 저지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은 세계의 대세를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만주사변, 그리고 국제연맹의 탈퇴. 일본은 차츰 국제사회가 장절壯絕한 희생 위에 쌓아올리고자 했던 '새로운 국제질서'에 대한 '도전자'가 되어갔습니다. 나아가야할 침로針路를 그르쳐 전쟁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70년 전. 일본은 패전했습니다.


 전후 70년을 맞아, 국내외에서 돌아가신 모든 분들의 목숨 앞에 깊이 고개를 숙여 통석의 념을 표하는 동시에 영겁의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


 앞선 대전에서는 3백만 여의 동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조국의 장래를 걱정하고, 가족의 행복을 빌면서 전장에서 산화한 분들. 종전 이후 혹한의, 또는 작열의 먼 이국 땅에서 굶주림이나 병으로 괴로워하다 돌아가신 분들.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서의 원폭 투하, 도쿄를 비롯한 각 도시에서의 폭격, 오키나와에서의 지상전 등에 의하여 많은 시민들이 무참히도 희생되었습니다.


 교전국들에서도 장래있는 젊은이들의 목숨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사라졌습니다. 중국, 동남아시아, 태평양의 여러 섬 등 전장이 된 지역에서는 전투만이 아니라 식량난 등에 의하여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괴로워하고 희생되었습니다. 전장의 뒤에는 깊이 명예와 존엄이 상하게 된 여성들이 있었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에게 헤아릴 수 없는 손해와 고통을, 우리 나라가 주었던 사실. 역사란 실로 돌이킬 수 없는, 가혹한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의 인생이 있고, 꿈이 있으며, 사랑하는 가족이 있었습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아로새길 때, 지금도 말을 잃고, 그저 단장断腸의 념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토록 귀중한 희생 위에, 현재의 평화가 있습니다. 이는 전후 일본의 원점입니다.


 두 번 다시 전쟁의 참화를 되풀이해서는 안 됩니다.


 사변, 침략, 전쟁. 어떠한 무력의 위하나 행사도,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이제 두 번 다시 써서는 안 됩니다. 식민지 지배로부터 영원히 결별하고, 모든 민족의 자결의 권리가 존중되는 세계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난 대전에서의 깊은 회오悔悟의 념과 함께 우리 나라는 그렇게 다짐했습니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를 만들고, 법의 지배를 존중하며, 한결같이 부전의 맹세를 견지하여 왔습니다. 70년간에 이르는 평화국가로서의 발걸음에 우리들은 조용히 긍지를 가지고서 이 부동의 방침을 앞으로도 관철해 가겠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대전에서의 행동에 대하여 반복하여 통절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죄의 뜻을 표명하였습니다. 그 마음을 실제의 행동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시작으로 동남아시아의 나라들, 대만, 한국, 중국 등 이웃인 아시아의 사람들이 걸어온 고난의 역사를 가슴에 새기고, 전후 일관하여 그 평화와 번영을 위하여 힘을 다해왔습니다.


 이러한 역대 내각의 입장은 금후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어떠한 노력을 다하더라도, 가족을 잃은 분들의 슬픔, 전화에 의하여 도탄의 아픔을 느낀 분들의 괴로운 기억은 앞으로도 결코 나아지는 일이 없겠지요.


 그렇기때문에 우리들은 가슴 속에 남겨두지 않으면 안됩니다.


 전후, 6백만 명이 넘는 귀환자가 아시아 태평양의 각지에서 무사귀환할 수 있었고, 일본 재건의 원동력이 된 사실을. 중국에 내팽겨쳐진 3천 명 가까운 일본인의 자녀들이 무사히 성장하고, 다시 조국의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사실을. 미국이나 영국, 네덜란드, 호주 등의 포로 출신의 여러분이 오랜 세월동안 일본을 방문하고, 서로의 전사자를 위하여 위령을 계속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전쟁의 고통을 모두 느낀 중국인의 여러분이나, 일본군에 의하여 견디기 힘든 고통을 받은 포로 출신의 여러분이 그토록 관용을 베풀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마음의 갈등이 있고, 얼마만큼의 노력이 필요했을까요.


 그 점을 우리들은 헤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관용의 마음에 의하여 일본은 전후 국제사회에 복귀할 수 있었습니다. 전후 70년의 이 기회를 맞아, 우리나라는 화해를 위하여 힘을 다한 모든 나라들, 모든 분들께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일본에서는 전후에 태어난 세대가 바야흐로 인구의 8할을 넘어섰습니다. 그 전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우리들의 아이와 손자, 그리고 그 다음의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할 숙명을 짊어지워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들 일본인은 세대를 넘어서 과거의 역사에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겸허한 마음으로 과거를 계승하고, 미래로 넘겨 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들 부모, 그리고 그 부모 세대가 전후의 허허벌판, 빈곤의 밑바닥 속에서 목숨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우리들 세대, 나아가 다음 세대로 미래를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이는 선인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함께 적으로 치열하게 싸웠던 미국, 호주, 구미 여러 국가를 비롯한 정말로 많은 나라들로부터 은혜와 원수를 넘어선 선의와 지원의 손길을 뻗어준 덕분입니다.


 그 사실을 우리들은 미래로 전해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역사의 교훈을 깊이 가슴에 새기고, 보다 나은 미래를 열어나가며, 아시아, 그리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힘을 다한다. 그러한 크나큰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들은 스스로가 막다른 길을 힘에 의하여 타개하고자 했었던 과거를, 이 가슴에 계속 새기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어떠한 분쟁도, 법의 지배를 존중하고, 힘의 행사가 아니라 평화적·외교적으로 해결하여야 합니다. 이 원칙을 앞으로도 지켜 나가며 세계의 여러 나라에 호소해 나가겠습니다. 유일한 전쟁피폭국으로서, 핵병기의 불확산과 궁극의 폐절을 목표로 국제사회에서 그 책임을 다하겠습니다.


 우리들은 20세기에 있어서 전시하, 많은 여성들의 존엄이나 명예가 깊이 침해된 과거를, 이 가슴에 계속 새기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이러한 여성을 위한 마음에 항상 다가가는 나라가 되고자 합니다. 21세기야말로 여성의 인권이 침해되는 일이 없는 세기로 만들기 위하여 세계를 리드하여 나가겠습니다.


 우리들은 경제의 블록화가 분쟁의 싹을 키운 과거를, 이 가슴에 계속 새기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어떠한 나라의 자의에도 좌우되지 않는 자유롭고, 공정하며, 열린 국제경제시스템을 발전시키고, 도상국 지원을 강화하며, 세계의 더 큰 번영을 견인해 나가겠습니다. 번영이야말로 평화의 초석입니다. 폭력의 온상이 되는 빈곤에 맞서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의료와 교육, 자립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하여 한층 힘을 다하겠습니다.


 우리들은 국제질서에의 도전자가 되었던 과거를, 이 가슴에 계속 새기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자유, 민주주의, 인권과 같은 기본적 가치를 흔들림 없이 견지하고, 그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들과 손잡고 '적극적 평화주의'의 기치를 높이 걸고서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지금까지 이상으로 공헌해 나가겠습니다.


 전후 80년, 90년, 나아가 100년을 향하여 그러한 일본을, 국민 여러분과 함께 만들어 나간다. 그러한 결의입니다.



헤이세이 27년(2015년) 8월 14일

내각총리대신 아베 신조安倍 晋三



전후 70년의 아베 담화 ― 무엇을 위하여 냈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담화인가.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2015.8.15. 사설)


 아베 수상의 담화는 전후 70년의 역사 총괄로서 매우 불충분한 내용이었다.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 반성과 사과. 아베 담화에는 확실히 국제적으로도 주목된 몇 가지 키워드는 포함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참략하고 식민지 지배를 했다는 주어는 애매해졌다. 반성과 사과는 역대 내각이 표명하였다며 간접적으로 언급하였다.


 이 담화는 낼 필요가 없었다. 아니, 내지 말아야 했다. 다시금 강하게 그렇게 생각한다.


■ 「무라야마」 이전으로 후퇴


 담화 전체를 통해 느낀 것은 스스로나 지지자의 역사관과 사실의 무게와의 절충에 고심한 타협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으로 정착해 온 전후 50년의 무라야마 담화의 최대의 특징은 과거의 일본의 행위를 침략이라고 인정하고, 그 반성과 아시아의 여러 국민에게의 사죄를 솔직히 말했다는 점이다.


 한편 아베 담화에서 침략을 언급한 것은 다음의 대목이다.



 "사변, 침략, 전쟁. 어떠한 무력의 위하나 행사도,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이제 두 번 다시 써서는 안 됩니다."


 그 자체, 물론 실수는 아니다. 그러나 수상 자신이 이어받았다는 무라야마 담화의 내용에서 분명히 후퇴하고 있다.


 일본의 대륙으로의 침략에 대하여는 수상의 사적 간담회도 보고서에서 명기하고 있다. 참략이라고는 말하지 않더라도 "침략적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등으로 인정해 온 무라야마 담화 이전의 자민당 수상의 표현에서도 후퇴하고 있다.


 사과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다.


 수상은 "우리들의 아이와 손자, 그리고 그 다음의 세대의 아이들에게 사죄를 계속할 숙명을 짊어지워서는 안 됩니다."라고 언급했다.


 분명 국민 가운데에는 언제까지 사과를 계속해야 하는가 하는 감정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이나 한국이 사죄를 계속 요구하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


 정부로서 반성이나 사죄를 표하더라도 각료들이 그를 의심케하는 발언을 반복한다. 야스쿠니 신사에 수상들이 참배한다. 신뢰를 해치는 원인을 일본에서 만들어 왔다.


■ 눈을 의심케하는 헛다리만


 사죄를 계속하고 싶지 않다면 국제사회에서 편향된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다고 의심받는 아베씨가 여기에서 깨끗하게 사죄하고, 국민과 아시아 여러 국민과의 사이에 놓인 악순환의 고리를 단숨에 끊는다. 그런 결단은 할 수 없었던 것인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담화 발표에 이르는 과정에서 보여진 것은 눈을 의심할만한 정권의 오락가락뿐이었다.


 아베씨는 수상으로 재등판한 직후부터 "21세기에 걸맞는 미래지향의 담화를 발표하겠다."고 표명. 무라야마 담화의 역사인식을 새로 칠하는 저의를 시사하여 왔다.


 그러한 수상의 자세에 중국이나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도 걱정이 깊어, 수상은 일단은 각의 결정 없는 개인적 담화의 색채를 강화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공식적인 정부 견해가 되지는 않는다고 반발한 수상측근이나 공명당에서도 이론이 나오고, 다시금 각의 결정의 방침으로. 중요한 고비의 담화를 다루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헛다리뿐이다.


 그동안 국내만이 아니라 구미의 학자도 과오의 '편견없는 청산'을 호소했다. 여론조사에서도 과반수가 '침략' 등을 포함해야 한다는 민의를 보여주었다.


 원래 각의결정을 하거나 말거나, 수상의 담화가 '개인적인 담화'로 끝날리는 없다. 일본 국민의 총의에 올라선 역사인식이라고 국제사회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피할 수 없다.


 그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한 헛발질 끝에 침략의 책임도, 사과의 의사도 애매한 담화가 나온 꼴이다.


■ 정치의 본말전도


 국회에서의 수의 힘을 배경으로 강인하게 억지로 통과시킨다고 하더라도 많은 국민과 국제사회가 공유하고 있는 당연한 역사인식을 뒤집는 무리가 통할 리가 없다.


 수상은 미래지향을 강조했지만, 현재와 미래를 더욱 잘 살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정리는 빼놓을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해결이 요구되고 있는데, 아직 남은 문제는 여전히 있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야스쿠니 신사와 전몰자 추도의 문제이다. 아베 수상이 13년말 이래 참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외교적인 마찰은 진정되었지만, 수상이 다시 참배한다면 금세 재연된다. 그런데 이 문제에 어떠한 해결책을 찾아보자는 정치의 움직임은 매우 부족하다.


 위안부 문제는 해결을 향한 정치적 합의를 얻지 못했고, 국교가 없는 북조선에 의한 납치문제도 진전되지 않았다. 러시아와의 북방영토문제도 암초에 걸려있다.


 낼 필요가 없는 담화에 노력을 들인 끝에 전쟁의 참화를 체험한 일본 국민이나 근린 여러 국민이 고령화하는 속에서 해결이 급한 문제는 제자리걸음이 계속된다.


 도대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정치인가. 본말전도도 짝이 없다.


 그 책임은 수상 자신이 지지 않으면 안된다.




전후 70년 담화, 역사의 교훈 가슴에 미래를 열어가자

(요미우리 신문読売新聞, 2015.8.15. 사설)


 ◆반성과 사과의 마음을 보였다◆


 앞선 대전에의 반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일본의 진로를 명확히 보여주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전후 70년의 아베 수상 담화가 각의결정되었다.


 담화는 일본의 행동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미래를 말하는데 역사인식을 제대로 제시하는 것이 일본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와 기대를 높힌다.


 수상담화에는 키워드인 '침략'이 명기되었다.


 ◆「침략」 명확화는 타당하다


 "사변, 침략, 전쟁. 어떠한 무력의 위하나 행사도, 국제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으로서는, 이제 두 번 다시 써서는 안 됩니다."라는 표현이다. "지난 대전에서의 깊은 회오悔悟의 념과 함께 우리 나라는 그렇게 다짐했습니다."라고도 쓰고 있다.


 수상이 '침략'을 명확히 인정한 것은 중요하다. 전후 50년의 무라야마 담화, 전후 60년의 고이즈미 담화의 견해를 이어받은 것이다.


 1931년의 만주사변 이후의 구 일본군의 행동은 침략 자체이다. 자위 이외의 전쟁을 금지한 28년의 부전 조약에도 위반한다.


 특히 31년 10월의 관동군에 의한 중국 동북부·진저우錦州 공격(역주:만주사변을 의미)은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무경고의 공습으로, 헤이그 육전 규칙에 반한다. 공습은 상하이, 난징, 충칭으로 대상을 확대하고, 비전투원 사망자를 비약적으로 증대시켰다.


 일부 군인의 독주를 허락한 비참한 전쟁의 발단을 일본이 만들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수상은 기자회견에서 "정치는 역사에 겸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치적, 외교적 의도에 의하여 역사가 왜곡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아니 된다."고 말했다.


 핵심을 찌른 발언이다.


 '침략'의 객관적 사실을 인정한 것은 자학사관이 아니고, 일본을 깎아내리는 일도 아니다. 오히려 국제사회의 신뢰를 높이고 '역사수정주의'라는 일보의 의혹을 푸는 일도 될 것이다.


 담화에서는 '식민지 지배'에 대해 "영원히 결별하고, 모든 민족의 자결의 권리가 존중되는 세계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표현을 언급했다.


 담화는 국내외에서 희생된 사람들에 대해 "깊이 고개를 숙여 통석의 념을 표하는 동시에 영겁의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라고 적었다.


 독일 수뇌의 말을 일부 답습한 것으로 무라야마 담화 등의 "사과드리는 마음"(お詫わび)에 상당하는 표현이다. 수상의 진지한 마음이 충분히 전해진다.


 담화는 일본이 지난 대전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진심어린 사죄의 뜻을 표명하였습니다."라고 하여 무라야마 담화 등의 견해에 다시금 언급했다. 더욱이 "이러한 역대 내각의 입장은 금후에도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라


 이번 표현으로는 납득하지 않는 일부의 근린 여러 나라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반성과 사과를 하지 않아도 좋다, 라는 것은 안 될 것이다.


 구미 여러 나라를 포함해 국제사회 전체를 향하여 현재의 일본의 생각을 알리고, 이해를 넓히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베 담화가 전후의 일본에 손을 뻗어준 구미와 중국 등에 대한 감사의 뜻을 표명한 것은 타당할 것이다.


 "전시하, 많은 여성들의 존엄이나 명예가 깊이 침해된 과거를, 이 가슴에 계속 새기겠습니다."라는 표현은 위안부를 염두에 둔 것으로, 한국에 대한 배려이다.


 담화가 표명한 것처럼 "21세기야말로 여성의 인권이 침해되는 일이 없는 세기로 만들기 위하여 세계를 리드하여 나가겠습니다."라는 것이 지금 일본에 요구되고 있다.


 담화는 전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세대에 "사죄를 계속할 숙명을 짊어지워서는 안 됩니다."라고도 강조하고 있다.


 이 문제에 일정한 구분을 짓고, 자자손손에까지 사죄행위를 강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중국이나 한국에도 이해와 자제를 구하고 싶다.


 ◆차세대의 사죄 피하고 싶다


 수상은 기자회견에서 담화에 대하여 "가능한 많은 국민과 공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유의했다."고 말했다. 역사인식을 둘러싼 다양한 생각은 이번 담화에서 국내적으로는 분명히 정리, 집약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담화는 일본이 금후 나아갈 방향성에 관하여 "국제질서에의 도전자가 되었던 과거"를 가슴에 새기고, 자유, 민주주의, 인권이라는 가치를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견지한다, 고 맹세했다.


 '적극적 평화주의'를 내걸고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공헌하는 것을 빠뜨릴 수 없다. 이러한 일본의 자세는 구미나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로부터 폭 넓게 지지받고 있다.


 '역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서, 일본의 장래를 개척해가고 싶다.


  1. 원문은 일본어임. 주한일본대사관 가번역은 http://www.kr.emb-japan.go.jp/what/news_20150814.html를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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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연합 창설 및 우리나라의 종전·피폭 60주년을 맞아 한층 더 국제평화의 구축으로의 공헌을 서약하는 결의

国連創設および我が国の終戦・被爆60周年に当たり、さらなる国際平和の構築への貢献を誓約する決議


2005.8.2. 중의원


 국제평화의 실현은 세계 인류의 비원悲願임에도 불구하고 지구상에 전쟁 등에 의한 참화가 끊이지 않는다.


 전쟁이나 테러리즘, 기아나 질병, 지구환경의 파괴 등에 의한 인명의 상실이 계속되고, 핵병기 등의 대량파괴병기의 확산도 걱정된다.


 이러한 국제사회의 현실 속에서 본 원은 국제연합이 창설 이래 60년에 걸쳐 국제평화의 유지와 창조를 위하여 발휘한 예지叡智와 노력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우리들은 이에 10년 전의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로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를 상기하며, 우리나라의 과거 한 때의 행위가 아시아를 시작으로 하는 다른 국민에게 준 다대한 고난을 깊이 반성하고, 새롭게 모든 희생자에게 추도의 성의를 바치는 바이다.


 정부는 일본국헌법에 나타나는 항구평화의 이념 하에 유일한 피폭국으로서 세계 모든 사람들과 손을 잡고 핵병기 등의 폐절廃絶, 일체의 전쟁의 회피, 세계연방 실현으로의 길의 탐구 등 지속가능한 인류공생의 미래를 절실히 열어나가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하여야 한다.


 이상, 결의한다.


헤이세이 17년(2005년) 8월 2일


 중의원은 2005년 7월 2일 오후의 본회의에서 전후 60년의 국회결의를 공산당을 제외한 자민, 공명, 민주, 사민 4당의 찬성으로 채택하였다.


 여당측에서 제시한 원안에 1995년의 전후 50년 결의에 명기된 ‘식민지 지배’나 ‘침략적 행위’라는 문언이 없는 것에 야당 측이 ‘내용이 후퇴했다.’고 반발, 조정을 거듭하였으나 공산당을 제외한 4당이 전후 50년의 국회결의의 내용을 상기한다는 표현을 추가하는 것에 의견이 일치하였다.


 자민당의 아베 신조 간사장대리나 납치의원연맹 회장인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국론을 분열시키는 것을 결의하는 것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 등 자민, 민주 양당의 10인 가까이가 표결 전에 본회의장을 퇴장, 공산당은 “전후 50주년 결의를 상기하는 것은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 “우리나라의 역사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의 명확한 반성이 빠진 결의”라며 반대하였다.


60년 결의, 말을 넘어서 화해를 (아사히 신문朝日新聞, 2005.8.3. 사설)


 이 10년 동안 무엇이 변화하였는가. 어제 중의원에서 채택된 '전후 60년'의 국회결의를 읽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결의는 고노 요헤이河野洋平 중의원 의장의 지시로 실현되었다. UN 창설이나 일본의 피폭으로부터 60주년을 맞아, "새롭게 국제평화의 구축에의 공헌"을 약속하였다. 정부에 "유일한 피폭국으로서" "핵병기의 폐절, 일체의 전쟁의 회피, 세계연방의 실현" 등에의 노력을 촉구하였다.


 10년 전, 이와 같은 전후 50년의 시점에 국회결의가 채택되었다. 이번 결의와는 다르게, 그 때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자민당, 사회당, 사키가케의 3당 연립 하에서 사회당의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씨가 수상이었다.


 과거의 식민지 지배나 침략에의 반성과 사죄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회당에 대하여 자민당이 반발하였다. "일본만이 식민지 지배나 침략을 한 것만은 아니다.", "전과자로서 머리를 숙이는듯한 결의는 반대다."라는 비판이 날아들었다.


 결국, 식민지 지배 등의 표현은 들어갔고, 여당이던 자민당에서 본회의 결석자가 속출. 야당이던 신진당도 결석하여, 결의에 찬성한 사람은 중의원 의석의 과반수에도 이르지 못하는 이상사태가 일어났다.


 우리들은 사설에서 "부끄럽다. 슬프다. 버틸 수가 없다."고 썼다.


 그로부터 10년. 이번 결의에서는 "우리나라의 과거 한 때의 행위"가 아시아나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다대한 고난을 주었다고 하며, 반성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침략적 행위", "식민지 지배"의 표현은 사라졌다.


 그렇다면 전후 50년 결의나 그 후의 무라야마 담화에 분명히 외쳤던 그러한 과거에 얽매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우리들의 반성은 아시아에 넓게 받아들여진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런 것은 아니다.


 이 10년 동안에도 자민당의 정치가는 창씨개명이나 한국 병합을 정당화하려는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그 때마다 결의의 "반성"은 빛이 바랬다.


 그리고 지금, 일본의 아시아 외교는 팔방색(八方ふさがり: 팔방이 다 막힌 상태)에 빠져있다. 중국에서의 격한 반일 시위 등을 둘러싸고 고이즈미 수상은 4월의 아시아·아프리카 수뇌회의에서 무라야마 담회의 표현을 따라 이해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화해는 나아가지 않았다. 더욱이 사태는 심각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회결의에 '침략' 등의 표현이 들어가지 않았다고 하여 반생의 마음이 후퇴한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야당의 요구에서 "10년 전의 결의를 상기하며"라는 한 문장이 삽입되어, 전후 50년 결의를 답습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자민당이나 민주당에 퇴장, 결석한 의원이 있다지만, 찬동한 의원은 전회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근린제국과의 사이가 좋아지지 않는 이런 시기인 만큼, 국회의 의사意思로서 새로이 반성을 표명한 것은 의미가 있다. 이 취지가 조금이라도 반영되어 화해가 진전되도록 국회 자신이 노력할 책임이 있다.

[전후 60년 결의] 무엇을 위한 국회결의인가 (요미우리 신문読売新聞, 2005.8.3. 사설)


 역사의 무게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얄팍한 국회결의이다.


 국제평화로의 공헌을 서약하는 '전후 60년 결의'가 중의원 본회의에서 채택되었다.


 결의는 "우리나라의 과거 한 때의 행위가 아시아를 시작으로 하는 다른 국민에게 준 다대한 고난을 깊이 반성하고, 새롭게 모든 희생자에게 추도의 성의를 바치는 바이다."라고 하였다.


 그런 뒤에 "핵병기 등의 폐절, 일체의 전쟁의 회피, 세계연방 실현으로의 길의 탐구" 등을 정부에 요구하였다.


 채택의 방침이 중의원 의원운영위원회의 이사회에서 느닷없이 나타나 결정된 것은 불과 1주일 전의 일이었다.


 고노 요헤이 중의원 의장의 강한 의향이 있었다고 전한다. 자민, 공명, 민주, 사민의 4당의 찬성 다수로 순조롭게 결정되었다. 공산당은 반대하였다. 자민, 민주 양당의 의원도 10인 가까이가 표결에 앞서 본회의장을 퇴장하였다.


 민주, 사민의 양당은 당초에 "식민지 지배나 침략적 행위" 등에 대하여 "깊은 반성의 뜻"을 표명한 전후 50년의 국회결의보다도 후퇴하고 있다면서, 난색을 표하였다. 그러나 "이에 10년 전의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로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를 상기하며"라는 문언을 더한 뒤에 찬성으로 돌아섰다.


 '전후 50년 결의'는 자·사·사 연립정권의 무라야마 내각 시대에 당시 사회당이 주창하여 중의원에서 채택되었다. 문언을 둘러싸고 각 당 사이에 격론이 오갔다.


 최종적으로 이루어진 결의안 채택에는 여당에서도 약 70명이 결석하였다. 신진당 의원도 전원이 결석하고, 공산당은 출석하여 반대하였다. 찬성은 중의원 의원 총수의 과반수에도 미치지 않는, 참담한 '국회결의'였다.


 이번의 '전후 60년 결의'에는 "국제연합이 창설 이래 60년에 걸쳐 국제평화의 유지와 창조를 위하여 발휘한 예지叡智와 노력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라는 부분도 있다. 어째서 전후 60년이 되어서 느닷없이 UN을 들고 나선 것인가.


 게다가 일본은 1956년 이래 50년에 걸쳐 UN을 구성하는 당사자이다. UN 예산의 약 20%를 부담하고, 안보리의 상임이사국 가입을 바라보는 책임있는 중핵 멤버이기도 하다.


 마치 UN 밖에 있는 제3자처럼 UN에 "경의를 표한다."는 것은 여러 외국의 실소를 사지 않을까.


 "세계 연방 실현"이라지만, 어째서 전후 60년의 지금인가. 당돌한 인상을 받은 사람이 많지는 않을까.


 무엇을 위한 국회 결의인가. 그런 의문을 금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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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각총리대신内閣総理大臣
 간 나오토(菅直人, 1946년생)
 중의원(10선)·민주당(간 그룹)

 도쿄 공업대학 이학부 응용물리학과(현 물리학과)에 입학해 학생운동에 투신. 전공투나 민청(民青: 일본민주청년동맹日本民主青年同盟, 일본공산당계의 학생운동 단체)와는 선을 그은 전학개혁추진회의全学改革推進会議를 출범시켜 이끌었다. 대학 분쟁으로 자진 유급하고, 1970년에 졸업.

 졸업 후 변리사 자격을 취득하고 특허사무소를 개설했다. 이치카와 후사에(市川房枝: 전전과 전후에 걸쳐 여성 참정권 운동을 주도한 정치인)의 선거 사무소 대표를 맡은 것을 계기로 정치에 입문, 1976년 제34회 중의원 선거에 도쿄 도 제7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낙선했다. 이때 에다 사부로江田三郎의 눈에 들어 사회시민연합社会市民連合에 입당했다.

 1977년 제11회 참의원 선거에 사회시민연합으로 출마했지만 낙선, 1979년에는 제35회 중의원 선거에 이름을 바꾼 사회민주연합社会民主連合으로 출마했지만 다시 낙선했다. 1980년 제36회 중의원 선거에서 첫 당선. 1978년에 부대표, 1985년에 부서기장 겸정책위원장을 맡았다. 1986년 총선에서 사회민주연합이 획득한 4석 가운데 사회당 계열 2석, 민사당 계열 2석을 차지했으며 간은 사회당 계열에 속했다.

 1992년 PKO 법안(자위대의 국제평화유지군 파견을 허용하는 법안으로, 많은 반대 속에서 가까스로 통과되었다.) 통과를 둘러싸고 장시간 연설이나 단상 점거 등 격렬하게 저항했다. 1993년에 자민당 정권이 붕괴되며 성립한 호소카와細川 비자민 연립정권에서 중의원 외무위원장에 취임했다. 1994년 사회민주연합이 해산되자 신당 사키가케에 입당.

 1996년, 무라야마 내각이 총사직하고 성립한 제1차 하시모토 내각에서 제74대 후생대신으로 입각했다. 당시 약해藥害 에이즈 사건(1980년대 일본에서 혈우병 환자에게 비가열성 혈액응고 인자제제를 치료에 사용하여 다수의 에이즈 감염자가 발생한 사건)에 대해 명백한 과오 없음을 주장하던 관료의 반대를 무릅쓰고, 행정부의 명백한 과오를 증명하는 파일을 공개함으로써 처음으로 책임을 인정하여 일본 최초로 관료의 설명책임이라는 개념을 가져오고, ‘어카운터빌리티’(アカウンタビリティ/accountability: 관리책임?)라는 말을 정착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6년 8월, O157 사태가 발생하자 “오사카 부의 업자가 출하한 무순이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발표하여 도산 내지는 파산하는 농가나 업자(대부분 자영업 혹은 영세업자)가 속출하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그러자 간은 기자회견장에서 무순 샐러드를 먹으며 안전성을 드러내기도 했다.(이 사건은 나중에 도쿄와 오사카에서 무순업자에 의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통해, 양쪽 모두 제2심에서 국가가 패소했다.)

 1996년 9월, 신당 사키가케 소속이던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가 민주당(구)을 창당하자 참가하고, 하토야마와 공동대표를 맡았다. 당시 소속의원은 55명. 1998년에 신진당이 분당한 후 탄생한 민주우애태양국민연합(民主友愛太陽国民連合/민우련民友連)이 합류하자 민주당을 결성해 대표가 되었다. 당시 소속의원 136명.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한 하시모토 내각이 총사직하자 오자와 자유당과 일본공산당의 지원을 받아 총리후보로 거론되었다. 결선투표에서는 공명당·개혁클럽·사회민주당·신당 사키가케의 지원을 받아 참의원에서는 총리로 지명되었지만, 중의원에서 오부치 게이조가 지명되면서 총리에 오르지는 못했다. 이후 1999년 열린 두 차례의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모두 패배했지만, 2000년에 당 간사장에 취임하고 2002년에는 다시 오카다 가쓰야를 꺾고 대표로 취임했다.

 2003년, 오자와 자유당과 합병하고 같은 해의 제43회 중의원 선거에서 ‘고속도로 무료화’, ‘초등학교 저학년의 30명 이하 학급 실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워 177석을 획득했다. 당시 선거에서 비례대표를 사퇴하고 소선거구에 출마해 하토야마 구니오鳩山邦夫에게 승리.

 고이즈미 내각 각료의 연금 미납이 잇달아 발각되자 강력하게 공격했지만, 나중에 간의 미납기록이 발견되면서 여론의 역풍을 맞아 당 대표 사임.(나중에 후생노동성은 행정착오라는 간의 주장을 받아들여 사죄했다.) 2005년 제44회 중의원 선거에서는 도쿄에서 유일한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이어 열린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오카다의 후임으로 입후보했지만, 젊은 대표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에게 2표차로 지고 마에하라 민주당의 한 병졸로 지원한다고 표명.

 2006년에 호리에 메일 문제로 마에하라 집행부가 퇴진하며 열린 대표 선거에 입후보했지만, 오자와 이치로에게 47표 차이로 패배하며 대표대행으로 취임. 2009년에 오자와가 위법헌금 의혹으로 사임하면서 대표가 된 하토야마 유키오에 의해 계속 대표대행으로 재임했다. 당시 2007년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慎太郎의 대항마로 거론되었으나 극구 거절.

 2009년 9월, 정권 교체로 하토야마 내각이 출범하자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경제재정정책·과학기술정책 담당)에 취임했다. 또한 부총리급인 ‘세 재정의 골격이나 경제운영의 기본방침 등에 대하여 기획입안 및 행정각부의 소관사무 조정 담당 국무대신’도 담당. 이후 정권의 신 성장전략 수립을 주도했다. 2010년 재무대신 후지이 히로히사藤井裕久가 사임하자 후임으로 취임하였고, 포스트 하토야마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2010년 6월, 하토야마 퇴진으로 후임 대표로 당선되어 6월 8일에 제94대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고, 9월에 열린 대표선거에서도 오자와 이치로를 꺾고 당선.

* 본인 스스로 “자유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통합·융합한 제3의 길”을 언급.
* 경제·재정적으로는 ‘증세하더라도 잘쓰면 경기는 좋아진다.’거나 ‘제2의 케인즈 혁명’ 등을 언급.
* 총리 재임 기간에 대해서는 ‘수상이라는 것은 적어도 4년동안은 같은 사람이 계속해야 한다.’고 언급.
* 1997년, 국기국가법안 의결 당시 법안에 반대했다. 하토야마 내각 출범 후 첫 기자회견에서는 일부 각료와 함께 국기에 대한 경례를 거부. 2010년 총리에 취임한 뒤 중의원 본회의의 대표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는 “지금은 언제나 국기가 있는 곳에서는 반드시 경의를 표하고, 국가 제창도 하고 있다.”고 답변.
* 대표 시절부터 “일본이라는 나라가 나아가야 할 모습을 나타내는 새로운 헌법을 만든다.”는 ‘창헌’創憲을 주장.
* 방위 정책적으로는 치안유지활동과 국제협력을 행하는 부대의 창설을 주장.
* 타이완台湾에 대하여는 유엔 가입을 중국이 용인하고, 유엔 가맹국끼리의 문제로 유엔의 장에서 평화적 해결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
* 2010년 8월, 히로시마에서 ‘핵 억지론抑止論’을 주장해 히로시마 시장, 피폭자 단체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 북한에 대하여는 납치피해자 전원의 귀환·핵문제 해결·국교 정상화·경제지원을 한꺼번에 하는 정책을 제창하고 있다.
* 일미관계에 대하여는 “정치적으로는 일미동맹이 맡아온 역할이 크고, 앞으로도 아시아·세계의 안정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관계”라고 언급
* 정권 교체 직후 “기지문제는 어쩔 수 없다.”라거나 “이제 오키나와는 독립하는 것이 좋다.”고 언급한 일이 밝혀졌다.


총무대신·내각부 특명담당대신(지역주권추진 담당)·지역활성화 담당
 가타야마 요시히로(片山善博, 1951~)
 민간 / 신임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대학원 교수, 돗토리 대학 객원교수, 제14대 총무대신, 돗토리鳥取 현지사(1999~2007). 돗토리 현지사 시절, 관료출신의 개혁파 지사의 대표격으로 알려진 존재. 2004년 요미우리 신문의 여론조사에서 78%라는 높은 지지율로, 전국 지사 가운데 1위를 한 바 있다. 그러나 2007년, 지사 취임 후 1560만 엔 이상의 비밀자금을 만들어 그 가운데 915만 엔 정도를 음식 등에 지출한 것이 발각되기도 했다.


법무대신·납치문제 담당
 야나기다 미노루(柳田稔, 1954~)
 참의원(3선, 중의원 2선)·민주당(구 민사당 그룹) / 신임

 가고시마 출신으로, 전력총련의 지지를 받는 ‘미래의 환경·에너지 정책을 생각하는 모임’ 회장. 1973년 도쿄 대학에 입학했지만, 퇴학 후 1981년에 재입학. 1983년 졸업 후 고베 제강소神戶製鋼所에 입사했다. 1990년 중의원 선거에 히로시마에서 민사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 민사당이 해산하자 신진당에 합류하고, 1996년 선거에 히로시마에서 출마했지만 미야자와 기이치宮沢義一에게 완패.

 1998년 참의원 선거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 이후 연속 3선. 2009년, 참의원 후생노동위원장에 취임해 2010년에는 자녀수당 법안의 통과를 주도. 2010년 6월, 민주당 참의원 간사장에 취임.


외무대신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1962~)
 중의원(6선)·민주당(마에하라 그룹) / 이임(국토교통대신)

 교토 출신으로, 교토 대학 법학부 졸업 후 역대 최연소 교토 부의원(당시)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 일본신당에 참여해 1993년 교토에서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96년에 민주당(구)과 1998년의 민주당(신) 창당에 참여했다.

 9·11 테러 전후의 안보 체제의 변화 속에서 외교안보 전문가로 이름을 높여갔다. 2005년 대표 선거에서 간 나오토를 2표차로 꺾고 당선, “일본의 블레어”(아사히 신문)라는 평가도 얻었다. 반대 야당이 아닌 ‘대안 노선’을 주창하고, 노조 의존 체제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후 자민당의 대미 노선 비판, 중국 위협론,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인정을 위한 개헌 등을 주장하며 민주당 좌파의 비판을 받았고, 호리에 메일 문제로 결국 2006년 대표직을 사임했다. 이후 오자와와 대립선을 그으면서, 아베 신조 내각에 입각할 것이라는 가능성도 지적되었으나 탈당하지 않았다.

 정권 교체 이후 하토야마 내각에서 제12대 국토교통대신으로 취임. 취임 직후 얀바八ッ場 댐과 가와베가와川辺川 댐 건설에 대해 “(선거) 공약이었으므로, (사업을) 중지합니다.”라고 명언했지만, 지역의 의견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채 무조건 중지를 발표해 비판을 받았다. 나리타成田와 하네다羽田의 구분을 철폐하고, 하네다 공항의 허브 공항화(24시간 운영)를 주장했다.

 2010년 6월,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오자와 색의 불식’, ‘당 인사 쇄신’, ‘일미 협조’를 조건으로 간 나오토를 지지했다. 9월 선거에서도 간을 지지했고, 간 개조 내각에서는 오카다의 후임으로 외무대신 취임.

 중국 위협론이나 집단적 자위권 행사, 헌법 제9조 개정, 무기수출 삼원칙 재검토 등을 주장하고 있지만, 국기국가법안 투표 당시 반대하거나 부부별성제·외국인 참정권 찬성 등 보수적인 색깔이 강하다고는 없다. 야스쿠니 신사에 대해서는 A급 전범의 분리를 통해 천황이나 총리의 참배를 가능하게 하는 환경정비를 주장하고 있다.


재무대신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1957~)
 중의원(5선)·민주당(노다 그룹) / 유임

 와세다早稻田 대학 정치학과 졸업. 마쓰시타 정경숙 1기생으로 졸업 후, 1987년 지바千葉 현의원 선거에 출마. 선거 보도에서 거품 후보 취급을 받았지만, 최연소인 29세로 당선되었다. 1992년, 일본신당 창당에 참가하고 1993년 중의원 선거에 일본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이후 일본신당 해산과 함께 신진당에 참여. 1996년 총선에서는 단 105표차로 자민당의 다나카 쇼이치田中昭一에게 석패했지만, 2000년에 민주당 후보로 당선되어 복귀했다.

 2002년 대표 선거에 소장파 후보로 출마해 낙선했지만, 인지도를 높였다. 2005년 총선에서는 지바에서 유일하게 민주당 후보로 당선(940표 차). 당시 대표선거에서 마에하라를 추천해 대표 승리에 힘을 보탰다. 2008년 대표 선거에서 출마를 표명했지만, 당내에서 찬반이 거세 사실상 입후보를 단념했다. 이로 인해 강한 결속력을 자랑하던 노다 그룹은 사실상 해산론까지 나올 정도로 분열되었고, 출마 움직임을 보인 것으로 오자와의 분노를 사 사실상 찬밥신세가 되었다.

 정권 교체 후 하토야마 내각에서 방위대신 물망에 올랐지만, 집단적 자위권 주장 등이 의견 대립을 자극한다는 지적이 있어 재무부대신으로 취임했다. 후지이 재무대신이 사임하자 물망에 올랐으나, 간 나오토가 이임. 이후 간이 총리가 되자 승임하는 형식으로 재무대신으로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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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과학대신
 다카키 요시아키(高木義明, 1945~)
 중의원(7선)·민주당(구 민사당 그룹) / 신임

 야마구치 현립 시모노세키 공고를 졸업 후 미쓰비시 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 입사한다. 노조 임원을 거쳐 1975년, 나가사키 시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87년, 나가사키 현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1990년에 민사당 후보로 중의원 선거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94년, 신진당에 참가하고, 1998년에는 신진당 분당 후 신당 우애에 참여했다 민주당에 합류. 2005년 마에하라 집행부에서 부대표로 취임하고, 2006년 오자와 집행부에서 국회대책위원장으로 취임. 2010년, 간 나오토 개조내각에 문부대신으로 첫 입각.


후생노동대신
 호소카와 리쓰오(細川律夫, 1943~)
 중의원(7선)·민주당(간 그룹) / 신임

 1966년, 메이지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1974년 변호사로 등록. 1983년부터 총선에 입후보했지만 낙선하고, 1990년 총선에 사이타마에서 일본사회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 1996년에 민주당(구)과 1998년에 민주당(신) 창당에 참여했다.

 2009년, 하토야마 내각에서 후생노동부대신으로 취임하고, 2010년 간 내각에서 재임. 간 개조내각에서 후생노동대신으로 취임했다.


농림수산대신
 가노 미치히코(鹿野道彦, 1942~)
 중의원(11선)·민주당(하타 그룹) / 재임(2번째)

1965년, 가쿠슈인学習院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1976년 총선에 자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81년에 운수정무차관, 1986년에 중의원 운수위원장을 맡았다. 1994년, 자민당을 탈당해 신당 미래新党みらい를 결성, 대표에 취임했다. 12월에 신진당 창당에 참가. 당초에는 오자와를 지지했지만, 1997년 당수 선거에서는 반 오자와의 기수로 입후보해 선전.

 이후 신진당 내의 반 오자와 보수 의원을 모아 국민의 소리国民の声를 창당하고 대표로 취임. 이어 하타 전 총리의 태양당太陽党, 호소카와 전 총리의 프롬 파이브フロム・ファイブ와 함께 하타를 당수로 하는 민정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에 민정당이 민주당과 합당하면서 민주당 부대표 등을 역임. 그러나 비서 급여 착복 등의 책임을 지고 2002년 탈당했다. 이후 복당하였으나, 제43회 총선에서 자민당의 엔도 도시아키遠藤利明에게 패배해 비례에서 부활, 2005년 총선에서는 다시 엔도에게 졌고 부활하지 못했다. 2009년 총선에서 엔도를 꺾고 9년만에 소선거구 당선. 2009년 9월, 중의원 예산위원장에 취임했다.

 2010년 9월, 간 개조내각에서 농림수산대신으로 취임.


경제산업대신
 오하타 아키히로(大畠章宏, 1947~)
 중의원(7선)·민주당(하토야마 그룹) / 신임

 무사시武蔵 공업대학(현 도쿄 도시 대학) 졸업. 1974년 석사 수료후 히타치 제작소日立製作所에 입사했다. 1978년부터 2년간 노조 임원으로 활동하고, 1986년 이바라기 현의원으로 당선. 1990년에 히타치 노조 후보로 중의원 당선. 간 개조내각에서 경제산업대신으로 첫 입각.


국토교통대신·내각부 특명담당대신(오키나와 및 북방대책 담당)·해양정책 담당
 마부치 스미오(馬淵澄夫, 1960~)
 중의원(3선)·민주당(무파벌) / 승임

 1982년 요코하마 국립대 토목학과 졸업 후 미쓰이三井 건설 사원, 컴퓨터 관련 상품 제조판매회사 이사(당시 혈족이사 외에는 역대 최연소 상장기업 이사), 북미 법인 최고경영책임자, 문구회사 임원 등을 역임. 2000년 총선에 출마해 낙선했으나, 2003년 총선에서 당선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환경대신·내각부 특명담당대신(방재 담당)
 마쓰모토 류(松本龍, 1951~)
 중의원(7선)·민주당(요코미치 그룹) / 신임

 주오中央 대학 정치학과 졸업. 1990년 총선에 일본사회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할아버지는 부라쿠部落 해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마쓰모토 지이치로松本治一郎.



방위대신
 기타자와 도시미(北澤俊美, 1938~)
 참의원(4선)·민주당(하타 그룹) / 유임

 와세다早稻田 대학 법학부 졸업 후, 1975년 자민당 후보로 나가노 현의원 선거에서 당선. 1992년 참의원 선거에서 나가노 현에서 출마해 당선. 1993년 신생당 창당 당시 하타와 함께 행동하고, 하타 내각에서 농림수산정무차관을 맡았다. 이후 신진당, 태양당, 민정당을 거쳐 민주당에 합류.



내각관방장관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1946~)
 중의원(6선)·민주당(마에하라 그룹) / 유임

 도쿄 대학 재학중이던 1968년 사법시험에 합격해 중퇴.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노조 사건이나 일교조 관련 사건을 맡았다. 1990년 총선에서 일본사회당 후보도 도쿠시마에서 출마해 당선. 사회당이 사회민주당으로 바뀌자 탈당해, 시코쿠 시민네트워크 대표를 거쳐 민주당(구)에 참여.

 1996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복귀. 하토야마 내각에서 국가공안위원장 등을 맡았다.



국가공안위원장·내각부 특명담당대신(소비자 및 식품안전 담당·저출산 대책 담당·남녀 공동 참여 담당)
 오카자키 도미코(岡崎トミ子, 1944~)
 참의원(3선, 중의원 2선)·민주당(요코미치 그룹) / 신임

 1962년, 후쿠시마福島 현립 후쿠시마 여고를 졸업하고 라디오 후쿠시마에 입사해 아나운서가 되었다. 1980년 중의원 선거에 일본사회당 후보로 당선되었다. 1996년, 사민당을 탈당하고 민주당(구) 결성에 참여했다. 1997년 미야기 현 참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 2006년, 일본의 전쟁책임을 검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학습회 ‘일본의 역사리스크를 극복하는 연구회’ 발기인
* 2009년, 1932년 중국 평정산 사건에 대해 일본 정부의 공식 사죄를 요구하는 의원단에 참여.
* 2001년, 참의원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소신 연설에서 ‘과거와 마주할 수 없는 일본’이라는 국제적 이미지 불식을 위해서라도, 스스로의 과거 부정의에 모두 힘써야 한다며 전시戰時 성적 강제 피해자 문제의 해결의 촉진에 관한 법률안 성립을 요구했으며, 한국 방문시에 전 위안부 관계자의 수요시위에 참석하는 등 위안부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다.


Canon | Canon PowerShot G5 | 1/60sec | F/3.2 | 23.0mm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금융 담당)·우정개혁 담당
 지미 쇼자부로(自見庄三郎, 1945~)
 참의원(초선, 중의원 7선)·국민신당 / 유임

 1970년, 규슈 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규슈 대학 의학부 제1내과에서 활동. 1977년 박사과정 수료 후 의학부 강사등을 거쳐, 1983년 후쿠오카에서 자민당 후보로 총선에 출마해 당선.

 2005년 총선에서 우정 민영화에 반대하며 자민당 공천을 얻지 못해 무소속으로 출마했지만, 자객 후보로 출마한 니시카와 교코西川京子에게 패배했다. 이후 탈당권고를 받아 탈당.

 2006년, 의원 복귀를 목표로 2007년 참의원 선거의 일본의사연맹 비례후보 추천공모에 입후보하지만 낙방했고, 이후 국민신당의 비례후보로 입후보하기로 결정하고 당선되었다. 이후 국민신당 부대표로 취임했고, 간사장 등을 거쳤다.


내각부 특명담당대신(경제재정 담당·과학기술정책 담당)·우주개발 담당
 가이에다 반리(海江田万里, 1949~)
 중의원(5선)·민주당(하토야마 그룹) / 신임

 게이오기주쿠 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경제평론가로 활약했다. 1986년 참의원 선거에 도쿄에서 세금당税金党 후보로 출마하지만 낙선. 1993년 중의원 선거에서 일본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1994년, 일본신당을 탈당하고 민주신당클럽 시민리그民主新党クラブ・市民リーグ 대표위원을 거쳐, 1996년에 민주당(구) 창당에 참여했다. 1996년 중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당선.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낙선했지만, 2009년에 다시 당선되었다.


DoCoMo | N905i | F/2.8 | 5.2mm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새로운 공공」 담당)·국가전략 담당 / 민주당 정책조사회장
 겐바 고이치로(玄葉光一郎, 1964~)
 중의원(6선)·민주당(무파벌) / 유임

 1987년 조치上智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91년 후쿠시마 현의원 선거에서 현 역대 최연소인 26세로 당선(자민당 소속)된다. 1993년 중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고, 12월에 소수정당이던 신당 사키가케에 입당한다. 1996년, 민주당(구) 창당에 참여했고, 그 해의 총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비례대표로 부활). 2000년 총선에서 자민당 후보였던 호즈미 요시유키穂積良行에게 압승했다.(직후 호즈미는 정계를 은퇴) 이후 지방 분권 정책을 주로 담당했다.

 2005년 대표 선거에서 마에하라를 지지했고, 마에하라 집행부에서 간사장대리에 취임한다. 이후 오자와 집행부의 재임요청을 받았으나, 마에하라 집행부의 책임을 이유로 고사. 하토야마 대표 시절, 정책결정의 정부 일원화를 목표로 정책조사회가 폐지되었으나, 2010년 6월 간 나오토 대표 취임으로 부활하자 조사회장에 취임했고, 간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으로 취임했다.

 민주당 내의 지방분권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내각부 특명담당대신(행정쇄신 담당)·공무원 제도 개혁 담당
 무라타 렌호(村田蓮舫, 1967~)
 참의원(2선)·민주당(노다 그룹) / 유임(공무원 제도 개혁 담당 추가)

 타이완에서 타이완 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후 일본 국적을 선택하고, 아오야마가쿠인青山学院 대학 법학부를 졸업. 대학 재학 중 연예계에 데뷔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등에서 활동. 2004년에 민주당 참의원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간 내각에서 국무대신·내각부 특명담당대신으로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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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민주당 세력도
 민주당은 정책이나 출신 정당(민주당 이전), 지지 기반 등에 따라 형성된 여러 당내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민당의 당내 집단(파벌)의 경우 ‘○○ 파’라고 불리지만, 민주당의 당내 집단은 보통 ‘○○ 그룹’이라고 불린다. 그 가운데 구 사회당 계열 의원은 구 총평(総評·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의 색깔이 강하고, 구 민사당 계열 의원은 구 동맹(同盟·전일본노동총동맹)의 색깔이 강하다. 그리고 구 자유당 계열 의원은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의 영향이 강한데, 앞의 세 계열과 함께 간 나오토菅直人 그룹까지 4개 그룹은 비교적 결속력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자민당의 경우와 달리, 민주당의 당내 집단은 결속력을 통해 당의 요직을 노리는 활동, 혹은 집단의 리더가 소속한 멤버를 뒷받침하는 등의 양상이 거의 없다. 이로 인해 많은 그룹이 상명하복식의 의견 통일이 어렵고, 당 대표 선거에서도 여론에 따라 정책이나 인물을 개인이 파악하고 투표하는 의원이 많다. “어느 파의 생각이 시류에 따르고 있는지에 의하여 지지를 정하는, 중간파가 대다수”라는 견해도 있다. 단 제45회 중의원 총선거(2009)에서는 오자와 계열 의원들이 다수 당선되었고(오자와 칠드런), 민주당이 여당이 되고난 후에는 파벌의 양상도 조금씩 변화한다는 가능성도 지적되고 있다.

 이른바 ‘고바토 체제’(小鳩体制: 하토야마는 총리로 정부를 주도하고, 오자와는 간사장으로 당과 국회 운영을 주도하는 체제. 두 사람의 머릿글자를 땀.)라고 불리던 하토야마 정권 초기에는, 당의 실권을 장악한 오자와 이치로와 협조하는 오자와 그룹, 하토야마鳩山 그룹, 요코미치横路 그룹, 가와바타川端 그룹, 하타羽田 그룹이 주류였고, 오자와와 거리를 두던 마에하라前原 그룹, 노다野田 그룹이 비주류, 양측과 미묘하게 떨어져 있던 간그룹이 중간파였다고 한다. 그러나 민주당 내의 집단은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결속력이 약하고, 무소속이나 복수 소속 의원도 상당수 존재하기 때문에, 집단 단위로 주류·비주류를 구분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오자와 그룹
 구 자유당 그룹·일신회一新会·일신구락부一新俱楽部·오자와 이치로 정치숙政治塾 출신 등 -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초기에는 구 자유당 계열 의원뿐이었으나, 민주당과의 합병 후 ‘당내 당’은 피하자는 취지에서 별도의 모임은 크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2004년, 당시 초선·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하는 오자와 중심의 학습회인 ‘일신회’가 발족함과 함께 이후 서서히 모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낙선자나 후보자를 대상으로 하는 ‘일신구락부’가 2005년 가을에 출범·합류하고, 2001년부터 지속된 ‘오자와 이치로 정치숙’ 출신자 등이 합류해 서서히 세력을 확대하였다.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2007)에서 대거 당선된 초선의원이 합류하면서 당내 최대의 집단으로 성장하였다.

 그 외에도 2007년 참의원 선거와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초선 의원은 대부분 오자와의 영향력 아래에 있어, 언론에서 흔히 ‘오자와 칠드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단순히 오자와 개인과의 관계로 엮인 일정한 영역을 편의상 오자와 그룹이라고 부르는 것일 뿐, 구 자유당 계열 이외에는 와타나베 히데오渡辺秀央나 오에 야스히로大江康弘 등이 오자와와 대립하면서 탈당하기도 하는 등, 실제로 정책적인 결속이나 통일적 조직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또한 일신회의 경우 다른 집단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도 많다.

 정책적으로는 우파·신자유주의적인 성향이 있었지만, 오자와의 정책 변화와 구성원의 확대 등으로 인해 그러한 경향이 옅어지고 있다. 오자와처럼 정책보다 선거 또는 정국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어, 정책을 중시하는 마에하라 그룹이나 노다 그룹과 대립하는 일도 많다.


정권 공약을 실현하는 모임政権公約を実現する会
 하토야마 그룹·구 신당 사키가케新党さきがけ 우파 -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2002년에 출범한 ‘하토야마 정권을 실현하는 모임’鳩山政権を実現する会이 시초. 하토야마를 중심으로 보수계열 의원들이 결집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당시 대표였던 하토야마가 곧 사임했기 때문에, 2003년에 ‘민주당 정권을 실현하는 동지의 모임’民主党政権を実現する同志の会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모임’政権交代を実現する会이 되었다. 실제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지자, 2009년 9월에 ‘정권 공약을 실현하는 모임’으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매주 목요일, 하토야마의 개인 사무소에 모인다. 식비 등은 모두 각자 부담하는 등 투명한 운영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민주당 발족 후 구 신진당新進党 출신이나 같은 보수계열이던 정권전략연구회 소속 의원 등이 합류하고, 민사협회民社協会의 지원 등을 통해 당내의 최대 세력으로 성장했었다. 그러나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가이에다 반리海江田万里 등 하토야마의 측근이 대거 낙선한 일과 함께 2007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오자와 그룹이나 신 정국간담회新政局懇談会로 합류한 초선 의원이 많았으므로, 지금은 수적으로 오자와 그룹에 뒤처지고 있다.

 처음부터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다는 자유로운 분위기와 인원이 많았던 영향으로 결속력이 강하다고는 할 수 없고, 그저 가장 큰 그룹이라 들어온 의원도 있다는 견해가 있다. 이 때문에 정책적 결속력도 약해, 이른바 ‘살롱 하토야마’サロン鳩山라고도 불린다. 또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처럼 잠시 있다가 다른 그룹으로 옮기는 이탈자도 많다.

 민사협회와 관계가 깊어, 구 자유당 계열 이외의 의원이 대부분 참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룹 우애’グループ友愛, ‘하토야마·가와바타 그룹’이라고도 불린다.

 하토야마는 2009년 5월 16일에 발행한 자신의 e-메일 뉴스레터에서 “‘정권 교체를 실현하는 모임’은 파벌이 아니다. 그 증거로 정권교체가 실현되면, 이 ‘정권 교체를 실현하는 모임’은 해산한다.”고 언급했지만, 이후 이 모임은 ‘정권 공약을 실현하는 모임’이 되었다. 2009년 12월에는 정치단체에 해당하면서도 신고하지 않은채 정치자금 수지 보고서 제출 의무나 기부금 제한 등을 피하고 있던 것이 밝혀지기도 했다.(당시 그룹 운영비는 연 1천만 엔 이상으로, 대부분 하토야마가 부담하고 있었다.) 하토야마는 파벌이 아니라 순수한 학습회로서, 정치단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2010년 1월에 활동을 재개하고, 총무성에 정치단체로 신고.


국가형태 연구회国のかたち研究会
 간 그룹 - 간 나오토菅直人, 에다 사쓰키江田五月

 구 사회민주연합에서 동료였던 간 나오토와 에다 사쓰키를 후견인으로 삼아, 2000년에 발족했다. 매주 목요일에 간의 집에서 모임을 가졌지만, 간이 운영에 거의 관여하지 않아 에다가 실질적인 운영자가 되었다.

 민주당 내에서 자유주의적 성향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구 사회당, 구 민주개혁연합 계열이나 시민운동가 출신이 많다는 특징도 있으나, 간이 민주당 대표일 때 당선된 의원이나 간의 기반인 도쿄, 에다의 기반인 오카야마岡山 출신 의원도 많아 인간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그룹이라는 측면도 있다.

 소속 의원이 겹치는 신 정국간담회(구 사회당·총평 계열)나 리버럴의 모임(リベラルの会: 당내 신진 호헌파 그룹)과 정책적으로 보조를 맞추는 경우가 많다.

 2010년에 간이 대표(총리)가 되었지만, 하토야마 시절의 당내 인물이 대거 유임되면서 몇몇이 입각하는 것에 머물렀다.


신 정국간담회新政局懇談会
 요코미치 그룹·구 사회당 그룹 - 고시이시 아즈마輿石東, 요코미치 다카히로横路孝弘

 1998년, 민주당(구)에 민정당이나 신당 우애 등의 보수 정당이 합류해 지금의 민주당이 발족하였다. 당시 당의 우경화에 위기감을 품었던 요코미치를 중심으로 시작한 정책집단 ‘정국단담회’政局懇談会가 전신이다.

 2002년에 오하시 교센大橋巨泉이나 우부카타 유키오生方幸夫 등 비노조·자유주의 사상을 가진 의원도 합류해, 요코미치를 회장으로 삼아 다시 출발했다. 국가형태 연구회(간 그룹)나 리버럴의 모임과 보조를 맞추는 경우가 많고, 오자와 그룹과도 국제연합 대기군待機軍 구상 등에서 합의에 이르는 등 안보정책 등에서 공동으로 연구에 참여하는 등 다른 그룹과 협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마에하라 그룹이나 하토야마 그룹, 하타 그룹, 민사협회 등 보수계열과는 대립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민주당에서 보수파와 달리 언론 노출도 적고, 소속 의원의 스캔들도 연달아 터졌으며, 2005년의 제44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소속 의원들이 대거 낙선하는 등 존재감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2007년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다수의 노조 계열 후보가 당선되고, 소속 의원이 대거 당 요직에 취임하는 등으로 다시 재기했다. 정권 교체 이후에는 회장이던 요코미치가 중의원 의장이 되었고, 다수의 의원이 입각하는 등 주류파로 성장했다. 그러나 하토야마 내각 당시 농림수산대신이던 아카마쓰 히로타카赤松広隆가 구제역 문제 등으로 간 내각 출범 당시 사퇴했으며, 또한 2010년 참의원 선거에서는 주요 중진이 은퇴하는 한편 다수의 소속의원이 낙선하는 등 다시 비주류로 전락했다.


민사협회民社協会
 가와바타 그룹·구 민사당계 - 가와바타 다쓰오川端達夫, 다나카 게이슈田中慶秋

 1980년대까지 사회당은 총평, 민사당은 동맹이 지지하고 있었다. 1989년, 총평과 동맹이 합병하여 연합(連合: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日本労働組合総連合会)이 되었지만, 구 동맹계 노조는 민사당을 계속 지지하고 있었다. 1994년 12월에 민사당이 해산하고 신진당 결성에 참여하자, 당시 민사당 소속 국회의원 및 지방의원이 결성한 것이 민사협회였다. 1997년 12월, 신진당이 해산하자 신당우애나 자유당으로 갈라졌다가 민주당으로 합류했지만, 이때까지도 구 동맹계 노조의 지원은 그대로였다. 구성원 대부분이 구 동맹계 노조의 조직 후보였으며, 노조원 출신도 많다. 구 동맹계 노조에는 대표적으로 자동차총련(自動車総連: 전일본자동자산업노동조합총연합회全日本自動車産業労働組合総連合会)이나 전력총련(電力総連: 전국전력관련산업노동조합총연합全国電力関連産業労働組合総連合), UI젠센동맹(UIゼンセン同盟: 전국섬유화학식품유통서비스일반노동조합동맹全国繊維化学食品流通サービス一般労働組合同盟) 등이 있다. 이들 노조를 기반으로 전국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고, 노조 지원으로 당선된 지방의회 의원이 지방조직 간부를 맡는 경우도 많다.

 규모는 구 사회당·사민당계 중심의 신 정국간담회에 버금가는 정도. 소속 의원이 낙선하거나 고령화하는 등 세력은 침체되는 경향에 있었지만, 정권 교체 이후에는 가와바타를 비롯해 여럿이 입각했고, 간 내각에서도 전원이 유임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하토야마 그룹이나 오자와 그룹 등 보수 계열과 관계가 깊다.


료운카이凌雲会
 능운회, 마에하라 그룹 -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에다노 유키오枝野幸男, 센고쿠 요시토仙谷由人

 1999년에 신당 사키가케의 구성원이 결성한 고호카이(高朋会·고붕회)와, 정권전략연구회(구 민정당 출신의 하타 그룹)에 참가하고 있던 젊은 의원들이, 2002년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젊은 후보를 세우기 위해 결집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선거에서 마에하라와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와 조정 끝에 노다를 대표 후보로 지원했다. 노다는 낙선했지만, 젊은 의원들의 그룹으로서 존재감을 크게 나타냈고, 이후 ‘료운카이’로 정식 출범했다. 일본신당日本新党이나 신당 사키가케 출신을 중심으로, 초선 의원을 받아들이며 성장하였다.

 2004년 대표 선거에서는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를 무투표로 당선시켰고, 2005년 대표 선거에서는 마에하라가 간 나오토를 2표 차이로 꺾고 당선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마에하라가 대표 시절에 중국 위협론을 언급하고, 티베트 독립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에다노의 영향 등으로 언론에서 외교적으로는 강경파라고 언급되기도 하지만, 국내적으로는 외국인 참정권 도입, 부부 별성제 추진 등 중도좌파적 성향을 가진 의원도 많다. 경제정책적으로는 규제 완화 혹은 자유화를 지향하는 신자유주의자가 많다. 마에하라의 기반인 교토 출신 의원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정치적으로는 가세이카이(花斉会·화제회:노다 그룹)와 동일하게, 여당과 정책으로 승부하는 ‘대안 노선’을 지향하고 있다. 반면에 정국이나 선거에는 적극적이지 않거나 경험도 얕아, “헛점이 많다.”[ワキが甘い]는 비판도 있다. 마에하라 대표 시절에 당내 운영, 특히 이른바 호리에堀江 메일 문제에서 이 약점이 그대로 드러났다.

 오자와 대표 시절에는 ‘반주류파’라고도 불렸지만, 에다노는 “비주류파이지, 반주류파가 아니다.”라고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2002년 대표 선거에서는 노다를 지원했지만, 료운카이 결성의 계기가 되었던 노다는 별도로 ‘지사의 모임’志士の会, 그리고 그 후신인 가세이카이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양 집단은 거의 견해가 일치하고 있어, 정책적으로 보조를 맞추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두 그룹을 묶어서 ‘마에하라·노다 그룹’ 또는 ‘마에하라·에다노·노다 그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토야마 대표가 사임하자, 간 나오토 지지를 표명했다. 간 정권 탄생의 주역으로 가세이카이와 함께 순식간에 주류가 되었고, 에다노가 간사장, 센고쿠가 내각관방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참의원 선거 패배 이후 오자와계 그룹을 중심으로 비판받는 그룹이기도 하다.


가세이카이花斉会
 화제회, 노다 그룹 -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나가시마 아키히사長島昭久

 민주당내 집단 가운데 가장 자민당스러운(?) 집단이다. 원래는 마쓰시타 정경숙松下政経塾 출신 국회의원이 55년 체제의 붕괴에 따라 보수계 신당을 구상하여, 1993년에 결성한 ‘마쓰시타 정경숙 입지회立志会’가 원류였다. 그러나 일본신당, 신생당, 신당 사키가케, 신진당, 민주당(구) 등 보수 계열 신당이 잇달아 창당되고, 소선거구제와 함께 출신자들이 자민당, 신진당, 민주당(구)으로 나뉘면서 근본적으로 유지가 어려워졌었다.

 1996년에 ‘지사의 모임’志士の会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발했지만, 출신자 자체가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게다가 같은 해에 열린 제41회 중의원 총선거(소선거구·비례대표 병립제가 처음으로 시행)에서 노다 자신이 아쉽게 낙선하면서, 이후에는 제1기 출신인 노다를 중심으로 학습회로 유지되어 왔다.

 2002년에 노다가 민주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면서 다시 ‘지사의 모임’을 결성했고, 2006년에 가세이카이로 개칭·확대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2002년, 2004년, 2005년의 대표 선거에서는 대개 료운카이와 함께 활동했다.

 료운카이도 마찬가지지만,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이 많아 ‘마에하라·노다 그룹’을 ‘정경숙 동아리’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지사의 모임 시절에는 전부 정경숙 출신인 적도 있었고, 이러한 구조는 료운카이에서 조차 폐쇄적이라고 지적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가세이카이 확대의 계기가 되었고, 민주당 내에서 결속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2008년, 민주당 대표 선거에서 노다의 입후보에 찬반이 갈려 일부 의원이 탈퇴하면서 노다 그룹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이후 노다 그룹은 당내 존재감이 대폭 하락했고, 2009년에 하토야마 내각이 출범하자 당내 그룹에서 유일하게 각료를 배출하지 못하기도 했다.(당시 노다는 재무부대신에 머물렀다.)

 2010년에 간 내각이 수립되자, 노다가 재무대신에 취임하고, 그룹의 사무국장인 렌호蓮舫가 행정쇄신 담당 대신에 취임하는 등 변화가 보이기도 한다.

 정책 입안 능력에는 그룹 스스로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이른바 ‘대안 노선’을 처음으로 주장한 집단이기도 하다. 신보수주의적 경향도 보인다.


정권전략연구회政権戦略研究会
 하타 그룹·구 신진당 우파 - 하타 쓰토무羽田孜, 와타나베 고조渡部恒三, 이시이 하지메石井一

 구 민정당 출신을 중심으로 1998년에 결성되었다. 처음에는 통합 민주당 내에서의 발언력 확보,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영수인 하타를 총리로 옹립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2002년의 대표 선거에서 중진들은 오카다를 지지한데 비하여, 소장파의 다수가 노다를 지지하면서 료운카이나 지사의 모임으로 이적해 분열되었다. 이후 하타를 중심으로 구 민정당 계열의 중진 의원이 다수를 차지한다.

 하토야마 그룹과 함께 구 신진당 출신 보수파가 중심이었지만, 하토야마 그룹으로 옮겨간 의원도 많다. 특히 보수신당保守新党이 결성되자 구마가이 히로시熊谷弘 등 중진이 탈당해 타격을 받았다.

 오자와 그룹, 하토야마 그룹, 민사협회와 함께 이른바 ‘보수계 그룹’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개별적으로 오자와와 함께 하는 이시이, 반 오자와의 선봉이 되는 와타나베가 함께 존재하고, 영수인 하타가 고령(1935년생)인 점 등으로 결속력은 점점 낮아지고 있다.


리버럴의 모임リベラルの会
 - 히라오카 히데오平岡秀夫, 곤도 쇼이치近藤昭一

 민주당의 젊은 자유주의자 혹은 호헌파 의원이 모여 2004년에 결성하였다. 처음부터 대표를 두지 않고, 20명의 간사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를 채택. 결성의 기본 이념은 ① 호헌, 전수방위, 집단적 자위권 부인, 국제연합 중심의 집단적 안전보장, 북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전을 위한 이니셔티브, ② 시민에게 열린 정치.

 처음에는 50명 이상이었지만, 독자 후보 옹립에 실패하거나 정책 통일이 명확하지 않아 서서히 숫자가 줄었다. 게다가 2005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기반이 약한 젊은 의원들이 우정 개혁을 내세운 자민당에 대거 패배하면서 모임의 존립마저 위태로웠지만, 곤도와 히라오카를 대표 후견인으로 삼아 활동을 재개했다.

 구성원 대부분은 신 정국간담회(요코미치 그룹)나 국가형태연구회(간 그룹)에도 소속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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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8월 30일의 제45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대승하고 난 뒤로(당시 분석은 선거결과 분석선거일후 정세를 참조) 정권이 교체가 되었다. 9월에 하토야마 내각이 70퍼센트를 넘는 높은 지지율로 출범했지만, 오자와 정치자금 문제가 부상하고, 하토야마는 세뱃돈을 너무 받아서 문제가 되었고, 하토야마와 오자와는 서로 잉야잉야 힘싸움을 하는 와중에 후텐마 기지 이전 문제가 다시 지지부진한데다 문제의 복안이 뭔지 하여간 내각 지지율이 20퍼센트까지 급락하면서 하토야마와 오자와가 동반으로 퇴진했더랬다.(이 과정에서 연립 여당이었던 사민당은 대표인 후쿠시마 대표가 파면당하고, 연립에서 이탈했다.)

이틀 뒤의 대표 선거에서 간 나오토(菅直人)가 당선되면서 다시 내각 지지율은 급상승했지만, 다시 또 간 총리가 소비세를 들고 나오는 바람에 급락했다. 주를 달리하며 급락하는 마당에 선거가 무슨 큰 타격을 맞을 것 같아서, 간 총리는 이제 갈리는 마당에 2004년에 얻었던 의석(즉 이번에 교체되는 의석 가운데 당시에 얻은 의석)인 50석이나 지금 가지고 있는 54석(이번에 교체되는 의석)을 마지노선으로 잡았드랬다. 그러면서 만약 과반수를 못먹으면 어디든 손을 잡을 것이라고 표명했지만, 자민-공명-사민-민나노-공산 5개 당이 연립을 부정.......

이 와중에 자민당에서도 선거 책임으로 이번 선거를 노리고 우후죽순 신당을 만들었드랬다. 우정민영화에 반대했었던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赳夫)와 선거 책임을 묻던 요사노 가오루(与謝野馨) 등등이 뛰쳐나가 진짜로 '일어서라 일본'이라는 당을 만들었다..... 자민당 집행부를 주로 까던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도 뛰쳐나가고 일부 몇몇이 모여 신당 개혁(新党 改革)을 만들었다. 여기서 탈당한 요사노나 마스조에는 탈당신고가 수리 안되고 그냥 제명당했다.

여기서 2009년에 자민당을 떠난 와타나베 요시미(渡辺喜美)가 만든 민나노당(みんなの党/모두의 당)이 의외로 부상했다. 공약 자체는 고이즈미틱한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보이는데, 공약때문은 아닌 것 같고 자민당 이놈들 반성해라!하고 민주당으로 갔다가, 이 산이 아닌가벼...하는 애들 중에 상당수가 여기로 쏠렸으리라 짐작된다. 원래 얘들도 사실은 정권 획득!보다는 정계 재편을 목표로 삼았지만, 민주당이 못하는 바람에 갑자기 지지율이 올라 어어?!하고 있는 것 같음. 간 나오토가 나타나는 바람에 다시 지지율이 빠지는 것 같았으나, 다시 민주당 지지율이 떨어지는 바람에 지지율이 상승.... 그러나 보수계열이다.

그러던 과정에서 선거가 찾아왔습니다. 2010년 7월 11일에 열린 선거의 의미는 이런 위에서의 정계의 움직임과 함께, 민주당이 정권을 잡고 처음 맞는 선거이자 자민당 창당 이래 처음으로 야당인 선거. 결과를 까보니.


민주당이 44석으로 대패.... 별 코멘트 안하겠음. 승자가 민나하고 자민당밖에 없네여, 우왕....... 며칠 더 지나보면 제대로 된 분석을 할 수 있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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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합동(保守合同, 호슈고도)은 일반적으로 1955년 11월 15일에 일본에서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두 보수 정당이 합쳐 자유민주당을 결성한 일을 말한다. 이전에는 일본사회당의 좌파와 우파가 통일을 이루었으며, 자유민주당과 일본사회당의 양대 정당 체제를 55년 체제라고 부른다.


배경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직후, 사회주의 세력의 대두에 위기를 느낀 보수 정치가 사이에는 이전의 입헌정우회 계열의 정치가와 입헌민정당 계열의 정치가가 결집하여 신당을 결성한다는 구상이 제시되었다. 정우회 계열은 하토야마 이치로를 대표로 생각했고, 전시의 익찬의회에서는 하토야마와 함께 군부에 맞선 민정당 계열의 미키 부키치가 구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민정당 계열 대부분은 대표 경험이 없는 하토야마보다는, 민정당의 마지막 총재였던 마치다 다다하루가 대표로 어울린다는 의견이 우세해, 결국 민정당 계열은 마치다를 총재로 옹립해 일본진보당을 결성하면서 구상은 좌절되었다. 그러나 일본진보당은 이전의 정치가가 많아 공직 추방으로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한편 하토야마를 총재로 삼아 정우회 계열을 중심으로 결성된 일본자유당은 1946년의 총선거에서 제1당으로 부상한다.

제1당으로 부상한 일본자유당이 무색하게도, 하토야마나 미키 등의 간부의 다수가 공직 추방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다만 새로 선출된 사람이 많아 제1당의 지위는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자 점령군이 우호적인 친미파 요시다 시게루를 총리로 옹립해 위기를 극복하려 했지만, 요시다는 공직 추방 해제 이후에도 이를 거절한다. 이즈음에는 당의 성격도 하토야마 중심에서 요시다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으로 전향해 있었다.

1954년, 하토야마는 미키 부키치·고노 이치로·기시 노부스케 등과 함께 요시다에게 불만을 가진 자유당 내의 세력이나 야당의 개진당 등의 보수계 정당과의 통합을 구상해 일본민주당을 결성했다. 한편 잔류한 자유당 세력에서도 요시다의 원맨(one-man) 정치 스타일에 불만이 높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오가타를 중심으로 하는 간부들은 요시다의 퇴진을 권고했다. 결국 요시다도 내각 총사직을 결심하고, 오가타에게 총재직을 넘겼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하토야마가 오가타를 꺾으면서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자유민주당의 결성

1955년 초, 우파와 좌파로 분열되어 있던 일본사회당이 단결하면서 제1당으로 부상하자, 보수정당은 매우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미키나 오가타 등은 보수 세력의 통합을 주장했고, 마쓰무라 겐조 등은 보수 분립을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보수합동을 통하여 자유민주당이 결성되어 유일 보수 정당의 단독정권을 기반으로 하는 55년 체제가 출범하였다.

그러나 보수 정당 내에서도 골은 깊어 대표는 확정되지 않았고, 하토야마와 오가타, 미키, 오노 반보쿠의 4명의 총재 대행위원 체제로 당이 출범하였다(5달 후인 1956년 4월에 하토야마는 총재로 취임). 또한 하토야마파에 반발한 요시다 시게루, 사토 에이사쿠,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등은 당초에는 자민당에 참여하지 않기로 하는 등, 엇갈리는 조짐도 보였다.


자민당 붕괴론

자민당은 전후의 다양한 보수 세력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파벌이 얽히고 섥혀 굳은 기반을 가진 정당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보수합동 당시의 미키 다케요시는 자민당을 두고 ‘10년이나 가겠나’라거나, 마쓰무라는 ‘30년 뒤에 붕괴된다’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일본 경제가 급속히 성장한 이후, 소위 정·관·재의 유착구조나 파벌 등을 기반으로 하는 직위와 자금의 분배, 유사 정권 교체 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그 정치적 기반은 강화되어 갔다.

이후 자민당은 40일 항쟁 등의 분열 위기, 신자유클럽의 결성, 1993년의 신당 사키가케 등으로의 분할 등 55년 체제의 붕괴 등의 위기 속에서도 2007년 현재까지 제1당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 참패했음. 별도의 수정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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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연립협의를 타진 / 사민당·국민신당도 적극적[각주:1]

 민주당은 총선 다음날인 8월 31일, 사회민주당과 국민신당에 연립정권 수립을 향한 협의를 타진했다. 한편으로 9월 14일 전후로 계획된 수상지명선거를 위한 특별국회 소집시기를 다음 주로 앞당기도록 여당에 요청하는 것도 검토에 들어갔다. 자민당은 임시 임원회를 열어 아소 총리의 후임을 정하는 총재 선거를 특별국회 이후인 9월 18일에 고시하고, 28일에 투표하는 일정을 결정했다.

 민주당의 하토야마 대표는 8월 31일, 사민당의 후쿠시마 당수와 국민신당의 가메이 시즈카 (亀井静香) 새 대표와의 전화통화에서 연립 협의를 타진했다. 양당도 적극적인 반응을 보여 연립정권 수립이 확실해 보인다. 민주당의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간사장은 야마오카 겐지(山岡賢次) 국회대책위원장에 대해 특별국회 일정에 대해 여당과 협의를 서두르도록 지시하고, 야마오카 위원장은 9월 1일 자민당의 오시마 다다모리(大島理森) 국회대책위원장과 이후 일정을 협의한다.

 사민당은 총선 다음날인 8월 31일에 열린 3임원 회의에서 상임간사회를 9월 1일에, 전국대표자회의를 그 다음날 열어 연립 참가를 논의할 방침을 확인했다. 와타누키 당대표와 가메이 간사장이 모두 낙선한 국민신당은 가메이 시즈카(亀井静香) 대표대행의 승격을 정하고, 연립 협의에 임하는 태세를 정비했다.

 선거에서 대패한 자민당은 아소 총리가 기자회견에서 “책임을 강하게 느낀다. 총재를 사임하고자 한다.”고 정식으로 표명하고, 그 후 열린 임시 임원회에서 총재 선거 일정을 정하고 당 소속 양원(兩院) 의원과 47개 도도부현(都道府県) 연합 대표(각 3인, 총 141)의 투표로 선출한다는 방식도 정했다. 또한 9월 4일에 전국간사장회의, 8일에는 양원 의원총회를 열어 총선거를 총괄하는 것도 결정했다.

 특별국회에서 열릴 수상지명선거는 아소 총재인 채로 진행될 예정. 당내에서는 총선 참패의 책임이 있는 총리의 이름을 쓰는 데에 반발도 예상되지만, 아소 총리는 기자회견에서 “졸속으로 새 총재를 뽑는 것은 지방 당원·당우(黨友)의 불만의 바탕이 된다.”고 언급.



「오자와 지배」를 경계, 간판인 정치주도는 불분명[각주:2]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함으로써 정권교체가 결정된 8월 30일 밤. 도쿄 롯폰기(六本木)의 한 빌딩에 마련된 민주당의 개표센터의 한편에서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대표와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간 나오토(菅直人), 고시이시 아즈마(輿石東)의 세 대표대행, 그리고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간사장이 머리를 맞댔다.

 오자와 대행과 가까운 고시이시 대행이 입을 열어 불쾌감을 나타냈다.

 “도대체 정권이행팀이란게 무엇인가.”

 관방장관이나 간사장 등의 골격을 먼저 굳히고, 정권이행에 들어간다. 그러한 정권이행팀이 오카다 대표 이후 당의 구상이다. 하토야마 대행이나 오카다 간사장은 이번에도 그러한 방식을 취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당내의 주도권 다툼을 부를 가능성도 있다. 오카다 간사장은 오자와 대행과 거리가 있는 중견 인사와 젊은 층의 지지가 두텁다. 이날 오카다 간사장의 측근은 그에게 간사장 유지를 청하며 이렇게 못박았다.

 “오자와 이치로씨가 간사장이 되어 민주당이 오자와 지배가 되지 않도록.”

 오자와 대행에게 당 운영을 맡기는 것에 대해서는 당내의 의견이 절반으로 갈라진다. 하토야마 대표는 31일 미명의 회견에서 궤도 수정을 꾀했다.

 “(인사를) 일부만 정하는 것은 다른 균형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의 야당으로서의 인사보다 정권의 인사가 훨씬 무겁다. 일부라도 먼저 인선하지 않으면 수습불가능한 사태가 될 수도 있다.

 결국 그런 염려에서 인사는 모두 보류되었다.


■ 이중구조 권력 재현의 위기감

 민주당 내에서 오자와 이치로 대행에게 거리를 두는 의원들이 경계하는 것은, 여당 실력자가 정부를 바깥에서 조종하는 권력의 이중구조의 출현이다.

 1993년, 여야 역전으로 탄생한 호소카와 연립정권이 1년을 채 넘기지 못하고 붕괴된 “호소카와 트라우마”(細川トラウマ)가 머리를 스친다. 오카다 간사장은 저서 『정권교체』(政権交代)에서 호소카와 정권이 단명(短命)한 이유는 “최대 실력자인 오자와씨가 정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이라고 언급했다. 당시 7개 정당과 1개 회파(교섭단체)를 합친 연립정권의 중심이 된 오자와 이치로(당시 신생당 대표간사) 대행은 입각하지 않은 이유를 “당의 조정자가 각료가 되면 여당을 모을 수 없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신정권 인사의 초점도 분명 그에 있다. 하토야마 대표나 간 나오토 대행이 간사장을 내각 밖에 두어 당 운영을 따로 두는 구상을 그리면서 오자와 씨에게 거리를 두는 중견 인사와 젊은 층을 중심으로 “오자와 간사장 기용”을 경계하는 움직임이 커졌다. 당이 내건 “정치 주도”를 실현하기 위한 기구개혁과 주요 간부 인사는 밀접하게 얽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오카다 간사장이 대표를 맡았던 2005년, 정치 주도를 목표로 해 만들어진 민주당의 “오카다 정권 500일 플랜”에는 정권이행위원회가 명기되어 있다. 투개표 다음날에 수상이나 관방장관 예정자와 간사장을 정하고, 정권운영의 기본방침을 결정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하토야마 대표는 기자단에게 “연립협의에는 우선 간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집행부 체제 하에서 당분간 움직인다.”고 명언했고, 정권이행팀 설치를 그리던 오카다 대행도 “대표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러한 방침을 따르는게 당연하다.”고 언급했다.

 “정치 주도”는 이번 총선거에서도 전면으로 내건 간판. 목적은 분명 권력의 이중구조를 없애는 것이다. 현재의 정부·여당의 이원체제에서 정책 결정을 일원화하기 위해 당 간부가 주요 각료를 겸임한다. 족벌 의원과 관료의 유착을 지우고, 정책결정을 신속하게 한다. 정책결정을 국민이 보더라도 이해하기 쉽도록 한다. 일련의 개혁의 토대라고도 할 수 있고, 정책집에서도 “하토야마 정권 구상”이라며 한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또한 정책집에서는 예산의 골격 등을 결정하도록 수상 직속의 “국가전략국” 설치도 담고 있다. 담당 대신은 중요 각료의 위치를 가지며, 정조회장이 겸임한다. 행정쇄신회의에서 행정력 낭비나 부정을 배제하는 구상도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달 중순으로 보이는 총리 선출이나 조각(組閣)이 가까워지면서 이미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지만, 간부들이 총선 유세에 집중하면서 늦어진 면은 부정할 수 없다. 8월 31일 낮에 간 나오토 대행과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이 당본부에서 하토야마 대표와 국가전략국에 대하여 협의했으나, 그 상세한 설계는 당간부 사이에서 충분히 공유되어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오자와 씨의 이중권력 구조라고 계속 불리지는 않을까. 8월 30일 밤의 니혼 테레비(日本テレビ)의 프로그램에서 오카다 간사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게 된다면 민주당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이 사라진다. 오자와 씨도 여러 곳에서 ‘인사는 대표가 정한다. 나는 대표를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 연립 제2당은 “여당 협의의 장을”

 어느정도 내각과 민주당을 일원화한다고 하더라도 연립정권에 참가하는 다른 당과는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과제가 남는다.

 “연립에 대해 간사장으로부터 연락이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민주당의 하토야마 대표는 8월 31일 오전, 사회민주당의 후쿠시마 당수와의 통화에서 연립 협의에 대해 언급했다. 오후에는 국민신당의 가메이 시즈카 새대표와의 통화에서도 “연립 협의를 합시다.”라고 언급했다.

 308석이라는 대승을 거둔 민주당이지만, 사회민주당과 국민신당에는 저자세가 될 수 밖에 없다. 각각 7석과 3석에 불과하지만, 단독 과반수가 아닌 참의원에서는 안정된 국회운영이 힘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두 당도 지금까지의 방침대로 연립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민당은 9월 2일로 예정된 전국대표자회의에서 지방조직의 의견을 듣고 조금씩 절차를 진행시키고자 한다. 국민신당도 연립참가에는 일관되게 적극적이어서 3당 연립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

 그러나 연립 정권 구성시에 여당간에 어떻게 정책을 조정할 것인가는 확실치 않다. 사민당 후쿠시마 당수는 8월 31일, 기자단에게 “(국민신당의) 가메이 대표와도 이야기했지만, 만약 연릭에 참가하는 경우 여당간의 정책협의의 장이 필요하다.”고 언급했다. 내각의 기구와는 별도로 여당협의회와 같은 조정기구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내비친 것이다.

 민주당은 총리 직속의 국가전략국에서 예산의 골격을 정한다고 하지만, 다른 당에서는 예산에 관여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국민신당 가메이 대표는 정권 구상에 대해서도 “국민신당이나 사민당과 협의하지 않으면 안된다.”며 견제. 선거협력을 맡았던 오자와 대행도 국가전략국에는 부정적이라는 견해를 취한다.

 이런 연립의 정책조정에서 열쇠를 쥘 것으로 보이는 민주당의 간사장 자리에 사민당과 국민신당에서 이름이 오르는 것은 오자와 대행. 대표 시절에 양당과의 조정을 받아들여 신뢰가 두텁기 때문이다.

 만약 여당협의회가 생기면 내각에 대해 극히 강한 거부권을 가질 수 있다. 양당의 수는 적지만, 참의원에서 반대하는 경우 법안이 부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 때 민주당 간사장이 다른 당과 연계할 경우 내각의 정책결정을 뒤집을 수도 있다.

 민주당 내의 중견·젊은 인사가 오자와 대행의 간사장 임명을 경계하는 이유는 이 점에도 있다.

 국민신당 가메이 시즈카 대표에게는 호소카와 정권에서 하야한 야당의 자민당 시절, 구 사회당과 연립해 오자와 대행 등에게서 정권을 되찾았다는 인연도 있다. 그런만큼 “시즈카에게는 신경쓰는 편이 좋다.”고 하는 목소리도 민주당 내에 있다.

 정치 주도라는 길로는 쉽게 갈 수는 없다. 8월 31일 저녁, 기자단의 연립 협의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하토야마 대표는 철저히 저자세를 고수했다.

 “사민당분들과 국민신당분들에 대해 우선 부탁을 드린다는 이야기가 되어 있다.”



경기대책, 복잡한 방정식 / 신정권은 중대국면[각주:3]

 총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한 다음 날의 도쿄 금융시장은 닛케이 평균 주가가 잠깐 올해들어 최고치까지 올라갔지만, 급속한 엔고 등으로 하락으로 전환하는 등 기대와 불안이 교차했다. 시장에서는 연말부터 내년 초에 걸쳐 경기가 감속한다는 견해도 있어 새 정권의 경제운영은 곧 중대 국면을 맞이할 것으로 보인다고 아사히 신문이 보도.


■ 축하식 최고치도 한순간뿐

 “오전의 주가상승은 민주당을 위한 ‘축하식 시장’. 이후에는 새 정권의 얼굴이나 구체적인 정권 운영을 끝까지 보면서 추이를 옮길 것.”(유명 증권사)

 총선 다음날의 도쿄 주식시장에서 나타난 견해다. 닛케이 지수는 오전 중에 전주 대비 323.86포인트 상승한 10,767.00포인트를 찍으며 거래시간 중 연초 이래 최고치를 경신했다. 민주당의 육아 지원책의 수혜주로 보이는 육아 관련 상품에 매수 주문이 모였다.

 동시에 도쿄 외환시장에서는 중의원과 참의원에서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하는 정국안정을 좋은 재료로 삼아 “일본 매수” 주문이 몰리며 엔 시세가 전주 대비 1엔 38엔 오른 1달러=92엔 54전까지 상승했다.

 그러나 이후 엔고와 중국의 주가 하락의 영향을 받아 주식시장에서 매도가 잇따르고, 결국 종가는 41.61포인트 내려간 10,492.53포인트. 엔 시세 또한 단기적 움직임이라는 견해가 많다.

 한편 채권시장의 반응은 비교적 차가웠다. 장기금리가 대표적 지표인 신발행 10년물 국채의 유통이율은 한때 1.3%대를 맴돌다 1.295%로 하락(채권가격은 상승). 이후 경기의 불투명으로 주식보다 안정적인 채권에 인기가 모이는 상황에서는 민주당이 압승하더라도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다. 정권교체를 우선 반기지만 경기회복의 특효약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신정권의 정책에 따라 올해 예산의 조정이나 내년 예산을 어떻게 편성할 것인가. 주식시장이나 엔 시세는 그 동향에 좌우될 것으로 보인다.


■ 공공사업 카드, 양날의 칼

 민주당 중심의 정권으로 경기는 어떻게 될 것인가.

 다이이치(第一) 생명 경제연구소의 구마노 히데오(熊野英生)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민주당은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민주당은 공공사업비나 공무원 인건비를 깎아 유아 수당이나 고속도로 무료화라는 간판을 내세웠지만 공공사업비 삭감 등은 단기적으로 경기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낭비를 깎아 무엇이 바뀌는가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으면 실망이 나타날 수 있다.”고.

 올해 2분기의 GDP가 전기 대비 3.7%/년 늘어나 1년 3개월만에 성장으로 돌아섰다. 정부의 경기대책에서 에코 카 감세나 에코 포인트, 공공사업비 증액에 따른 효과가 크고, 민간 분석가 대부분도 3분기에 더욱 그 폭이 늘어난다고 예측한다.

 그러나 정액급부금[각주:4]의 효과도 사라져가고 있고, 연말에는 에코카 감세나 에코 포인트의 효과도 희미해질 것으로 보인다. 2010년 1분기에 다시 마이너스 성장에 빠질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7월 실업률이 과거 최악인 5.7%까지 올라가는 등 회복을 실감하기에는 아직 멀어 추가 경기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

 연말 이후 다시 마이너스 성장에 빠지고, 여론 지지마저 낮아지면 “공공사업비 삭감과 같은 정책 기조를 바꾸어야 할 가능성도 있다.”(노무라 증권 금융경제연구소 기우치 다케히데(木内登英) 경제조사부장)



어제의 적은 오늘의... 자민당 응원하던 지자체장, 우왕좌왕[각주:5]

 민주당이 압승한 총선거가 끝나고 여명이 밝은 8월 31일, 이때까지 자민당을 응원하고 있었던 지자체장들이 민주당에 접근하거나 선거때 있었던 발언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고 있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거의 반세기에 걸쳐 정권을 장악한 자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고, 민주당이 여당이 된 첫 사태인 만큼 지자체장들도 당분관은 우왕좌왕할 것 같다는 아사히 신문의 보도.

 “당선 축하합니다. 선거 중에는 실례되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만,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이제부터는 새로운 정신으로 부탁드립니다.”

 후쿠오카현(福岡県) 오무타시(大牟田市)의 고가 미치오(古賀道雄) 시장은 31일 아침, 지역구에서는 낙선했지만 비례대표로는 규슈 블록에서 당선된 민주당의 노다 구니요시(野田国義) 씨를 단신으로 방문했다. 노다씨는 “알겠습니다.”라고 응했다.

 노다씨와 지역구에서 맞붙었던 상대는 후쿠오카 7구에서 당선된 자민당의 고가 마코토(古賀誠). 운수대신이나 당 간사장 등의 요직을 역임한 실력자다. 고가 시장은 총선에서 고가 마코토 의원을 지원하면서, 야메(八女) 시장이었던 노다 후보를 지칭해 “시장 시절에 실적도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번 화해에는 노다씨의 선대본부장인 민주당의 오쿠보 쓰토무(大久保勉) 참의원 의원이 동석했다. 오쿠보씨는 총선때 민주당 우세가 전해지자 고가 마코토 후보를 지원하던 후쿠오카 7구의 4개 시장과 면담하면서 “지자체의 장은 중립이어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러나 고가 시장만은 “한창 싸우는 중에 만나면 어쩌나.”며 면회를 거부했다. 당시 고가 시장은 시 사업에 국가지원이 필요했으므로, 여당 실력자였던 고가 마코토 의원을 지원한 것.

 그러나 민주당 정권이 출범하면 고가 마코토 의원이 야당 의원으로 전락하는 것이 확실해였다. 고가 시장은 마코토 의원의 실력에 계속 기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민주당에 줄대기에도 쫓겼다. 노다 씨를 방문한 것은 그 첫 걸음.

 나가사키현(長崎県) 가네코 겐지로(金子原二郎) 지사는 총선 다음날인 31일, 현청에서 기자단에게 “총선거에서 자민당을 특별히 응원한 것은 아니다.”라며 해명했다. 가네코 지사는 종종 자민당 후보의 집회에 참석하며, “민주당의 공약에는 재원의 뒷받침이 없다.”며 발언해왔다. 그러나 현내 4개 소선거구 모두 자민당 후보가 패배하자 “신세를 진 분으로부터 안내가 있어서 모임에 나갔다.”며 설명.

 가네코 지사는 나가사키 2구에서 낙선한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전 의원의 유세에서 “규마 선생님이 그만두는 결과가 된다면 좋은가? 냉정히 생각하길 바란다.”는 발언을 한 일도 있지만, 31일에는 규마 전 의원을 꺾고 당선된 후쿠다 에리코(福田衣里子) 씨에 대한 질문에서 “굉장히 착실한 분. 금후에 현의 사업에 대해 설명드리고 싶다.”고.



비례대표 「횡재」로 당선 / 한 표의 의사가 왜곡될 우려도[각주:6]

 정상적이라면 비례대표로 의석을 얻어야 할 정당이, 후보자 부족 등을 원인으로 다른 당에 의석을 내준다? 각 당의 득표를 동트 식으로 계산해 의석을 배분하는 선거방식에 따라, 이번 총선거에서 이러한 의석 양도가 긴키(近畿) 블록(의원 정수 29석)에서 3석, 도카이(東海) 블록(정수 21석)에서 1석 나타났다.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모두 입후보할 수 있는 선거제도 하에서, 민주당은 소선거구에서 당선된 사람이 많아 13석이 배분되어도 최후에는 비례명부에 11명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한편 모두의 당(みんなの党)은 비례대표 1석을 당선시킬 수 있었으나,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중복 출마자가 비례대표에서 당선되고자 할 때에는 소선거구 득표가 유효투표총수의 10%를 넘어야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면서 유일한 비례후보가 낙선했다.

 이로 인해 민주당 2석과 모두의 당 1석이 자민당과 공명당에 각각 2석과 1석씩 돌아갔다. 모두의 당은 또 도카이 블록에서도 유일한 비례후보가 같은 이유로 낙선하면서 민주당으로 1석이 돌아갔다.

 이와이 도모아키(岩井奉信) 니혼대학 교수(정치학)는 “있는 정당에 투표했음에도, 그 몫의 의석이 정반대의 주장을 하는 정당에 돌아간다면 유권자의 의사가 존중받지 못한다. 후바자가 모자란 경우 정수를 깎는다는 발상도 괜찮다.”며 “소선거구에서 낙선했는데 (비례대표에서) 부활 당선하는 중복 입후보 구조 자체에 국민들이 납득하지 못하는 면이 있다. 제도 그 자체를 다시 생각할 필요도 있다.”고 한다.

 모리 히로키(森裕城) 도시샤대학 교수(정치학)는 “(의석 양도는) 이전부터 계속 나타나고 있어, 민의가 정확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제를 느낀다. 국회의원이 큰 권력을 가지는 것을 생각하면, 누구나 괜찮으니까 명부에 올린다고 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한편 총무성의 스즈키 야스오(鈴木康雄) 사무차관은 총선 다음날인 8월 31일의 기자회견에서 “그러한 사태가 있었으나, 현행 방식이 좋다고 하는 국회의 의사라고 생각한다. 선거제도는 각 당과 각 회파(한국의 교섭단체격)에서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에 그쳤다.

  1. <A href="http://www2.asahi.com/senkyo2009/news/TKY200908310391.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8월 31일자</A>. [본문으로]
  2. <A href="http://www2.asahi.com/senkyo2009/news/TKY200908310437.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9월 1일자</A>. [본문으로]
  3. <A href="http://www2.asahi.com/senkyo2009/news/TKY200908310434.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2009년 9월 1일자</A>. [본문으로]
  4. 올해 4월 이후 경기 부양을 위해 정부가 18세~65세에게 2만 엔, 이외에는 1만 2천엔씩 지급. [본문으로]
  5. <A href="http://www.asahi.com/politics/update/0901/SEB200908310047.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2009년 8월 31일자</A>. [본문으로]
  6. <A href="http://www.asahi.com/politics/update/0831/TKY200908310394_01.html" target=_blank>아사히 신문 9월 1일자</A>.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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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2009/08/27 - [政治万談] - 2009년 제45회 중의원 총선거 분석 (선거일전 제1판)


[2009년 8월 30일 19시 57분 제1판]

 총무성이 발표한 오후 4시 현재 평균투표율은 41.83퍼센트로 2005년 9월 총선거보다 0.74퍼센트 낮지만, 기일전 투표(期日前投票)가 국정선거사상 최고인 1398명으로 2005년보다 502만 여명이 높아 최종 투표율은 전회의 67.51퍼센트를 웃돌것이라고 교도통신이 전망하였다.[각주:1]


[2009년 8월 30일 20시 02분 제2판]

 후지테레비 여론조사 민주 321 공산 12 사민 10 국민 4 우리들 14 / 자민 97 공명 22


[2009년 8월 30일 20시 10분 제3판]

 제45회 총선거 결과, 민주당이 300석을 넘을 것으로 전망되어 하토야마 정권 탄생이 확실시. 자민당은 100여석에 그쳐 역사적인 참패를 맛볼 전망. / 현재 개표결과 자민 59 공명 13, 민주 264 사민 3 국민신당 3 다이치 1 신당일본 1 민주계 무소속 1, 공산 7 우리들 4 무소속 3


[2009년 8월 30일 20시 20분 제4판]

[낙선]
자민당 전 재무금융상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 북해도 11구 /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 전 관방장관, 북해도 5구 / 오사카 11구 나카야마 다로(中山太郎) 전 외상, 비례 추천 없음 / 전 농림수산상 아카기 노리히코(赤城徳彦), 이바라키 1구 / 공명당 전 국토교통상 후유시바 데쓰조(冬柴鉄三), 효고 8구


[2009년 8월 30일 20시 30분 제5판]

[낙선]
자민당, 홋카이도 12구 다케베 쓰토무(武部勤) 전 간사장 / 이부키 분메이(伊吹文明) 전 재무상, 교토 1구 / 야마자키 다쿠(山崎拓) 전 부총재, 후쿠오카 2구 / 아이치 12구 스기우라 세이켄(杉浦正健) 전 법무상 / 노다 세이코(野田聖子) 소비자행정상, 기후 1구 / 사토 쓰토무(佐藤勉) 총무상, 도치기 4구 / 전 후생상 니와 유야(丹羽雄哉), 이바라키 6구 / 전 총무회장 호리우치 미쓰오(堀内光雄), 야마나시 2구 /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전 총리, 아이치 9구


[2009년 8월 30일 20시 40분 제6판]

[낙선]
자민당 사사가와 다카시(笹川尭) 총무회장, 군마 2구 비례 추천 없음 / 기타가와 가즈오(北側一雄) 공명당 간사장, 오사카 16구 비례 추천 없음 / 오타 세이이치(太田誠一) 전 농림상, 후쿠오카 3구 / 가타야마 사츠키(片山さつき), 시즈오카 7구 / 주마 고키(中馬弘毅) 전 행정개혁담당상, 오사카 1구 / 야스오카 오키하루(保岡興治) 전 법무상, 가고시마 1구

[현재 개표결과] 소선거구 자민 12 민주 117 국민신당 1 무소속 기타 3 / 비례 자민 30 민주 59 공명 9 공산 2 / 합계 자민 42 민주 176 공명 9 공산 2 국민신당 1 무소속 기타 3


[2009년 8월 30일 20시 55분 제7판]

 자민당 부총재를 지내고, 야마자키파 회장으로 있는 야마자키 다쿠(山崎拓)가 후쿠오카 2구에서 민주당의 신인 이나토미 슈지(稲富修二, 1970년생)에게 패배. 방위청 장관과 당 간사장 등을 역임한 실적이나 북한 문제 대응 등에서 눈길을 끌었으나, 「금후에도 내 힘이 필요하다」는 호소는 변화를 원하는 유권자들에게 눈길을 끌지 못한듯.

 연속 16선의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전 총리가 아이치 9구에서 민주당 전 의원에게 패배. 1960년 첫 당선이래 49년간의 의원생활을 마감할 전망. 현의회나 후원회 조직을 풀가동했으나, 지지자 고령화로 집결력이 크게 낮아져 종반에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호소도 한 바 있으나 대세를 돌리지 못했다. 민주당 오카모토 미쓰노리(岡本充功)는 비례 2선의 전직 의원이자 의사로, 시골 병원의 의사 부족 해소에 노력한 실적 등으로 지지를 모았다.

 8선의 자민당 다케베 쓰토무(武部勤) 전 간사장이 홋카이도 12구에서 민주당 마쓰키 겐코(松木謙公) 전 의원에게 에게 패배. 다케베 전 간사장은 민주당측으로부터 고이즈미 구조 개혁의 상징이라는 공격을 받으며, 우편국 관계자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은 마쓰키 전 의원에게 패배했다.


[2009년 8월 30일 21시 00분 제8판]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자민당 선대부위원장, 8시 20분경 TV에서  "역사적인 대패배라는 것"라고 언급. 이어 선거후 자민당에 대해 "당 해산적 사태가 될 지, 아닐지. 최후의 기회라고 생각한다."고 언급. 패인으로는 저출산 고령화와 인구감소 사회 속에서 국가의 미래를 기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언급.


[2009년 8월 30일 21시 15분 제9판]

 교도통신사가 30일에 실시한 중의원 출구조사 분석에 따르면 공산당이 소선거구 후보를 제휴, 추천한 전략의 영향을 받아 공산당 지지자의 약 70%가 민주당 후보로 쏠리는 사태가 드러났다고 한다. 자민당과 민주당 양당이 접전을 벌인 소선거구에서는 승패를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 / 조사에 따르면 공산당이 공인후보를 내지 않은 148개 선거구에서는 공산당 지지자의 69.3%가 민주당 후보를 지지, 자민당 후보를 지지한 15.2%의 4배를 넘었다. 공산당이 후보를 낸 선거구에서도 공산당 지지자 가운데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지지자가 22.1%였다. / 공산당 후보가 없는 선거구 가운데 132개 선거구에서는 사실상 민주당과 자민당 양당이 승부하는 구도가 되었다. 공산당은 현행제도 도입 이후 2005년 선거까지 총 4회의 중의원 선거에서 300개 소선거구의 대부분에 후보를 냈다. 이번에는 비례대표를 중시하는 방침으로 전환하고, 반정도의 소선거구에서 후보를 냈다. 당 관계자에 따르면 각 선거구에 1만에서 2만 정도의 공산당 지지표가 있다고 한다.[각주:2]

[당선] 가나가와 11구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小泉進次郎) 당선

[낙선]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전 방위상 낙선, 도쿄 10구 / 오미 고지(尾身幸次) 전 재무상 낙선, 군마 1구 비례 추천 없음.

 북해도 11구에서 낙선한 자민당 전 재무금융상 나카가와 쇼이치(中川昭一)가 오후 8시 30분경에 발표한 지역 유권자에게 전하는 말에서 "여러분의 기대에 따라 충분히 대표로서 국정을 이끌어 가지 못했습니다. 26년간, 아버지때부터 합치면 46년간 여러분의 지지에 기댔습니다만, 이러한 결과는 오로지 제 책임. 오로지 제 책임으로, 면목이 없습니다."라고 언급.

 민주당 나오시마 마사유키(直嶋正行) 정조회장은 오후 8시 30분경 기자단에게 "국민 여러분의 정치를 바꾸고자 하는 의사가 표현된 것."이라고 언급.

 아베 신조 전 총리는 30일 밤, 패배에 "전 (자민당) 총재로서 책임을 통감하고 있다."고 언급. 또 "이번 선거는 정권교체라는 특별한 폭풍이다. 폭풍은 길지 않다."고 언급


[2009년 8월 30일 21시 30분 제10판]

 공명당이 대폭 의석이 줄어들 전망이다. 자민당과 함께 야당으로 전락할 위기를 피하기 위해서는 자민-공명 노선을 해소하여야 한다. 오타 아키히로(太田昭宏) 대표와 기타가와 가즈오(北側一雄) 간사장이 의석을 얻기 힘들지만, 그 당락이 어떻든 내년 여름의 참의원 선거를 염두에 두고 독자색을 강화할 방침. / 중의원 선거 이후 열리는 특별국회의 수상지명선거에서는 자민당 총재가 아니라 공명당 대표에게 투표할 계획으로, 민주당과는 "정책 실현을 위해 시시비비를 가리며 대응해 간다."(간부)는 자세. / 중의원 선거에서 오타 대표와 기타가와 간사장 등 소선거구에 입후보한 8명 전원이 비례대표에 중복 입후보하지 않았다. 승기가 있다는 판단이었지만, 당간부 가운데에서는 "그 전략이 실수, 대부분 낙선하면 소선거구 철퇴론이 퍼질지 모른다."고 지적했다. 공명당은 장기적인 오타-기타가와 체제를 상정하고 있었으므로, 의석을 잃으면 그 타격은 크다. / 중의원 선거에서 전회 수준인 31석 유지를 목표로 하고, 도쿄 도의회 선거에서 입후보자를 모두 당선시킨 기세로 지지세력인 창가학회를 중심으로 선거운동을 전개했으나 여당이라는 역풍을 강하게 맞는 형국이 되었다. (이상 교도통신[각주:3]

 교도통신사가 30일 실시한 중의원 선거 출구조사에 따르면 자민당 지지층 가운데 비례대표에서 자민당에 투표한 사람은 53.7%에 지나지 않았고, 민주당에 투표한 사람은 29.4%에 달했다고 한다. 공명당 투표자는 6.1%로, 민주당의 흡인력이 강해 일부 자민당 후보가 지원하면서 "비례대표는 공명당"이라고 하는 호소는 한정적인 효과였던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 소선거구 또한 자민당 지지층 가운데 자민당 투표자는 59.8%였던 것에 비해 30.9%가 민주당에 투표. 공명당 지지층도 공명당 후보가 있는 8개 선거구 이외의 300개 소선거구 평균으로 67.7%가 자민당에게, 16.6%가 민주당에게 투표했다고. 2005년 선거에서는 72.3% 대 11.5%였던 것에 비하면 민주당으로의 유출이 크다.[각주:4]


[2009년 8월 30일 21시 55분 제11판]

 자민당이 역대 최저인 223석 이하의 결과 예측에 망연자실한 상태다. 1993년 이래 다시 야당으로 전락하는 것이 확실해 아소 다로 총재의 사임은 예견된 수순. 차기 총재로는 마스조에 요이치(舛添要一) 전 후생노동상 등이 물망에 오르고 있으나, 누가 총재가 되든 당 재건은 힘든 전망. / 호소다 히로유키(細田博之) 간사장은 30일 밤 당본부에서 기자단에게 "결과를 알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언급했지만, 혹자는 "큰일날듯, 자민당이 90석 정도가 되는 것은 아닐까."라고 언급했다고. / 31일 낮에는 자민당 임원이 모이고, 이후 아소 총재가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 다만 30일에 총재 사임을 표명하는 것도 예측된다. 아소 총재 사임시 일단 후계가 최초의 과제. 민주당은 정권 교체시 9월 13일에 수상지명 특별국회를 소집할 예정이지만, 자민당 총재선거는 통상적으로 투표까지 13일간이 소요되므로 소집시까지 선출하는 것은 어렵다는 전망이다. 일정 단축은 가능하지만 국회의원 감소로 인해 상대적으로 발언력이 높아질 것으로 보이는 지방조직으로부터 패인 분석이나 납득할만한 정리, 당원 투표 실시 등을 요구할 수 있고 빠른 차기 총재 선출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 이 경우 수상지명투표에서 아소 총리에게는 투표할 수 없으나, 기권할 경우 당이 공중분해될 위험도 있다는 지적도 있다. 신체제가 확립될 경우 내년 여름의 참의원 선거를 염두에 두고 민주당 하토야마 대표의 정치자금 허위기재 문제나 공약 실현 등을 가지고 반격에 나설 수도 있다. 자민당 간부는 30일 밤, "민주당의 공약에는 무리수가 있다. 참의원 선거까지 뉴 자민당으로 태어날 수 있을지가 과제."라고 강조했다.[각주:5]

 민주당 하토야마 대표는 30일 밤, 정권획득이 확실해지자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간 나오토(菅直人) 양 대표대행 및 간부와의 회담을 하여 인사를 포함한 신정권으로의 이행준비에 착수했다. 관방장관에는 간 나오토와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간사장 두 명을 축으로 조정을 진행하고 있다. 조기에 정권이행팀을 발족하고, 재무상 및 외무상 등 중요 각료나 당 간사장을 굳힐 방침. 31일에도 사민당 및 국민신당과의 연립정권 수립을 향한 협의에 들어갈 전망이다. / 신정권 정책 입안의 중심이 되는 '국가전략국'의 담당 대신도 조기에 내정할 방침. 이행팀은 아소 정권에 대하여 조기에 정권인수를 협의하고자. / 하토야마씨는 9월 14일 전후로 열릴 특별국회에서 새 총리로 지명된 뒤, 18일까지는 조각을 마칠 방침. 첫 각의에서 국가전략국 발족, 아소정권이 경기대책의 중심으로 삼은 2009년 보정예산의 조정 작업에 들어간다. / 하토야마씨는 조각 후에 미국을 방문, 오바마 미 대통령이나 중국 및 한국 수뇌회담을 갖고, 국제연합총회에서 연설. 대미, 대아시아 외교의 기본자세를 설명하고, 각국과의 신뢰관계지속을 확인한다. / 10월에도 열리는 임시국회에서는 아니메의 전당 등 낭비라는 비판을 받아온 사업의 집행을 정지하는 2차 보정예산안을 제출할 방침이다.[각주:6]

[현재 개표결과]
소선거구 자민 22 민주 206 사민 2 국민신 3 신당일본 1 야당계 무소속 1 우리들 2 무소속 3
비  례 자민 40 민주 69 공명 13 공산 7 사민 1 다이치 1 우리들 2
합  계 자민 62 / 공명 13 / 민주 275 / 사민 3 / 국민신 3 / 다이치 1 / 신당일본 1 / 야당계 무소속 1 / 공산 7 / 우리들 4 / 무소속 3


[2009년 8월 30일 22시 20분 제12판]

[낙선]
아소 내각에서 그림자 총리로 불리던 요사노 가오루(与謝野馨) 전 재무상이 가이에다 반리(海江田万里) 민주당 전 의원에게 패배, 도쿄 1구

 교도통신사에 따르면 30일 오후 9시 현재 추계 투표율은 69.52%로, 1996년에 소선거구 비례대표 병립제도를 도입한 이래 5회의 선거 가운데 가장 높다. 전일투표자가 역대 최다인 1398만 4968명으로, 투표율을 높이는데 큰 역할을 했다. 후쿠시마현이 최고로 78.79%이며, 추정투표율은 각 도도부현 선관위 발표 숫자에 기초하여 교도통신이 독자적으로 추계한 것.[각주:7]


[2009년 8월 30일 23시 30분 제13판]

[낙선]
전 법무상 나가세 진엔(長勢甚遠), 도야마 1구 / 에토 세이시로(衛藤征士郎) 전 방위청장관, 오이타 2구 / 가와사키 지로(川崎二郎) 전 후생노동상, 미에 1구 /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전 방위상, 나가사키 2구


[2009년 8월 30일 23시 50분 제14판]

[낙선] 전 문부과학상 시오노야 류(塩谷立), 시즈오카 8구


[2009년 8월 30일 23시 59분 제15판]

[낙선] 오타 아키히로(太田昭宏) 공명당 대표, 도쿄 12구

[2009년 8월 31일 05시 00분 제16판]

최종 결과 자민 119 민주 308

결과표, 원본저작권 아사히신문사.

비례대표 개표 결과

비례대표 개표 결과 (자체제작)

소선거구개표결과

소선거구개표결과 (저작권 상동)




일본총선중앙상황실
2009년 8월 30일 19시 57분 제01판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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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8월 30일 23시 59분 제15판 작성
2009년 8월 31일 05시 00분 제16판 작성
  1. <A href="http://www.47news.jp/CN/200908/CN2009083001000015.html" target=_blank>중의원 투표율, 전회를 웃돌 모양 / 심야에는 대세 판명</A>, 교도통신 2009년 8월 30일자. [본문으로]
  2. <A href="http://www.47news.jp/CN/200908/CN2009083001000590.html" target=_blank>민주후보에 공산표의 70%, 자민의 4배 넘어</A>, 교도통신 2009년 8월 30일자. [본문으로]
  3. <A href="http://www.47news.jp/CN/200908/CN2009083001000601.html" target=_blank>공명, 자민협조노선을 해소 / 참의원 선거에 독자색</A>, 교도통신 2009년 8월 30일자. [본문으로]
  4. <A href="http://www.47news.jp/CN/200908/CN2009083001000585.html" target=_blank>자민지지층의 29%가 민주로, 공명에서도 16% 유출</A>, 교도통신 2009년 8월 30일자. [본문으로]
  5. <A href="http://www.47news.jp/CN/200908/CN2009083001000596.html" target=_blank>자민 방심, 재건 어려워 / 총재후보에 마스조에씨</A>, 교도통신 8월 30일자. [본문으로]
  6. <A href="http://www.47news.jp/CN/200908/CN2009083001000634.html" target=_blank>민주, 신정권 인사에 착수 / 관방장관은 간, 오카다씨 축</A>, 교도통신 2009년 8월 30일자. [본문으로]
  7. <A href="http://www.47news.jp/CN/200908/CN2009083001000717.html" target=_blank>추정투표율은 69.52%, 소선거구제 도입 후로는 최고</A>, 교도통신 2009년 8월 30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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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기본 정보

  • 중의원 해산 : 2009년(헤이세이 21년) 7월 21일 화요일
  • 선거 공시 : 2009년 8월 18일 화요일
  • 선거일 : 2009년 8월 30일 일요일

같은 날 동시에 시행되는 선거 (열기)



선거일 이전 상황

 2005년 9월 11일에 실시된 제44회 중의원 선거에서는 우정민영화를 추진하는 고이즈미 총리의 신임투표같은 모습이 되면서, 자유민주당이 총 의석 480석 가운데 과반을 넘는 296석을 얻어 압승한 바 있다. 이후 고이즈미, 아베 신조(安倍晋三),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아소 다로(麻生太郎)까지 총리가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선거는 2007년 참의원 선거 뿐이었다. 게다가 2007년 7월의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자민당이 총 242석 가운데 83석을 얻은 반면에 제1야당인 민주당이 109석을 얻어 여소야대의 참의원이 성립되었다.

 2008년 6월 11일, 참의원에서는 다수 의석을 점한 야당이 당시 후쿠다 총리에 대하여 문책 결의안을 가결(현행 일본국헌법 최초의 문책 결의)하면서 사임을 요구했다. 다음 날에는 여당이 다수를 점한 중의원에서 내각신임결의를 가결했지만, 후쿠다 총리가 9월 1일에 사임하면서 9월 22일에 열린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당선된 아소가 총리가 되었다.

 당시 총재선거 전후로 자민당 내에서는 2008년 10월 또는 11월의 중의원 선거가 점쳐지고 있었으나, 총재선거 이후에는 다시 금융위기 등을 이유로 선거 보류론이 부상하면서[각주:1] 선거는 늦춰지게 되었다.

 그 사이 2009년 5월 11일에 민주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대표가 사임하고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가 새 대표로 취임하는 등 야당에서 터진 정치헌금 문제가 있었음에도, 7월 12일에 열린 도쿄도의원 선거에서 총 127석중 자민당이 38석, 민주당이 54석을 얻는 결과가 나타났다.

 2009년 7월 13일 저녁, 수상관저에서 열린 자민·공명 양당 간부 회담에서 아소 총리는 21일에 해산, 8월 18일에 공시, 30일에 투표를 시행하는 일정을 결단하게 되었다.[각주:2] 아소 총리도 7월 17일에 각 당에 중의원 해산 일정을 전달했다.[각주:3]

 제44회 선거에서 당선된 중의원 의원의 임기는 2009년 9월 10일까지로, 어차피 10월 20일까지는 제45회 선거가 시행될 예정이었다. 8월 30일은 헌법에서 해산 이후 40일 내에 선거를 시행하도록 규정하고 있어 최장한도의 기간이며, 임기 만료시에 시행하기로 상정한 날보다 투표일이 늦다.

 1967년부터 2009년까지 14선 의원을 지내고 일본 헌정사상 최장기간인 2,029일간(2003년 ~ 2009년) 중의원 의장을 맡았던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와 1972년부터 2009년까지 12선 의원을 지내고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가 각각 9월 16일과 25일에 정계 은퇴를 선언한 바 있다.


여론조사

합계
소선거구
비례구
자민당  89~103~115
41~ 50 ~58
48~ 5 3 ~57
300
민주당 307~321~330
224~232~240
83~ 8 9 ~94
115
공명당  18~ 24~ 30
 0 ~ 2 ~  5
18~ 2 2 ~25
31
공산당   7~  9~ 12
0
 7~  ~12
9
사민당   3~  9~ 13
 2 ~ 5 ~  7
 1~  ~ 6
7
국민신   2~  3~  6
 2 ~ 3 ~  4
     0  ~ 2
4
우리들   2~  4~  8
 1 ~ 2 ~  3
 1~ 2 ~ 5
4
개 혁       0   
  0
0
1
다이치       1~  2
-
    1 ~ 2
1
일 본   0~  1~  2
 0 ~ 1 ~  2
0
0
무소속   3~  5~  8
 3 ~ 5 ~  8
-
6
총 계 480
300
180
478
의석 추계
「전」이란 선거전으로, 해산 후의 탈당이나
입당에 의한 변동 후의 숫자. 은퇴를 포함. 궐원 2석.


 아사히신문사가 9월 22일부터 25일까지 전 선거구(소선거구 300개)의 유권자 총 130,879명(총 조사 190,338건)을 대상으로 전화조사를 실시, 전국 취재망의 정보를 종합한 결과 민주당이 대단히 우세해 총 480석 가운데 3분의 2인 320여 석을 차지할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에 비해 자민당은 100석 전후, 공명당은 소선거구에서 고전하여 20여 석으로, 공산당은 비례구에서 2005년과 비슷한 정도로, 사민당은 소선거구에서 선전하는 등의 결과를 발표했으며, 조사 시점을 기준으로 투표 태도를 밝히지 않은 사람이 소선거구에서 40% 미만, 비례구에서 30% 미만에 걸쳐 종반에 이르러서는 정세가 바뀔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다. 이하는 아사히신문사의 보도 요약이다.[각주:4]

 민주당의 경우 초반의 기세를 유지하면서 소선거구에서는 전회의 52석뿐만 아니라, 220석 가량 또는 240석에까지 육박할 가능성이 있다. 자민당 후보와 경합하는 263개 선거구 가운데 188개에서 우위가 확실하며, 28개 선거구에서는 약간 우세, 격전지인 33개 선거구에서는 우세를 목표로 삼고 있다. 홋카이도, 이와테, 니가타, 야마나시, 나가노, 아이치, 시가, 나가사키의 8개 도현에서는 전 의석을 차지할 가능성이 있으며, 2005년 선거에서 1석만 차지했던 도쿄에서도 20여 석 차지가 점쳐지고 있다. 사이타마에서 15개 선거구 가운데 14개 선거구에서, 지바에서 13개 선거구 가운데 12개 선거구에서 우위를 점하는 등 도시지역에서 우위가 특히 두드러 진다. 비례구에서도 승리는 확실해져 각 지역에서 전회보다 의석이 증가해 총 90여 석(2005년 61석)이 점쳐지고 있다.

자민 대 민주, 소선거구 판세 분석

아사히신문사가 원판 저작권 소유. http://www2.asahi.com/senkyo2009/news/infograph081801.html

 한편 자민당의 경우 열세가 두드려져 우세지역이 18개 선거구에 불과하다. 약간 우위를 점하는 선거구도 6개로, 유례없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있다. 민주당 후보가 없는 선거구에서는 비교적 강세를 보이지만, 그 가운데 26개 선거구 중 5개 선거구에서는 민주당 추천이나 지원을 받는 국민신당이나 사회민주당 후보에게 열세를 보이며, 2개 선거구에서는 사회민주당이 다소 우세를 보이며, 1개 선거구에서는 무소속에까지 고전을 겪고 있다. 비례구에서도 2005년의 77석에서 대폭 추락해 역대 최저인 2000년의 56석에 미칠지가 포인트다.

 소선거구에 전직 의원 8명을 공천한 공명당은 3개 선거구에서 격전중이지만, 나머지는 뒤쳐지고 있다. 비례구를 합해도 2005년의 31석은 어려울 전망이다. 공산당은 비례구에서 2005년과 비슷한 9석 정도를 획득할 전망이다.

 사회민주당은 민주당과의 협력의 효과로 소선거구에서 5석 전후의 가능성을 보여, 비례구 4석 정도를 합치면 2005년의 7석을 넘어설 전망이다. 국민신당은 소선거구에서 3석이 유력하며, 비례구에서는 다소 고전하고 있어 선거 전의 4석을 확보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모두의 당(みんなの党)은 소선거구와 비례구를 합쳐 선거전의 4석을 유지할 전망이며, 신당 일본은 소선거구에서, 신당 다이치(大地)는 비례구에서 각각 1석을 얻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총선중앙상황실

2009년 8월 27일 10시 45분 제1판 작성
  1. <A href="http://www.47news.jp/kyodonews/2008election/2008/09/" target=_blank>교도통신 선거 특집 뉴스 9월</A>.<A[ A 우선(与党内で衆院選先送り論浮上 金融不安への対応優先)< 대응 금융불안에의 부상, 보류론 중의원선거 footnote]여당내에서> [본문으로]
  2. <A href="http://www.tokyo-np.co.jp/gogai/pdf/gogai_090713.pdf" target=_blank>중의원 선거 8월 30일</A><A[ A 30일(衆院選8月30日)< 8월 선거, footnote]중의원>, 도쿄신문 2009년 7월 13일자 호외. [본문으로]
  3. <A href="http://www.47news.jp/CN/200907/CN2009071701000569.html" target=_blank>중의원, 21일에 해산 확정 / 자민 간담회 분규도</A><A[ A 自民懇談会紛糾も)< 분규도(衆院、21日の解散確定&amp;nbsp; 간담회 자민 해산확정 21일의 footnote]중의원,>, 교도통신 2009년 7월 17일자. [본문으로]
  4. <A href="http://www2.asahi.com/senkyo2009/news/TKY200908260489.html" target=_blank>민주 320 넘어, 자민 100 전후 / 아사히신문 중반정세조사</A></A></A>, 아사히신문 2009년 9월 27일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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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파벌의 개념


 정당의 파벌이란 그 정당에서 통일된 것 이외의 정책이나 주장에 공통점이 있는 사람이 모여 의견을 집약하고 통일된 정책의 형성을 도모하며, 정책의 실현을 향한 활동으로 그 정당의 집행부를 담당하거나 목표로 삼는 정당 운영의 기본단위가 되는 조직 또는 단체이다. 자유민주당 내에서는 정책집단(政策集団)이라고도 한다.

 현재 일본공산당 내에서는 민주집중제의 원칙에 따라 파벌(분파)활동이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공산당에서도 구 쇼칸파(所感派:일본공산당의 과거 파벌의 하나로 친중파였다.) 관계자는 모두 탈당하여 「일본공산당 (행동파)」이라는 별도의 단체를 구성하고 있다.

 자유민주당의 경우 자유당과 민주당이 결성하여 자유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하였을 당시(이른바 보수합동)에도 다양한 이데올로기와 정책노선 등이 합쳐지면서 그 특색을 유지하는 파벌이란 조직이 당 내에 존재하게 되었고, 이러한 측면은 자민당의 장기 존속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러한 자민당을 일부 연구자들은 “하나의 정당”이 아니라 “파벌이라는 각기 다른 정당들의 장기정당연합”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위와같은 연유에서 기인한다.



Ⅱ. 자유민주당 파벌의 역사


1. 보수합동과 파벌의 연원

 자민당의 역사는 파벌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는데, 1955년 초, 우파와 좌파로 분열되어 있던 일본사회당이 단결하면서 제1당으로 부상하자 당시 보수정당은 매우 큰 위협을 받게 되었고, 결국 보수합동을 통하여 자유민주당이 결성되어 유일 보수 정당의 단독정권을 기반으로 하는 55년 체제가 출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민당 내에서도 대표가 확정되지는 않았고,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오가타 다케토라(緒方竹虎), 미키 부키치(三木武吉), 오노 반보쿠(大野伴睦)의 4인이 총재대행위원으로 출범하는 처지였다. 이러한 다양한 구성원의 경력, 신조, 정책 등이 가까운 사람끼리 당내의 유력자 하에 뭉치면서 이른바 파벌이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5달 뒤인 1956년 4월에 하토야마가 총재로 취임하고 난 뒤 반년 뒤인 11월에 은퇴를 발표하면서 12월에 총재선거가 진행되었다. 이 때 기시 노부스케(岸信介), 이시이 미쓰지로(石井光次郎),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 이상 3인이 출마하면서 이를 계기로 합당 전부터 내재하고 있던 계파가 공작을 둘러싸고 갖가지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8개의 파벌, 이른바 「8개 사단」(8個師団, 이시바시파는 규모가 작아 「7개 사단 1개 여단」이라고 불리기도 했다.)이 형성되었다.

 이후 총리를 둘러싼 이합집산(離合集散)이 반복되면서 일부 작은 파벌이 도태되었고, 1970년대 후반에는 중선거구제에 대응한 5대 파벌, 즉 다무라파(田村派), 후쿠다파(福田派), 오히라파(大平派), 미키파(三木派), 나카소네파(中曾根派)의 형태로 수렴되었다. 5대 파벌 시대에는 당요직이나 관료를 경험한 당내 실력자가 파벌의 영수(領袖)에 취임하고, 그 영수들이 총재직을 놓고 경쟁하는 시스템이 형성되어 있었다.


2. 1980년 선거와 파벌의 약화

 1979년에 당시 총재이자 총리였던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는 정권기반이 약했을 뿐만 아니라, 몇 대 전의 총리였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栄)의 영향이 강해 정권이 「가쿠(角) 그림자 내각」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게다가 오히라를 지탱하던 다나카파 등의 자민당 주류와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를 지지하던 미키파 등의 반주류와의 알력은 총리 취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79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겨우 과반수를 차지한 자민당 내에서는 결과에 책임을 묻는 반주류파가 오히라 퇴진을 요구하면서 이른바 「40일 항쟁」이 시작되었고, 선거 이후 총리지명선거에서도 반주류파가 후쿠다에게 투표하면서 결선투표까지 가면서 오히라가 138표를, 후쿠다가 121표를 얻어 제2차 오히라 내각이 발족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자민당 내에서도 사실상의 분열이 계속되었다. 1980년에는 사회당이 내각불신임결의안을 제출하였고, 반주류파가 결석하면서 상징적 의미가 강했던 결의안이 오히려 가결되는 상황까지 벌어지게 되었다. 오히라는 불신임결의안의 가결에 따라 중의원을 해산(이른바 해프닝 해산)했고, 중의원 총선거를 참의원 선거와 같은 날에 해 정국을 극복하고자 했다.

 해산 당시 지지율 21%(지지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41%)로 자민당의 내분에 염증을 느낀 여론은 야당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게다가 경단련(일본경제단체연합회의 약칭, 이른바 게이단렌)의 도코 도시오(土光敏夫) 회장도 기자회견에서 “가장 나쁜 케이스가 되었다. … 불만을 금할 수 없다. 이 때 자민당이 더욱 결속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고 발언했다. 자민당은 이러한 상황에서 선거를 두고 재계에 50억 엔의 정치자금을 요청했고, 재계는 자민당의 분열 회피를 조건으로 응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반주류파의 신당론이 소멸하고, 동시에 주류파도 불신임안 가결시 결석자의 책임을 묻지 않기로 했다.

 총선거가 공시된 5월 30일, 오히라는 신주쿠에서의 첫 가두연설 직후 건강이 악화되었고, 다음날 과로와 부정맥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당시 70세로 고령이었던 오히라는 격무와 심장 증세 등으로 한계점에 도달해 있었고, 이를 두고 반주류파였던 나카가와 이치로(中川一郎)는 이후의 베네치아 정상회담 출석이 어려울 수 있으므로 진퇴를 결정하라고 압박하는 등 반주류파 일각에서 오히라 퇴진의 목소리를 다시 올렸다. 뿐만 아니라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등 오히라파 내에서도 오히라 퇴진에 대하여 언급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분위기에서 6월 12일 오전 5시 54분에 오히라가 급서(急逝)하고 만다.

 오히라의 급서로 이토 마사요시(伊東正義) 관방장관이 내각법에 따라 내각총리대신임시대리를, 니시무라 에이이치(西村英一) 부총재가 총재임시대행을 맡았지만, 선거는 주류파를 대표하는 형태로 총무회장이었던 스즈키 젠코가 맡게 되었다. 이런 가운데 48년만의 현직 총리의 급서라는 예상 외의 사태는 상황을 급변시키기 시작했다. 자민당은 총리의 분사(憤死)를 두고 동정표를 구했고, 결과는 중의원 및 참의원에서 안정 다수로 나타났다.

 불신임의 가결로 시작된 소동이니만큼 반주류파를 총리로 내세울 수는 없었다. 한때 이토나 니시무라를 총리로 하는 구상도 있었지만, 재계 교섭을 담당하였고 또한 오히라파였던 스즈키가 오히라 정권을 계승하는 형태로 총재 및 총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이후 주가 상승이 확실했던 당시 리쿠르트코스모스사의 미공개주식을 정치인 및 관료 등이 수뢰(受賂)한 리쿠르트 사건(リクルート事件)이 다케시타 노보루 내각에서 발각되었고, 총재를 시작으로 각 파벌의 영수를 포함한 당내 유력자들이 일제히 사건에 연루된 사실로 인해 1989년에 다시 파벌의 영수가 아니었던 우노 소스케(宇野宗佑)가 총재로 취임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총재의 자리는 파벌 영수의 대결에서 선거의 얼굴로 그 가치가 옮겨가기 시작했다.

 중의원 선거가 중선거구제에서 소선거구제로 바뀌면서 후보자 선정에서 당본부가 갖는 힘이 커진 것도 파벌의 영향력을 격감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즉 총재를 다투는 집단에서 내각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조직으로 존재 목적이 이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5년 중의원 선거로 고이즈미가 발탁한 신진의원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고이즈미는 신진의원들이 파벌에 속하는 것을 막고자 신인의원연수회를 설치하고 당이 신진의원을 교육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신진의원으로 구성된 83인회가 결성되었지만, 1년 후에 83인회의 반수 이상이 파벌에 입회하는 결과가 나타날 정도로 파벌 해체는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문제이다.



Ⅲ. 자유민주당 파벌의 조직


 자민당 각 파벌의 조직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다음과 같다.

1. 명예회장(名誉会長)
 : 파벌의 회장을 지냈던 인물 등으로, 말 그대로 명예직이다. 단 베테랑 정치가 또는 회장의 상담역으로 파벌 내외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경우도 있다.

2. 회장(会長)
 : 파벌의 우두머리로, 영수(領袖)라고 불리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파벌의 창설자인 회장은 상당한 지배권을 갖지만, 전 회장으로부터 지위를 이어받은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힘이 약한 경우도 있다. 구성원들은 회장에게 선거자금이나 포스트의 알선 등을 기대하지만, 회장이 구성원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에는 지위를 위협받기도 한다.

3. 대표(代表)
 : 회장과 마찬가지로 파벌의 우두머리이다. 다만 회장 인사에 대한 이견을 무시할 수 없는 경우에 잠정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회장 대신에 두는 지위이다.

4. 회장대행(会長代行)
 : 파벌의 차석으로, 운영의 중핵을 맡는 자리이다. 상설직인 회장대행을 차기회장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5. 부회장(副会長)
 : 명예직의 의미가 강하지만, 파벌 내의 베테랑 정치가를 위한 자리이다.

6. 좌장(座長)
 : 회합을 관리하는 지위로, 평소에는 명예직의 지위지만 파벌의 우두머리가 빠진 경우에 파벌 전체를 모으는 역할로 부상하기도 한다.

7. 사무총장(事務総長)
 : 파벌의 자금 관리나 섭외(涉外) 등의 실무를 담당하는 자리로, 유력한 중견의원이 맡아 차기회장 또는 회장대행의 자리로 나아가는 코스가 되기도 한다.

8. 부간사장(副幹事長)
 : 당의 임원이지만, 통례적으로 각 파벌의 추천에 의해 임명되는 자리로, 파벌과 당 집행부의 연결을 담당한다.



Ⅳ. 파벌의 통칭


 방송이나 신문 등의 매스컴에서 자민당의 각 파벌은 대개 해당 파벌의 회장인 이름의 성에서 딴 「아무개파」 또는 「아무개그룹」이라고 불린다. 정식 명칭이 아니므로 언론사에 따라서 호칭이 달라질 때도 있다.

 파벌회장이 은퇴 또는 작고하면서 차기 회장직이 부재한 경우에는 전 회장의 이름을 따서 「구 아무개파」라고 한다. 와타나베 미치오(渡辺美智雄) 사후의 「구 와타나베 파」나 고모토 도시오(河本敏夫) 은퇴 후의 「구 고모토파」,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郎)가 파벌에서 이탈한 뒤의 「구 하시모토파」 등이 이에 해당한다. 또한 야마사키 타쿠(山崎拓)는 2003년 총선거에서 낙선하면서 의원직이 없음에도 「야마사키파」의 회장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체로 「야마사키파」로 불렸다.

 또한 회장을 맡은 사람이 내각총리대신 등에 취임하면서 다망(多忙)한 직무때문에 회장직을 퇴임하고 파벌의 최고간부에게 맡기는 경우가 더러 있다[각주:1]. 이 경우에 파벌의 명칭은 바뀌지 않는다. 이를테면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의 총리 취임 당시 사쿠라우치 요시오(櫻内義雄)가 「정책과학연구소」(政策科学研究所: 나카소네파) 회장을 맡은 경우나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의 총리 취임에 따른 가네마루 신(金丸信)의 「게이세이카이」(経世会, 경세회: 다케시타 파) 회장 취임, 오부치 게이조(小渕恵三)의 총리 취임에 따른 와타누키 다미스케(綿貫民輔)의 「헤이세이정치연구회」(平成政治研究会: 오부치파) 회장 취임,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 취임에 따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의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 모리파) 회장 취임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일시적인 파벌이탈로 간주되어 그러한 직위에서 물러나면 다시 파벌의 회장으로 복귀할 가능성이 높은 것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예외적으로 다나카 가쿠에이는 1976년 록히드 사건으로 체포되면서 자민당을 탈당했으며 또한 「다나카파」로 불리던 「목요클럽」(木曜クラブ)에서도 탈퇴했다. 다나카 자신은 「다나카파」의 회장에 있었던 적도 없고, 체포 이후에도 니시무라 에이이치(西村英一)나 니카이도 스스무(二階堂進)가 회장을 맡았지만, 언론에서는 모두 「다나카파」로 불렀다. 이는 실제로 파벌의원에 대한 정치자금과 파벌 운영의 전권을 다나카가 모두 가지고 있었으므로, 소속이 아니지만 실질적인 지도자였던 것은 명확했기 때문이다.



Ⅴ. 파벌의 변천


×표는 단절을 표시, ※는 이탈 또는 분파를 표시.


1. 구 자유당계(自由党系, 이른바 보수본류)

 (1) 요시다 자유당(吉田自由党, 이른바 「요시다 학교」[각주:2])

  1) 『고치카이』(宏池会, 굉지회)
   가) 이케다 하야토의 「이케다파」
   나) 마에오 시게사부로(前尾繁三郎)의 「마에오파」
   다)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의 「오히라파」
   라) 스즈키 젠코(鈴木善幸)의 「스즈키파」
   마) 미야자와 기이치(宮澤喜一)의 「마야자와파」
    ※ 『오유카이』(大勇会, 대용회)·고노 요헤이(河野洋平) 계열 → 『이코카이』(為公会, 위공회: 아소파)
   바) 가토 고이치(加藤紘一)의 「가토파」
    ※ 『고치카이』·호리우치 미쓰오(堀内光雄)의 「호리우치파」 → 니와 유야(丹羽雄哉)·고가 마코토(古賀誠)의 「고가파」 → 「고가파」
   사) 오자토 사다토시(小里貞利)의 「오자토파」
   아) 다니가키 사다카즈(谷垣禎一)의 「다니가키파」
   자) 「고가파」

  2) 『목요연구회』(木曜研究会) ― 『슈잔카이』(周山会, 주산회)
   가) 사토 에이사쿠의 「사토파」
   나) 『나노카카이』(七日会, 칠일회) : 『슈잔클럽』(周山クラブ)·호리 시게루(保利茂) 계열 → 「후쿠다파」에 합류 / 『목요클럽』(木曜クラブ)·「다나카파」
   다) 『게이세이카이』(経世会, 경세회)·「다케시타파」
    목요클럽 니카이도 계열 → ×
   라) 『헤이세이연구회』(平成研究会)·「오부치파」
    『개혁포럼21』(改革フォーラム21)·하다 쓰토무(羽田孜)의 「하다파」 → 『신생당』(新生党) → ×

  3) 『수요회』(水曜会)
   가) 오가타 다케토라(緒方竹虎)의 「오가타파」
   나) 이시이 미쓰지로(石井光次郎)의 「이시이파」, 이후 소멸.

 (2)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1945~1946)
   『하쿠세이카이』(白政会) : 오노 반보쿠(大野伴睦)의 「오노파」 → 「무라카미파」와 「후나다파」로 분열
   가) 무라카미 이사무(村上勇)의 「무라카미파」 → 미즈타 미키오(水田三喜男)의 「미즈타파」, 이후 소멸
   나) 후나다 나카(船田中)의 「후나다파」, 이후 소멸


2. 구 민주당계(民主党系, 이른바 보수방류)

 (1)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1954년 ~ (1955년) ~ 1959년

  1) 『주니치카이』(十日会)
   가)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의 「기시파」
   나-1) 『당풍쇄신연맹』(党風刷新連盟)
    ※ 『아이죠카이』(愛正会)·후지야마 아이이치로(藤山愛一郎)의 「후지야마파」, 이후 소멸
    ※ 난조 도쿠오(南条徳男) 및 히라이 다로(平井太郎) 계열, 이후 「후쿠다파」에 합류하여 소멸
   나-2) 『교우 클럽』(交友クラブ)·가와시마 조지로(川島正次郎)의 「가와시마파」 →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悦三郎)의 「시나파」, 이후 소멸
   다) 『하치니치카이』(八日会)
   라) 『세이와카이』(清和会)·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의 「후쿠다파」
   마) 아베 신타로(安倍晋太郎)의 「아베파」
   바) 미쓰즈카 히로시(三塚博)의 「미쓰즈카파」
    ※ 『세이신카이』(政眞会)·가토 무쓰키(加藤六月) 계열, 이후 신생당에 합류 후 소멸
   사) 『세이와정책연구회』(清和政策研究会)·모리 요시로의 「모리파」
    ※ 가메이 시즈카(亀井静香)의 「가메이파」 → 「구 와타나베파」에 합병 후 소멸
   아) 마치무라 노부타카(町村信孝)의 「마치무라파」

  2) 『슌주카이』(春秋会)
   가) 고노 이치로(河野一郎)의 「고노파」
   나) 『신정동지회』(新政同志会)
   나-1) 『슌주카이』·모리 기요시(森清)의 「모리파」 → 소노다 스나오(園田直)의 「소노다파」 → 「후쿠다파」에 합류 후 소멸
   나-2) 『정책과학연구소』·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曽根康弘)의 「나카소네파」
   다) 와타나베 미치오(渡辺美智雄)의 「와타나베파」
   라) 『시스이카이』(志帥会)·무라카미 마사쿠니(村上正邦)의 「무라카미파」
    ※ 『근미래정치연구회』(近未来政治研究会)·야마사키 다쿠(山崎拓)의 「야마사키파」, 이후 소멸
   마) 에토 다카미(江藤隆美)의 「에토파」
   바) 가메이 시즈카(亀井静香)의 「가메이파」
   사) 이부키 분메이(伊吹文明)의 「이부키파」

  3) 『화요회』(火曜会)
   가) 이시바시 단잔(石橋湛山)의 「이시바시파」
   나) 『니니치카이』·이시다 히로히데(石田博英)의 「이시다파」
    ※ 「미키파」에 합류 후 소멸

 (2) 『개진당』(改進党) : 『정책연구회』·『정책동지회』·『정책간담회』
  가) 마쓰무라 겐조(松村謙三)의 「마쓰무라파」 - 『반초정책연구소』(番町政策研究所)·미키 다케오(三木武夫)의 「미키파」
  ※ 하야카와 다카시(早川崇) 계열은 이후 소멸
  나) 『신정책연구회』(新政策研究会)·고모토 도시오(河本敏夫)의 「고모토파」
  다) 『반초정책연구소』·고무라 마사히코(高村正彦)의 「고무라파」


3. 기타

 (1) 구 『세이란카이』(青嵐会)·중간파 계열
  『자유혁신동우회』(自由革新同友会)·나카가와 이치로(中川一郎) 계열 → 이시바시 신타로(石原慎太郎) 계열 → 「후쿠다파」에 합류 후 소멸

 (2) 구 『보수신당』(保守新党)
  『새로운 물결』(新しい波, 아타라시이나미)·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계열

 그 외에 결당한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에는 아시다 히토시(芦田均) 계열·오아사 다다오(大麻唯男) 계열·기타무라 도쿠타로(北村徳太郎) 계열 등의 소수 그룹이나 단기로 소멸한 히로카와 고젠(広川弘禅)의 「히로카와파」가 존재했다.

 1970년대에는 「다나카파」와 「후쿠다파」에 의한 가쿠후쿠전쟁(角福戦争)이 벌어져 다나카파가 승리하였다. 그 정치수법이 금권정치적인 것이었으므로, 이를 타파하려는 목적으로 젊은 의원을 중심으로 『세이란카이』(青嵐会)가 결성되었다.

 위에 기술한 것 외에도 고노 요헤이(河野洋平)의 『정치공학연구회』(政治工学研究会), 고사카 도쿠사부로(小坂徳三郎)의 『신풍정치연구회』(新風政治研究会) 등 일부 파벌횡단형 정책집단은 대표자를 영수로 하는 신흥파벌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Ⅵ. 현 자민당의 파벌 일람


명칭 통칭 소속 의원수
『세이와정책연구회』
(清和政策研究会)
마치무라파
(町村派)
89인
(중62, 참27)
『헤이세이연구회』
(平成研究会)
쓰시마파
(津島派)
68인
(중45, 참23)
『고치카이』
(宏池会, 굉지회)
고가파
(古賀派)
62인
(중51, 참11)
『근미래정치연구회』
(近未来政治研究会)
야마사키파
(山崎派)
41인
(중38, 참3)
『시스이카이』
(志帥会)
이부키파
(伊吹派)
28인
(중22, 참6)
『이코카이』
(為公会, 위공회)
아소파
(麻生派)
20인
(중16, 참4)
『새로운 물결』
(新しい波, 아타라시이나미)
니카이그룹
(二階グループ)
16인
(중14, 참2)
『반초정책연구소』
(番町政策研究所)
다카무라파
(高村派)
15인
(중14, 참1)



참고자료


  • 「일본 자민당의 파벌에 대하여」, 2008년 12월 18일, 국회사무처.
  • 위 자료는 일본어판 위키페디아를 크게 참고한 것으로 보임.
  1. 예외적으로 「이코카이」<FONT color=#8e8e8e>(為公会, 위공회)</FONT>의 회장인 아소 다로<FONT color=#8e8e8e>(麻生太郎)</FONT>는 총리에 취임하면서 좌장이었던 주마 고키<FONT color=#8e8e8e>(中馬弘毅)</FONT>가 파벌을 관리하게 되었지만, 아소는 여전히 회장이다. [본문으로]
  2. 요시다 시게루의 독자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꾸려진 그룹으로, 요시다와 같은 관료 출신이 다수를 차지했다. 대표적인 인물로 이케다 하야토<FONT color=#8e8e8e>(池田勇人)</FONT>나 사토 에이사쿠<FONT color=#8e8e8e>(佐藤栄作)</FONT> 등이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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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우정공사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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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민영화는 고이즈미 내각이 목표로 삼은 주요 공약의 하나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도 ‘행정개혁의 중심(本丸)’이라고 이야기 할 정도였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1979년에 대장성 정무차관 취임 당시부터 우정 사업의 민영화를 주장했으며,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 재임시에 우정대신으로 있으면서나 제2차 하시모토 내각의 후생대신으로 있을 때에도 줄곧 우정 민영화를 주장했다.

민영화의 추진에는 미국에서 강한 요구를 한 것도 작용해, 2004년 10월 14일에 공포된 ‘일미규제개혁및경쟁정책이니셔티브에근거한일본국정부에의요망서’(日米規制改革および競争政策イニシアティブに基づく要望書), 이른바 연차개혁 요망서에서도 일본 우정 공사의 민영화가 명기되어 있다. 이후에는 일본과 미국 정부 사이에서도 여러차례 협의가 이루어졌고, 미국의 보험 업계 관계자와도 여러차례 협의가 이루어졌다. 2005년 3월에 발표된 미국 통상 대표부의 ‘통상교섭·정책 연차보고서’에서는 2004년 9월에 각의에서 결정한 ‘내각의 설계도’(고이즈미 내각의 기본 방침)에 ‘미국이 권고하고 있었던 수정 사항이 포함되어 있다’고 밝혀 우정 민영화 법안의 골격에 미국이 어느정도 관여한 사실이 드러나 있다.

우정사업 분할도

우정사업 분할도

그러나 민영화는 행정 서비스의 저하로 연결된다는 주장도 강해, 야당은 물론 여당인 자민당 내에서도 특정우편국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우정사업간담회’를 중심으로 강한 반발이 있었다. 결국 우정 민영화 관련 법안은 제162통상국회에서 중의원에서는 가결되었지만, 2005년 8월 8일에 참의원에서 부결되었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민영화의 찬반 여부를 국민에게 묻는다고 주장하며, 중의원을 해산하는 사태에 이르게 되었다(우정 해산). 자민당 내의 반대파 중 일부는 탈당하여 신당을 결성했고, 9월 11일의 총선거에서는 여야의 득표율이 비슷했지만, 의석수는 여당이 압승하면서 이후 열린 특별국회에서 10월 14일에 같은 내용의 법안이 가결·성립되었다.

우정민영화의 심의 이후에 다음 단계로 일본도로공단을 비롯한 4개 도로 관계 공단 민영화 심의가 시작되었지만, 우정 민영화 심의가 장기화되면서 2005년 10월 1일에 4개 도로 관계 공단의 민영화가 먼저 실현되었다.

일본우정, 이른바 JP HOLDINGS 로고

일본우정 로고

2007년 10월1일, 도쿄 가스미카세키의 일본우정의 본사에서는 일본우정그룹 발족식이 거행되었다. 지주회사인 일본우정의 니시카와 요시후미 사장을 비롯해 후쿠다 야스오 총리대신과 마스다 히로야 총무대신,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총리 등이 참석했다. 고이즈미 전 총리는 발족식에서 "모든 정당이 반대하던 우정 민영화의 실현에는 국민의 지지가 큰 몫을 했다"고 진술하였다.

JP 각사 로고

JP 각사 로고

일본우정주식회사를 지주로 하는 일본우정그룹, 통칭 JP 그룹은 우편국주식회사가 관리하는 점포 숫자만 24,600여 개에 달한다. 이는 일본 국내에서 가장 많은 점포망을 자랑하는 편의점 세븐일레븐의 1만 2천여 개의 두배에 달하는 숫자이며, 그 뒤를 잇는 로손의 8천여 개, 훼미리마트의 7천여 개와 비교할 때에도 엄청난 숫자에 달한다.

우편국주식회사의 점포, 즉 우편국은 우편 창구 업무와 저금 및 보험유치를 담당한다. 또한 일본우정공사 시절에 영업직이 담당하던 보험 영업 및 수금 등의 업무도 모두 우편국주식회사에서 담당한다. 다만 유초 은행의 직영점이 설치되는 우편국의 경우에는 저금 업무를 담당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창구 업무를 우편국에 위탁하는 주식회사 유초 은행의 경우 총 자산액 226조 엔으로, 일본 국내 최고인 미쓰비시 UFJ 파이낸셜 그룹의 187조 엔을 제치게 될 뿐만 아니라 세계 최대의 은행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저금 및 예금잔고는 188조 엔으로, 미쓰비시도쿄UFJ 은행의 100조 엔이나 미쓰이스이토모 은행의 66조엔, 미즈호 은행의 54조엔과 비교할 때에도 업계 최대를 자랑한다. 다만 발족 직후에는 은행 공동망에 접속되지 않아 공과금 납부 등의 업무는 불가능하며, 일본우정의 니시카와 사장은 기자회견 등에서 2008년 5월까지 접속한다는 방침을 발표한 바 있다.

보험 업무 면에서도 간포 생명의 총 자산은 112조 8천억 엔으로, 닛폰생명보험의 51조 8천억 엔, 다이이치 생명의 33조 6천억엔, 메이지 생명의 26조 8천억엔을 합쳐야 비슷한 수치가 되는 수준이다.

다만 우편 이외의 일반 택배 취급량의 경우 2006년도 기준으로 2억 7천만여 개로, 야마토 운수의 11억 7천만 개나 사가와큐빈의 10억 개와 비교할 때는 적은 수치지만, 3위 기업인 일본통운의 3억 개와는 비슷한 수치이다. 또한 소형 택배(이른바 책자소포 또는 메루빈)의 경우는 야마토 운수의 19억 7천만 개보다 약 1억 개가 많은 20억 5천만 개이며, 요금이 일반 택배사와 비교할 때 저렴한 점을 감안하면 일본우정의 택배 및 우편 영역에서의 사업 성장 가능성은 큰 것으로 보인다.

다만 2만 4천여 개의 거대한 네트워크는 JR의 선례와 같이 과소지역의 특정우편국 축소나 폐지, 서비스 중단 등의 가능성이 지속적으로 지속되었다. 이에 대해 관련 법률이나 총무성령에서는 과소지에서 일정한 서비스 수준을 유지하도록 하는 제동을 걸고 있으며, 일본우정의 니시카와 사장이나 우편국회사의 가와 시게오 회장은 인터뷰에서 유초 은행 및 간포 생명은 우편국과의 장기적인 계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현재의 네트워크를 유지하게 되며, 전 회사의 민영화 이전에 수익성 낮은 우편국의 업무위탁의 정지나 철폐는 없다는 생각을 표명한 바 있다.

한편 민영화 이전부터 거액의 적자를 부담하던 국철과 우정 사업을 단순하게 비교할 수 없다는 지적도 있다. 국철의 경우 여러 개의 지역사로 분할·민영화 되었지만, 우편 사업의 경우 사업마다 분할 민영화하기 때문에 전국에 균일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다만 우편이나 택배 사업 등의 민간 부문의 역할이 활발한 분야와는 달리 저금이나 보험의 경우 우편국 이외의 금융기관이 존재하지 않는 지역의 경우 금융공백지대가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민영화 이후 첫 결산에서 일본우정그룹의 경상수익은 10조 979억 엔으로 나타났으며, 당기순익은 2772억 엔(유초 은행 1521억 엔, 간포 생명보험 76억 엔, 우편국 46억 엔)으로 나타났다[각주:1].

조직 변동

일본우정공사 기구 분할도우정 민영화 관련 법률에서는 우정공사를 이하의 6개 조직으로 분할하고 있다.

명칭 약칭 및 로고 업무
일본우정주식회사
지주회사
우편사업주식회사
우편사업
우편국주식회사
우체국망
주식회사 유초 은행
우편저금
주식회사 간포 생명보험
간이보험
독립행정법인 우편저금·간이생명보험 관리기구  


일본 정부의 기관으로는 2004년 5월 1일에 내각관방 우정민영화 준비실(2005년 11월 10일 이후에는 내각관방 우정민영화 추진실)이 설치되어 와타나베 요시아키 내각총리대신보좌관이 실장을 겸임하게 되었고, 2004년 9월 27일에는 다케나카 헤이조 국무대신이 우정민영화 조정 담당으로 발령되었으며, 이 두 사람은 2006년 9월 26일까지 직무를 수행했다.
기구 분할도

기구 분할도




운영 계획

2007년 10월 1일에 지금의 일본우정공사가 운영중인 사업을 이전받아, 우편국회사, 우편사업회사, 우편저금은행, 간이보험회사의 4개 사의 주식을 소유한 지주회사가 되었으며, 일본우정공사는 해산되었다.

일본우정은 그룹 경영을 총괄하고, 경영자 선임, 비즈니스 모델 수립, 직원 및 자산의 배분 등을 행하며, 2017년 이후에는 우편사업회사와 우편국회사의 주식은 전량 보유하지만, 우편저금은행과 간이보험회사의 주식은 2017년 9월까지 단계적으로 전량 처분해야 한다. 다만 전량 매각 이후에 다시 매입할 수 있으며, 4개 회사간 상호 출자가 가능하다. 또한 정부는 일본우정주식회사의 총 주식의 3분의 1 이상의 주식을 보유한다[각주:2].



*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08061268601 재정난 日시골우체국 기업에서 위탁 운영
* http://www.etnews.co.kr/news/detail.html?id=200807290185 일본 우체국 내 '편의점' 시범운영
  1. 日우정그룹 경상수익 10조엔, 한국보험신문 2008년 6월 23일자. [본문으로]
  2. 문성철, 〈일본 우정사업의 민영화와 공정경쟁 이슈〉, 《우정정보》 2006년 겨울호.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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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을 맞아
戦後50周年の終戦記念日にあたって

1995년 8월 15일

 지나간 대전이 마지막을 고한지 5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에 와서, 다시금 그 전쟁에 의해 희생된 내외의 많은 분들을 생각하면 가슴에 만감이 교차합니다.

 패전 후, 일본은 그 불탄 들판에서 많은 고난을 넘어 오늘의 평화와 번영을 쌓아올렸습니다. 이는 우리의 자랑이며, 이를 위해 국민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기울인 영지와 쉼없는 노력에 대해 저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위시한 세계 여러 나라의 지원과 협력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 또한 아시아·태평양 여러 나라와 미국, 또한 유럽의 여러나라와 오늘날과 같은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평화롭고 풍요로운 일본이 된 오늘, 우리는 자칫 이 평화의 고귀함과 고마움을 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의 잘못을 두번 다시 반복하는 일이 없도록, 전쟁의 비참함을 젊은 세대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특히 주변 여러 나라의 사람들과 손을 잡고, 아시아·태평양 지역,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를 확고히 해 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런 여러 나라와 깊은 이해와 신뢰를 바탕으로 한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불가결하다고 생각합니다. 정부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특히 근현대에 있어서 일본과 주변의 아시아 여러 나라와의 관계에 관한 역사 연구를 지원하고, 각국과의 교류를 비약적으로 확대하기 위해서, 이 두가지를 중심으로 한 평화 우호 교류 사업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또 지금 맞닥뜨린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서도, 우리나라와 이러한 나라와의 신뢰 관계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서, 저는 계속 성실히 대응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전후 50주년의 길목에 이르러,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역사의 교훈으로 삼고, 미래를 바라다보며 인류 사회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길을 그르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멀지 않은 과거의 한 시기, 잘못된 국가의 정책으로 인하여 전쟁으로의 길을 걸어 국민을 존망의 위기에 빠뜨리고,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통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래에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에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나타내 진심으로 깊이 사과드리는 마음을 표명합니다. 또한 이 역사로 인한 내외의 모든 희생자에게 깊은 애도의 뜻을 바칩니다.

 패전의 날로부터 50주년을 맞이한 오늘, 우리나라는 깊은 반성에 서서 독선적인 내셔널리즘을 물리치고,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국제 협조를 촉진하고, 이를 통해 평화의 이념과 민주주의를 널리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동시에 우리나라는 유일한 피폭국이라는 체험에 바탕을 두고, 핵병기의 궁극적인 폐기를 지향하여, 핵확산 금지 체제의 강화 등 국제적인 군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과거에 대한 속죄이며, 희생되신 분들의 영령을 달래는 길이 되리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의지할 것에는 믿음만한 것이 없다’고 합니다. 이 기념할만한 시간을 맞아, 신의를 시정의 근간으로 하는 것을 내외에 표명하며 저의 다짐하는 말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이 담화는 1995년 8월 15일에 열린 전후 50주년의 종전기념일에서 당시 총리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총리대신이 각의 결정에 근거하여 일본이 태평양 전쟁과 전쟁 이전에 행한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는 뜻을 표명한 담화이다. 주로 담화를 발표한 무라야마 총리의 이름을 딴 무라야마 담화라고 한다. 이 담화는 이후의 정권에도 계승되어,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역사적인 견해로 가끔 이용된다.

 1945년까지 이어진 일련의 전쟁을 두고 ‘반드시 침략이라고는 할 수 없다’는 주장이 정계를 비롯하여 일본에서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는 것과 관련하여, 담화에서는 “깊은 반성에 서서 독선적인 내셔널리즘을 물리치고, 책임있는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국제 협조를 촉진하고, 이를 통해 평화의 이념과 민주주의를 널리 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일본에서 자주 논쟁거리가 된, 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도 없는 이러한 역사의 사실” 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다만 이는 침략 ‘전쟁’에 대해 직접 사죄한 것이 아닌, 어디까지나 전쟁 중에 돌발적으로 일어난 침략 ‘행위’에 한정된다.

 또한 종군위안부에 대한 보상 등 여러 가지 개별적인 전후 처리 과제에 대해서는 “계속 성실히 대응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고, 또한 일본의 사명으로서 “유일한 피폭국이라는 체험에 바탕을 두고, 핵병기의 궁극적인 폐기를 지향하여, 핵확산 금지 체제의 강화 등 국제적인 군축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맹세하고 있다.

 이후 무라야마 총리는 “잘못된 국가의 정책으로 인하여 전쟁으로의 길을 걸”었다는 표현과 관련한 쇼와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해,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 국내적으로도 국제적으로도 천황의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담화에서 “잘못된 국가의 정책”이라고 말한 것을 두고, 폐하의 책임을 논할 생각은 없다”고 표명하여 구체적인 언급은 피했다.

 이 담화와 같은 방향에서 무라야마 총리는 아시아 각국을 순방하고, 일본이 과거에 행한 침략전쟁에 대해 사과하는 ‘사죄외교’를 전개했다. 이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는 찬반 양론이 있으며, 일본의 보수 세력은 ‘일본의 전쟁책임은 이미 해결하고 있으므로 더이상의 사죄는 불필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2005년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도 아시아 여러 나라에 사죄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하지만 담화에서 “식민지 지배와 침략을 통해 많은 나라,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습니다”라고 하거나, “역사의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여기에 다시 한번 통절한 반성의 뜻을 나타내 진심으로 깊이 사과드리는 마음을 표명합니다”라는 등의 내용은 무라야마 담화를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2006년 10월 5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아베 신조 당시 총리도 무라야마 담화를 “아시아의 나라들에 대해 큰 피해를 주고 상처를 준 것은 엄연한 사실”이라거나 “나라로서 표명한 그대로라고 생각한다”는 등, 정부로서든 개인으로서든 계승해 간다고 명확히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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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교훈으로 평화로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
歴史を教訓に平和への決意を新たにする決議


본 원(중의원)은 전후 50년을 맞아, 전 세계의 전몰자 및 전쟁 등에 의한 희생자에 대해 추모의 뜻을 바칩니다.

또한 세계의 근대 역사상에서 수많은 식민지 지배나 침략적 행위를 생각해, 우리나라가 과거에 행한 이러한 행위나 다른 나라의 사람,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국민께 준 고통을 인식하고, 깊은 반성의 뜻을 표명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전쟁에 대한 역사관이 다른 것을 넘어서, 역사의 교훈을 겸허하게 배우고, 평화로운 국제 사회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본 원은 일본국 헌법에서 표방한 항구 평화의 이념 하에, 세계의 나라들과 손을 잡고 인류가 공생할 수 있는 미래를 열겠다는 결의를 여기에 표명합니다.

(괄호는 편집자 주)


1995년 6월 9일에 일본 중의원 본회의에서 가결된 결의이다. 종전 50년 결의나 부전 결의라고도 불린다. 당시 자·사·사 연립 정권이던 무라야마 내각의 여당인 자유민주당·자유연합, 일본사회당 및 신당 사키가케의 일부 의원들에 의해 공동제출되었지만, 가결까지는 일본사회당과 도이 다카코 중의원 의장의 주도로 진행되었다. 중의원 의원 502명 중 251명이 출석해, 230명이 찬성(기립투표)함으로써 가결되었다.

1995년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50년째가 되는 해로, 앞의 대전을 정리하는 움직임이 일본 내에서도 활발했다. 이 결의도 그 일련의 움직임의 하나로 행해진 것이다.

일본사회당이 제출한 초안은 당시의 연립정권을 구성하고 있던 자유민주당 등의 반발로 인해 표현을 대폭 수정할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수정안은 서로가 조금씩 물러난 표현으로 보이지만, 결의 자체에 반대하는 의원도 많았으므로 결국 많은 결석자를 만들어 찬성과 반대가 팽팽히 맞서는 결의가 되었다.

의결에는 결국 여당 의원 70명을 포함한 241명이 결석하고, 251명이 출석했다. 표결은 기립투표로 진행되어, 230명이 찬성해 가결되었다. 결석한 여당 의원 70명 중 50명은 ‘이러한 의결은 원래 불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자민당의 보수파 의원이며, 14명은 ‘수정안의 양보가 지나쳤다’는 입장인 사회당 의원이다. 야당은 신진당 소속의원 141명이 결석했고, ‘보다 솔직하게 사죄를 표명하는 표현’을 요구하는 일본공산당 소속의 의원 14명도 결석했다. 여당에서도 결석자가 많았으므로, 참의원에서는 결의 제출이 보류되었다.

당시 내각총리대신이던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이 결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언을 하였다.

오늘, 전후 50주년을 맞아 국회가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로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를 하신 것을 진심으로 깊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전후 50주년을 맞이하는 정부의 기본적인 방침은 나의 담화나 소신을 표명하는 등으로 분명히 행한 바이며, 이번 결의를 축으로 하나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부로서는 과거의 역사를 교훈으로 삼아 평화로의 결의를 새롭게 하고자 하는 결의의 취지를 향후의 우리나라의 시책에 활용해 나갈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나는 이 기회에 국내외의 희생자께 깊은 애도의 뜻을 표명하는 것과 함께, 과거에 대한 깊은 반성의 뜻에서 세계 평화의 창조를 위해 힘을 다해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는 나 자신의 결의를 재차 표명하고 싶습니다.

이상입니다.

이 결의는 이후 무라야마 담화(누지름)로 이어졌지만, 근래에는 무라야마 담화를 언급할 때 이 결의보다는 담화가 강조되는 경향이 있다.

2005년 8월 2일에는 중의원 본회의에서 〈유엔 창설 및 우리나라의 종전·피폭 60주년을 맞아, 더욱 더 국제 평화의 구축으로의 공헌을 맹세하는 결의〉, 일명 종전 60주년 결의가 가결되었다. 이 결의에서는 “우리는 여기에 10년 전의 ‘역사를 교훈으로 평화로의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의’를 다시금 되새겨, 우리나라의 과거의 한 시기의 행위가 아시아를 시작으로 하여 여러 나라의 국민에게 준 큰 고난을 깊이 반성하고, 재차 모든 희생자분들께 추도의 뜻을 바친다”고 하면서, 결의를 인용하고 있다. 이 결의는 자유민주당, 공명당, 민주당, 사회민주당 등의 다수의 찬성으로 가결되었다. 하지만 이 결의안에서도 자유민주당과 민주당 등에서 10명정도가 결석했으며, 일본공산당은 반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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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POST 도쿄 도 주오 구 편
 
지난 2007년 10월 1일, 일본우정공사에서 주식회사 일본우정(이른바 JP HOLDINGS)을 중심으로 하는 JP 일본우정그룹이 발족하면서 일본의 우정민영화의 큰 분기점이 성공적으로 매듭지어졌다(자세한 사항은 다음 글을 참조). 역시 국가기간산업인 우정사업인 점도 있겠지만, 세계 최대 규모의 금융회사가 순식간에 민영화되는 과정에서 가장 걱정되었던 일본우정의 안정성 문제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논의가 지속될 것이다.

우정민영화 텔레비전 CM에서도 이러한 점은 자주 부각된다. 민영화 이후의 금융과소지역에서 우편국 네트워크의 철수가 이어질 것이 아니냐 등의 문제에 대해 요시후미 사장이나 고이즈미 전 총리가 일축한 것과 같이, 비슷한 구성의 모토인 '당신의 곁에 있는 회사'(あなたの近くにある会社)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이와 관련해 일본우정이 제작한 홍보페이지(누지름)은 이러한 점을 섬세하고 부드럽게 묘사하면서도, 일본의 우정사(郵政史)를 재미있게 볼 수 있는 훌륭한 페이지라고 하겠다.

JAPAN POST 홋카이도 도카치평야 편
 
위에 게재한 일본우정그룹 CF 도쿄 도 주오구 편에서는 배경음악으로 나쓰카와 리미(夏川りみ)의 눈물 주룩주룩(涙そうそう)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음악이나 목소리가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 '하나를 사랑할 일본으로'(ひとりを愛せる日本へ)라는 슬로건 또한 일본우정의 이후 방향을 밝은 분위기와 함께  미래를 이끌어 나갈 때 한 사람 한 사람의 고객에 대해 사랑을 담겠다는 의미를 담아내고 있다.

오른쪽에 게재한 일본우정그룹 CF 홋카이도 도카치 평야(十勝平野) 편 또한 같은 분위기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주민을 그려내면서 편안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JP POST 노토 반도 편
 
새로 발족한 일본우정그룹의 모토는 '새로운 보통을 만든다.'(あたらしいふつうをつくる。)인데, 전반적인 뜻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대충 느낌은 이전의 정부조직이나 공사 체제에서 벗어나 민영화된 일본우정이 새로운 느낌으로 보편적인 우정 역무를 수행하겠다는 의미를 담고있지 않나 싶다. 역시 이러한 부분에서 문제되는 것이, 민영화 체제에서 보편적인 우편역무에 대한 중요성일 것이다. 우표 및 인지류의 인쇄 등의 우편소요사업과 우편물의 배달 등을 담당하는 일본우편 주식회사(이른바 JP POST)의 CF에서도 이러한 사업에 대한 일본우정의 의지를 잘 드러내고 있다.

게재한 일본우편의 CF 또한 '우편물은 집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郵便物は、家が待っているのではない。人がまっているのです。)라는 말로 사람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고 있다. 배경은 노토 반도(能登半島)로, 산간지역 등의 우편서비스에 대한 저하 우려에 대해 관심을 내비치고 있다. 일본우편의 슬로건 '전하는 힘을, 일본의 힘으로'(届ける力を、日本の力に。) 또한 우편 배달 역무를 담당하는 일본우편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JP NETWORK 노토 반도 편
 
다음은 우편국(우체국)의 영업을 담당하는 우편국 주식회사(이른바 JP NETWORK)의 CF인데, 역시 배경은 일본우편과 같은 노토 반도의 우편국이다. 여기서의 모토는 '갈 수 없다면 가지 않는 곳에서, 가고 싶은 곳이 되고 싶다.'(来ぬければ行けない場所から、来たくなる場所にしたいと思う。)로, 기존 우편국 네트워크에서 한층 더 발전해 가고 싶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이념을 담아내고 있다.

이렇게 JAPAN POST의 CF 두 편과 JP POST 및 JP NETWORK의 CF 각 한 편씩을 살펴보았다. 물론 이만큼 왔으면 당연히 주식회사 유초 은행(이른바 JP BANK)과 주식회사 간포 생명보험(JP INSURANCE)의 광고도 살펴보아야 하겠지만, 이 두 회사의 관련 CF는 찾을 수 없었다(유투브에서 -_-). 다만 간포 생명의 새 CF를 찾을 수 있어 게재해 본다.

JP INSURANCE 신나가이키쿤 CF
 
새로 출범한 간포 생명이 보통종신보험 나가이키쿤(ながいきくん) 이후의 브랜드 신나가이키쿤(新ながいきくん)을 이야기하면서, 나가이키쿤은 차음료나 건강드링크, 스포츠드링크 인척하는 광고를 내세웠던 것과는 달리 간포 생명의 영업 사원에 대해 부각시키면서 간접적으로 신나가이키쿤의 내용에 대해 드러내고 있다. 특히 재미있는 광고라고 생각했다.

이상과 같이 우정민영화 이후의 일본우정의 CF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민영화의 가장 큰 걱정이었던 서비스의 문제를 잘 그려내면서도, 이미지를 잘 그려내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또한 처음에 언급했던 홍보 페이지는 발군의 수작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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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1952년 7월 15일 ~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5선 중의원 의원이다.

참의원 의원과 제5·6·7대 환경대신,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오키나와 및 북방 대책 담당)을 역임했으며, 내각총리대신 보좌관(국가안전보장문제 담당), 제2대 방위대신을 역임했다.

효고 현 아시야 시 출신이다. 1971년 9월에 간세이가쿠인대학 사회학부를 중퇴했다. 고베에서 의류 관련 무역상을 하던 부친이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郎)의 신당 결성 움직임에 발맞춰 중의원 선거에서 효고 2구에 입후보 했지만 낙선하자, 일가가 모두 이집트로 건너간다.

“아랍어가 유엔 공용어가 된다”는 신문기사를 계기로, 아메리칸 대학(American University Of Cairo)에서 아랍어를 배워 카이로 대학에 진학했다. 1976년 10월에 카이로 대학 문학부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팔레스타인 해방기구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 등과의 단독 인터뷰를 성공시키는 등의 활동으로 이름을 높였다.

1992년 7월에 일본신당 비례구에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었고, 1993년 7월의 총선거에서 다시 효고 2구에서 출마해 중의원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이후 여러 정당의 분열·통합이 이루어지자 신진당으로 이동해 “신진당의 결성은 페리, 맥아더에 이은 제3의 구로후네(黒船)다”라고 평했지만, 이후에 자유당과 보수당을 거쳐 2002년 12월 27일에는 자유민주당으로 이동했다.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니카이 도시히로(二階俊博),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아베 신조(安倍晋三) 등의 권력자나 실력자가 있는 정당으로 이동해왔으며, 이 때문에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환경대신

자민당에 입당한 뒤에는 총재의 파벌인 세이와(淸和) 정책연구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제1차 고이즈미 내각 제2차 개조내각에서 환경대신으로 입각했다. 2003년의 총선거에서는 긴키 블록에 비례대표로만 명부에 3번으로 등록되어서 당선되었다. 2003년 2월에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이라크 문제에 대해서 미국의 입장과 행동을 지지하는 성명」을 연명으로 신문에 발표하기도 했다. 제2차 고이즈미 내각 출범과 함깨 환경상으로 유임되었고, 2005년 여름에는 가벼운 복장을 입자는 쿨 비즈 캠페인의 선도자가 되었다.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우정 민영화 법안에 반대한 고바야시 고키(小林興起)의 대항마로 도쿄 10구에서 입후보했다. 이 지역은 이전까지는 자민당의 고바야시 고키와 민주당의 사메지마 무네아키(鮫島宗明)의 대결장이었으며, 두 사람의 나이가 같고 도쿄 대학을 졸업한 전 관료 사이의 싸움이었던 점에 착안한 고이케 유리코는, 고바야시의 낙선을 노린 이른바 자객 후보로 나서면서 도쿄 10구(도시마 구)는 미디어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자민당 비례대표에서 비례 명부에 오를 수 있었지만, 당선에 대해 확신한 고이케는 선거구에서의 불리함을 피하기 위해 상위 우대를 거부하고 낮은 순위로 명부에 올랐다.

우정 민영화를 바탕에 깐 우정 선거라는 순풍과 함께 사메지마보다 낮은 지지율을 기록한 고바야시의 자멸로 고이케는 쉽게 당선되었다. 선거 이후에는 온난화 대책이라는 명목으로 환경세라는 이름의 새로운 세제를 도입한다는 구상을 발표했지만, 반대가 많아 보류되었다.

제2차 고이즈미 내각 개조내각에서는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오키나와 및 북방대책 담당)도 겸임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요인으로 2005년에 피로로 입원하게 되면서, 2006년 4월 6일의 『슈칸신초』(週刊新潮)에서는 “나가타초(永田町)에서는 위독설이나 자살미수설이 흐르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햇지만, 4월 14일에 퇴원하고 업무에 복귀했다. 고이케는 복귀 회견에서 “여성의 경우 남성의 10배 정도의 결과를 내지 않으면 인정받기 힘들기 때문에, 무심코 지나치게 열심히 했다”고 발언했다.


방위대신

아베 내각의 발족과 함께 국가안전보장문제를 담당하는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으로 취임했지만, 2007년 7월 3일에 규마 후미오(久間章生) 방위상이 “원폭 투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발언으로 방위대신 직을 사직하면서, 다음날인 4일에 그 후임으로 방위대신에 취임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근대 군사역사상 여성이 방위담당각료가 된 것은 처음이다.

방위대신에 취임한 이후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의 연장과 관련해 민주당이 주장하는 자위대 파견에 대한 국회의 사전 승인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2007년 8월에는 미국 하원의 위안부 결의 문제로 아베 총리나 아소 다로(麻生太郎) 등이 일미관계에 주던 마이너스 이미지를 해소하기 위해, 167회 국회를 결석하고 미국을 전격 방문해 딕 체니(Dick Cheney) 부통령과 로버트 게이츠(Robert M. Gates) 국방장관과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고이케는 일본의 야당이 테러대책특별조치법의 연장에 반대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인도양에서 자위대의 급유 활동에 대해 “앞으로 계속 역할을 다하고 싶다”며 연장 의사를 밝혔다. 이 방미에 대해서 국회를 결석하면서까지 행한 것에 대한 비판이나, 아베 내각 개조내각에서 방위대신으로 유임하거나 외무대신으로 전임하기 위한 퍼포먼스가 아니냐는 보도가 있었다.

이후 고이케는 수상 보좌관 시대부터 숙원으로 하던 방위성의 정보보안 시스템 확립을 위해 모리야 다케마사(守屋武昌)를 대신해 경찰청 출신의 니시카와 도오루(西川徹)를 사무차관으로 임명하려고 했지만, 이 사실이 매스컴에 누설되고 또한 모리야가 아베 총리나 시오자키 야스히사(鹽崎恭久) 내각관방장관에게 인사안의 철회를 직소한 사실도 매스컴에 누설되는 바람에 이 인사를 둘러싼 스캔들이 매스컴에 의해 불거졌다. 이로 인해 고이케 인사안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아베 총리와 시오자키 관방장관은 제3의 대안을 고이케에게 요구해 사태의 수습을 꾀하고자 했다. 결국 고이케와 모리야간의 교섭을 통해 모리야는 2007년 9월 1일자로 퇴직하고, 고이케가 추천한 니시카와 대신에 방위성 출신인 마스다 고헤이(増田好平)를 사무차관으로 임명하는 데에 합의했다. 그러나 이 소동으로 고이케와 모리야 사이의 마찰이 매스컴에 보고된 일이나 고이케와 시오자키 사이의 마찰이 불거진 점, 수상 관저의 리더십 및 위기관리능력의 부재 등이 드러난 것 등으로 고이케와 시오자키, 아베 총리에게 가해진 데미지는 상당했다.

2007년 8월 27일에 발족할 아베 개조내각을 두고 고이케의 진퇴가 주목되었지만, 고이케는 8월 24일에 인도 뉴델리의 호텔에서 “여러분이 이상하게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방위성 내에서 (2007년 5월에 고이케가 수상보좌관으로 있을 때 발각된 사건으로, 방위대신으로 방미했을 때에도 지적된 일본 방위성의 정보보안에 대한 우려를 낳은 원인이 된 이지스 함 기밀 정보 누설 사건의) 책임을 어느 분도 지시지 않습니다만, 이 점에서 (일찍이 국가안보담당보좌관으로 지금은 방위대신인) 제가 책임을 지고 싶습니다.”라고 밝히고, “정보보안이라는 큰 과제가 정말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빈틈없는 체제를 구현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를 맡길 수 있는 다른 분이 대신직을 맡으셨으면 한다”고 발표했다. 8월 27일의 마지막 각의 이후의 회견에서는 “국정에서 가장 중요한 국방이라는 부분을 담당하게 된 것은, 정말로 여자의 숙원이라는 기분이었습니다. 국방에 관해서는 ‘아이 쉘 리턴(I shall return·반드시 돌아오겠다)’의 마음가짐으로 노력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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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회당 제2회 전국대회
일본사회당의 출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전에 비공산당계열이던 합법 사회주의 세력이 단결하여 결성하였다. 주로 좌파의 노동농민당(労働農民党), 중간파인 일본노농당(日本労農党), 우파인 사회대중당(社会大衆党) 등이 결집하였으며, 우파와 중간파는 민주사회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를, 좌파는 수정마르크스주의적인 사회민주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또 일부였던 사회대중당 세력은 태평양 전쟁때 사회주의의 실현을 국가주의에 요구하며 군부 독재에 협력한 강경파적인 색채가 강한 의원도 많았다.

일본사회당 제3회 전국대회
전쟁 이전에도 창당 당시에 당명을 ‘일본사회당’으로 할지 ‘사회민주당’으로 할지 논의하다가 일본어 명칭은 일본사회당으로, 영문 명칭은 Social Democratic Party of Japan (SDPJ)으로 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그러나 후에 좌파가 주도권을 잡으면서, 점차 Japan Socialist Party (JSP)라는 영문 명칭이 사용되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우파의 영향력이 강해져 사회민주주의가 당의 노선이 되면서 SDPJ의 영문 명칭을 회복하게 되었다고 한다.

도쿠가와 요시치카(徳川義親) 후작 등의 명망가를 추대하려는 의도로 당초의 위원장은 공석으로 되어, 초대 서기장으로는 가타야마 데쓰(片山哲)가 취임했지만, 곧 위원장에 취임하게 된다.


원내 제1당으로 부상

가타야마 데쓰

가타야마 데쓰

일본국 헌법에 의해 치뤄진 1947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143석을 획득해 제1당으로 부상한다. 그 결과 민주당과 국민협동당과 연립하여 가타야마 내각이 출범했다. 하지만 히라노 리키조(平野力三) 농림상이 공직에서 추방된 것을 둘러싸고 우파의 일부가 탈당하고, 당내의 좌파는 공공연하게 내각을 비판하는 등 분열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1948년에 가타야마 내각이 당내의 파벌 대립의 선동으로 와해되었다. 니시오 스에히로(西尾末広) 내각관방장관은 좌파의 입각을 인정하지 않았고, 좌파는 사실상 당내의 야당처럼 되어 가고 있었다.

이어 수립된 아시다 히토시(芦田均) 내각에서 사회당은 여당의 자리를 지키며, 일부 좌파의 입각을 인정했지만, 극좌파의 구로다 히사오(黒田寿男) 등 6명이 예산안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제명되는 등, 극좌파와 극우파를 몰아내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쇼와전공 사건이 발생해 뇌물 수수로 아시다 총리와 니시오 스에히로 부총리가 체포되면서, 결국 내각이 하야하게 되었다.

제명된 구로다 히사오 등은 12월 3일, 노동자농민당을 결성했다. 1949년 1월 23일의 제24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의석이 48석으로 격감해 여당에서 제2야당으로 추락했으며, 위원장이던 가타야마 데쓰까지 낙선하게 되었다.


좌우파의 분열과 총평·사회주의협회의 결성

총선거에서 패배한 후에 열린 제4회 당대회에서 모리토 다쓰오(森戸辰男)가 당의 성격을 ‘국민정당’으로 규정하고, 의회주의에 근거한 반공을 주창했다. 그러자 이나무라 준조(稲村順三)가 혁명에 의해 사회제도를 변혁하며, 때에 따라서는 공산당과의 연합도 불사하는 ‘계급정당’적 성격의 일본사회당을 주장했다. 이 논쟁은 결국 일본에서의 사회주의적 정책의 실현 방향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했으며, 가쓰마타 세이이치(勝間田清一)가 제기한 ‘계급적 대중정당’이라는 정의로 결착이 지어지는듯 했다.

1951년 사회민주당
하지만 이로 인해 촉발된 좌우 양파의 대립은 심각하게 진행되었고, 1950년 1월 16일에는 좌·우파가 분열하게 된다. 이때는 75일 후인 4월 3일의 당대회에서 다시 통일할 수 있어 대립이 종료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곧 대일강화조약의 찬반을 둘러싸고 좌우 양파가 대립하기 시작해, 1951년 10월 24일에 다시 분열된다.

1950년 7월에는 일본노동조합총평의회(총평)가 결성된다. 총평은 노동조합에서 일본공산당의 영향력을 배제하고자 하는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주선으로 결성되었기에 초기에는 온건한 색채를 띄고있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 재군비 논쟁이 과열되면서, 총평 내에는 재군비반대파가 대두해 반미·반정부의 자세를 강화해갔다. 1951년에는 야마카와 히토시(山川均) 등 전쟁 이전의 마르크스주의 활동가를 중심으로 사회주의협회가 결성되는 등, 이후의 일본사회당을 지탱하는 조직적·이론적 배경의 기반을 형성해갔다.

스즈키 모사부로의 취임사 장면

스즈키 모사부로

분열 직전인 1951년에 위원장으로 취임한 스즈키 모사부로(鈴木茂三郎)는 위원장 취임사에서 “청년이여, 총을 들지 말게”라고 호소하며 비무장 중립론을 주창했다. 이는 전쟁을 싫어하는 감정이 강했던 당시의 젊은 층에서 부각되며, 분열 이후에도 비무장 중립론을 주창하던 사회당 좌파의 세력을 늘리게 했다. 또한 총평도 사회당 좌파의 약진을 지원했다. 한편 사회당 우파는 재군비에 적극적이었던 니시오 스에히로와 소극적이었던 가와카미 조타로(河上丈太郎)의 대립 등으로 재군비에 대해 명확한 자세를 취하지 못했고, 노조의 지원도 받을 수 없었으므로 세력이 후퇴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좌파가 당의 전면에 부각되었다.


좌우 통일과 1960년의 안보투쟁

1955년
사회당 좌우 양파는 1955년 10월 13일에 열린 당대회에서 오랜 분열에 종지부를 찍고 통일을 완수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의석의 확대는 계속되었고, 통일 당시에는 중의원 의석이 156석에 달하고 있었다. 이즈음 보수에서는 자유민주당이 결성되었다. 1956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새로 선출한 127석 중 자민당이 61석을, 사회당이 49석을 얻어 양당 체제가 견고해졌다. 당시에는 영국과 같은 양당제를 이상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했고, 사회당 또한 정권 획득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1957년에는 당의 분열이 완전히 해소되기도 했다.

1959년
그러나 1958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후보자의 난립을 억제한 자민당이 287석을, 사회당이 166석을 획득해 주춤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때는 사회당의 최고 의석으로, 유일하게 3분의 1을 넘는 의석을 획득한 선거였다. 1959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도쿄 선거구에 공천한 후보가 전멸하는 등, 당의 세력이 후퇴했다.

극우파였던 니시오 스에히로는 ‘패한 원인은 계급정당론, 용공, 친중·소 노선’이라고 비판했다. 게다가 미·일안전보장조약의 폐지를 주장하던 사회당에, 조약 개정에 반대한다면 그를 대신하는 안전보장체제를 명확히 할 것이나 안보개정저지국민회의의 주도권을 총평에서 사회당으로 옮긴 뒤 일본공산당을 배제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니시오 스에히로 및 가와카미 조타로 등의 파벌 일부는 1959년에 연달아 탈당한 뒤, 다음 해에 민주사회당을 결성했다. 후일에 이런 배후에는 미국의 지원이 있었음이 밝혀졌다.[각주:1]

1961년
결국 사회당은 미·일안전보장조약의 개정을 앞두고, 조약 폐기를 쟁점으로 정권 획득을 노리게 되었다(안보 투쟁). 또한 거의 동시에 전후 최대의 노동쟁의로 불리는 미쓰이 미이케 쟁의가 일어났다. 이 쟁의와 안보 투쟁에 사회당은 전력을 쏟으며 싸우기 시작한다. 이때 사회당의 청년부를 기초로 한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하지만 결국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미이케 광산 노동자 측에 현저하게 불리한 조정안을 제시하면서부터 패배가 결정되었고, 새 안전보장조약도 자연스럽게 성립하게 되었다.


구조개혁 논쟁과 ‘길’의 채택

민사당이 떨어져 나갔지만, 제1야당의 자리는 여전히 일본사회당이 차지하고 있었으며, 보수세력에 대비되는 혁신세력의 중심으로 건재했다.

아사누마 이네지로 피살 사건

아사누마 이네지로 피살

1960년의 10월 12일에는 NHK가 기획한 도쿄 히비야공회당 3당수 연설회에서 연설중이던 대표 아사누마 이네지로(浅沼稲次郎)가 17세의 우익 소년 야마구치 오토야에게 좌측 흉부를 찔려 사망했다. 11월 20일 중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일어났지만, 선거에서 사회당은 145석을 획득했다. 민사당은 17석을 획득했지만, 자민당은 296석으로 의석을 늘렸다.

1958년의 총선거 직후부터 당 내에는 개혁운동이 시작되어, 에다 사부로(江田三郎)는 젊은 층의 지지를 받아 지도자의 지위를 확립했다. 곧 안보 투쟁과 미쓰이 미이케 쟁의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점진적인 개혁을 진행시킨 뒤 그 축적된 것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자는 ‘구조개혁론’을 제창했다. 에다 사부로는 1962년의 강연에서, 장래의 일본의 목표로 해야하는 미래상으로 이른바 ‘에다 비전’을 제시했다. 이 미래상에는 ‘미국의 평균적인 생활수준과 소련의 철저한 생활보장, 영국의 의회 민주주의, 일본국 헌법의 평화주의를 종합적으로 조정할 때 대중과 맺어진 사회주의가 태어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이것으로 에다는 여론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사사키 고조(佐々木更三) 등은 에다의 대두를 경계하기 시작했고, 사사키와 손잡은 사회주의협회의 영향력도 커졌다. 당의 ‘대중화’ 구호와는 반대로, 지도자들은 파벌 싸움에 날이 지고, 사회당은 오로지 사회주의협회와 총평의 조직력에만 의존하는 체질이 되어갔다. 1964년에는 사회주의협회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사실상의 강령 ‘일본에 있어서의 사회주의에의 길’(통칭 )이 채택되었다. ‘길’은 1966년에 보정되어, 사실상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긍정하는 표현을 포함시키기에 이르렀다.

사회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맹하고 이었지만, 사민주의는 좌파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체제를 인정한 개량주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매우 적대시 되었다. 좌파는 체제의 개혁이 아닌,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타도하려는 혁명을 지향하고 있었으며, 사민주의로의 전환은 자본주의에의 패배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극우파가 민사당으로 떠나 좌파의 힘이 강해진 때문이기도 하고, 당내의 우파가 적극적으로 사민주의를 주장할 수 없게 된 원인이 되었다. 그 결과 일본사회당은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가맹한 정당이면서, 소련이나 중국 등의 제2세계 국가와 친근함을 나타내는 특이한 강령을 가진 정당이 되었다. 사회당 간부는 소련이나 중국에는 우호 방문을 반복하는 한편, 미국에 대해서는 베트남 전쟁에 항의하거나 사죄하라고 대사관을 통해서만 전달하는 등의 편향적인 대외 교류정책을 취해 사실상 중립정책을 폐기하고 있었다. 또한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은 미국의 베트남 전쟁을 지지했기 때문에, 사회당은 어느 기간은 회비를 납부하지 않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탈퇴는 하지 않았다.


정체에서 낮은 하락세로

고도 경제 성장과 함께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는 것은 계속되었으므로, 노동조합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사회당의 의석이 증가할 것이라고 예측되었으며, 사회당 또한 선거마다 후보자를 늘리고 있었다. 하지만 1963년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1석이 감소한 144석, 1967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4석이 감소한 140석으로 대부분의 예상과 달리 세력이 정체했다거나, 미묘하게 감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사회당은 정체의 원인을 찾기보다 내부의 파벌싸움에 에너지를 소비할 뿐, 이 정체기에 대처하지 못했다.

일본의 저널리스트, 이시카와 마스미(石川真澄)는 이러한 정체의 원인을, 새로 도시에 유입된 사람은 상당부분이 상시 기권층으로 전락하며, 일부는 공명당이나 일본공산당 등 지역을 보살피는데 열중하는 정당에 흡수되어 간 것으로 지적했다. 도시에서는 점차 다당화 현상이 현저해진 것도 한 원인이다. 이를 두고 다나카 젠이치로(田中善一郎) 등은 이시기의 자민당이 후보를 줄였으며, 야당은 후보를 늘려 결과적으로는 야당의 표가 증가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지만, 결국 도시지역에서 사회당 지지자가 감소했다는 것은 공통된 지적이다.

1969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후보자를 26명이나 줄였지만, 의석은 전의 선거에 비해 50석이나 줄어든 90석으로 급감했다. 이시카와 마스미는 또한 이러한 현상을, 사회주의에 불리한 사건들이 일어난 것 때문에 사회당에 진저리가 난 지지층이 대부분 기권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1970년대 전반에는 위원장 나리타 도모미(成田知巳)와 서기장 이시바시 마사시(石橋政嗣)를 중심으로 잃어버린 의석을 어느정도 회복하기도 했다.

55년 체제가 성립한 당시는 사회당도 정권 획득을 목표로 했으며, 지지자의 상당수도 사회당 정권을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자민당의 일당 우위체제가 지속되면서, 사회당의 정권 획득에 대한 열망은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사회당이지만, 사회 구조가 변화하면서 유권자들은 사회주의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사회당 또한 현상 유지에 급급하면서 장기적으로는 낮은 하락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회당은 ‘만년 야당’으로 불리며, 지지자들 또한 자민당 정권이 지속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인식이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도시지역에서 사회당이 밀려나기 시작한 것은 상당해, 도쿄 도 의회에서는 자민당 뿐만 아니라 공명당과 일본공산당에도 의석이 미치지 못해 제4당으로 전락했다. 그나마 지방에서는 자민당과 사회당의 양당 체제가 유지되었기 때문에, 사회당은 도시형 정당에서 농촌형 정당으로 전락해 갔다.


혁신 지자체와 사회주의협회 세력의 대두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사회당은 일본공산당까지 포함한 모든 야당의 공동투쟁 노선을 취해, 지자체에서 공산당과 함께 선거를 진행시켰다. 그 결과 도쿄 도, 오사카 부 등 각지에서 혁신 지자체의 수장이 탄생했다. 이런 혁신 지자체들은 사회 복지의 강화 등 일정한 결과를 남겼지만, 재정의 악화를 불렀다는 비판도 받고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사회주의청년동맹에 세력을 가지고 있던 극좌파를 배제하면서 사회주의협회의 영향력이 조직에서도 강해지기 시작했다. 사키사카 이쓰로(向坂逸郎)를 지도자로 한 당시의 사회주의협회는 마르크스나 레닌 등의 저작을 절대시하면서, 소련을 ‘사회주의의 조국’으로 생각하며 체코 침공을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등, 사회당이 제시한 당시의 중립정책이 용납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친소 경향의 사회주의협회 세력이 확대되면서, 사사키 고조 등은 예전에 적대시하던 에다 사부로와 연합하면서, 이후 사회주의협회 세력과 반협회 세력의 대립은 격화되어 갔다.


협회 규제와 ‘신선언’

도쿄시민사회연합준비회의 에다 사부로

에다 사부로

1976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무소속 보수계 의원들의 공인으로 과반수를 확보했지만, 당 자체의 의석 확보는 처음으로 과반수를 넘지 못해, 정권 교체가 도마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사회당 내의 분란은 계속되어, 에다 사부로는 ‘1977년의 당대회에서 사회주의협회 세력이 대의원 다수를 억제해, 부위원장을 해임시킨 것 때문에 사회당에 절망했다’며 탈당해, 사회시민연합을 결성했다. 이와 함께 1977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도 저조한 성적을 기록해, 위원장 나리타 도모미 등이 사퇴했다. 결국 협회 규제가 행해져, 철저하게 이론집단으로만 머물 것을 맹세하게 해 사회주의협회의 활동에 제동을 걸 수 있었다.

이후 총평도 변화하기 시작해, 1980년대 이후의 사회당은 일본공산당은 제외하고, 민사당과 공명당 등의 중도 세력과 함께 연립정권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지자들마저 자민당 정권이 자명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공명당과 민사당은 공식적으로는 사회당과의 사-공-민 노선을 취하면서도, 자민당과의 연립정권을 노리게 되었다. 의석수는 여당과 야당이 비슷해졌지만, 유권자들의 의식에서는 자민당 정권의 안정성이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1980년의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에서는 자민당이 크게 승리했지만, 1983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다시 여당과 야당이 비슷해졌다. 그러나 사회당의 의석은 소폭 증가한 것에 머물렀다.

1986년에는 격렬한 논쟁 끝에 이시바시 마사시 위원장이 ‘길’을 ‘역사적 문서’로 보류함으로써 사실상 폐기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강령인 일본사회당의 신선언이 채택되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폭력혁명을 원천적으로 막아, 의회 정당의 지위를 확립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도 표결을 통한 것이 아닌 만장일치로 채택하는 것에 집행부가 얽매여, 구노선을 계승한다고도 해석되는 추가 결의를 타협의 산물로 덧붙였기 때문에, 노선 전환이라는 의식이 당 전체에 명확하게 공유되었다고는 할 수 없다. 명확한 의미로의 노선 전환은 무라야마 내각 성립에 이르러서야 이루어 졌다.


마돈나 붐의 고조와 쇠퇴

도이 다카코

도이 다카코

‘신선언’이 채택된 이후에도 하락세는 멈추지 않았고, 1986년의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에서는 중의원의 의석이 85석으로, 이전의 선거보다 27석이 줄어들게 되었다. 이후 1986년 9월 8일, 도이 다카코(土井たか子)가 위원장으로 취임하면서 일본의 의회 정당으로는 최초로 여성 당수가 탄생했다.

도이 다카코의 인기와 함께, 소비세 도입으로 늘어난 정부에 대한 불만을 끌어안은 사회당은 1989년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46석을 획득해, 36석을 획득한 자민당보다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사상 최초이자 최후가 된 사회당의 참의원 제1당으로의 등극에는, 여성후보를 적극적으로 공천했기 때문에 붙여진 마돈나 선풍의 영향도 컸다. 도이 다카코는 자민당의 의석이 무너진 것을 두고, “산이 움직였다”고 표현했다.

1990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1960년대 후반 수준인 136석을 획득해 다시 약진했지만, 자민당도 추가 공인을 포함해 안정적인 286석을 획득했다. 사회당은 선거에서 표면상으로는 정권 교체의 실현을 내걸었지만, 결국 사회당의 증가한 의석은 자민당이 아닌 다른 야당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격렬한 파벌 싸움과는 달리, 선거에서의 긴 시간동안 보여준 소극적인 모습이 사회당의 체력을 빼앗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사회당 내에서는 정권 교체에는 실패했지만, 의석수를 회복했다는 안도감이 크게 작용해, ‘사회당은 정권 획득의 의지가 없는 만년 야당으로 만족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사회당의 단독 승리는 이에 불만을 가진 민사당과 공명당의 이탈을 불렀다.

걸프 전쟁을 둘러싸고, 일본이 국제적으로 어떠한 공헌을 해야하는 지에 대한 논의가 정치적인 문제로 부상했지만, 사회당은 정부안에 대한 반대만을 강조했으며, 상당수 국민이 납득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제안을 보여주지 못해 실망을 불렀다. 이와 함께 민사당과 공명당과의 협조를 중시하는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 등의 노조 간부와의 마찰도 강해져 도이 집행부의 구심력은 급속히 저하되었다. 결과적으로 1991년의 지방선거에서 공전의 패배를 기록해, 도이 다카코는 그 책임을 지고 위원장 직에서 물러났다.

위원장 선거에는 다나베 마코토(田邊誠)와 우에다 데쓰(上田哲)가 입후보했다. 노동조합을 뒤에 업고, 유력한 우승후보로 주목받은 다나베가 유리하다는 관측이 우세했지만, 호헌·평화노선의 유지를 주장하는 우에다가 일반 당원들의 큰 지지를 얻었다. 다나베는 노조로부터의 집단 입당자의 표로 간신히 승리하게 되었지만, 이 결과는 이후의 당 집행부에 큰 족쇄로 작용하게 되었다.


다나베 집행부와 PKO법안

새로 취임한 다나베 마코토 위원장은 자민당의 가네마루 신(金丸信)과 가깝다는 평을 들었다. 그러나 1992년, ‘국련(UN)평화협력법안’, 일명 PKO법안에는 표결시에 의도적으로 의사진행을 지연시키는 등 강경한 반대를 취했다. 자민당과 공명당, 민사당의 3당은 문민에 의한 별도의 조직을 만드는 것에 합의했으므로, PKO법안이 순조롭게 성립할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자민당의 본심은 자위대의 해외 파병을 목적으로 한 법안이었다. 그때문에 민사당과 공명당이 동의하자 곧 별도 조직안을 폐기했다. 이때문에 사회당은 PKO법안 자체에 반대했던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던 것이다.

민사당과 공명당은 자민당과 함께 내각신임안을 가결시키는 등 실질적으로는 여당이 되어있었다. 사회당은 모든 중의원 의원의 사직까지 고려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저항을 단념했으므로 PKO법안 반대파와 찬성파 쌍방에 나쁜 인상을 남겼다. 그리고 7월 26일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자민당이 승리해, 사회당은 대패했다. 집행부는 의석을 확보한 것에만 주목해 그런대로 나쁘지 않은 결과라고 항변했지만, 결국 다나베 집행부는 퇴진하고, 야마하나 사다오(山花貞夫)가 후임 위원장이 되었다.


호소카와 연립내각의 출범과 무라야마 내각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

1993년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70석을 확보해 대패했고, 도쿄 도에서는 11석에서 1석으로 격감하는 등, 도이 다카코 위원장이 일으킨 열풍으로 얻은 의석을 완전히 잃었을 뿐만 아니라, 55년 체제 이후 최악의 결과가 되었다.

총선거 후에는 야마하나 사다오가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으며,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가 위원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이어 자민당이 분열하면서 탄생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내각에 연립 여당으로 참여했다. 호소카와 총리가 퇴진한 후에는 신생당·공명당과 대립하면서 연립에서 이탈한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결국은 같은 구성으로 하다 쓰토무(羽田孜) 내각 참여에 합의했다. 그러나 총리 지명 이후, 연립 여당의 일원이었던 민사당이 사회당을 제외한 여당에 통일 회파의 결성을 호소하자 이에 크게 반발한 무라야마 위원장이 하다 내각에서의 이탈을 선언했다. 결국 소수 여당으로 하다 정권은 2개월만에 막을 내리게 되었다.

무라야마 도미이치 내각총리대신 임명의 사령

무라야마 총리 임명의 사령

1994년 6월, 연립여당은 자민당의 가이후 도시키(海部俊樹) 전 총리를 수반으로 옹립해 자민당의 분열을 노렸다. 하지만 자민당은 이에 대해 무라야마 도미이치 사회당 위원장을 수반으로 하는 연립정권의 수립을 결정하고, 사회당 또한 당수가 수반이 되는 것에는 저항하지 않았고, 가이후를 지지한 의원도 극히 드물었다. 정권 탈환에 적극적이던 자민당 또한 마찬가지였으므로, 결선투표를 통해 무라야마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이렇게 해서 자유민주당과 신당 사키가케, 일본사회당이 연립한 무라야마 내각이 발족했다.

사회민주당 로고

사회민주당 로고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총리로 취임한 직후의 국회 연설에서 안보조약을 긍정하고, 비무장 중립정책의 폐기 등을 표명했다. 이것은 이제까지 지속된 당노선에서 180도 변화한 것으로, 일방적으로 선언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당의 구심력이 떨어져, 분당이나 해산에 관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어 1995년의 참의원 선거에서 일본사회당이 크게 패하면서, 결국 1996년 1월 11일에 무라야마 내각이 총사직하게 되었다. 이어 1월 19일에 당의 명칭을 사회민주당으로 개칭하고, 3월에는 제1회 당대회를 개최해 일본사회당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군소정당으로 전락

중의원 선거제도가 소선거구제와 비례대표제를 함께 이용하는 것으로 변경되었고, 안팎의 사정도 달라져 1996년의 중의원 선거에서 사민당 단독으로 의석을 획득하는 것은 힘들다고 예상되었기 때문에, 신당 사키가케와의 합병이나 신당을 창당해 합류하는 것 등의 논의가 끊이지 않았다.

결국 간 나오토(菅直人) 등이 중심이 되어, 새 선거구에 의한 선거를 치르기 위해 실시된 중의원 해산 직전에 민주당을 결성하게 되었으며, 사민당은 민주당으로 참가하기로 했지만 곧 참가 의견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간사장이었던 사토 간쥬(佐藤観樹) 등을 포함하여 반 이상의 국회의원이 사민당을 떠나 민주당 결성에 참가하게 되었다. 또한 일부는 탈당해 신사회당을 결성하였다. 결국 남아있던 당대표 무라야마 도미이치는 선거를 앞두고 1996년 9월, 도이 다카코를 당수로 추대하고 10월 20일의 제41회 중의원 총선거에 임하게 되었다. 사민당을 지지하던 노동조합의 대부분은 민주당 지지로 돌아섰지만, 아직 지방조직의 상당수는 사민당을 지지하고 있었다.

결국 55년 체제 이후 제1야당의 자리를 고수하였던 사회민주당은 선거전의 70석에서 15석으로 의석이 급감하게 되었다. 이는 민주당의 52석보다 적은 숫자이며, 일본 공산당의 26석보다도 적은 숫자라 사실상 사회민주당이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사회민주당의 전개

2000년 총선거 당시 도이 다카코 선거 포스터

도이 다카코 포스터

일본사회당의 기반이었던 노동조합의 대부분이 민주당으로 옮겨간 후, 당수였던 도이 다카코는 자신의 생각에 공감하는 여성 시민운동가들을 적극적으로 선거 입후보자로 기용했다. 그녀들은 ‘도이 칠드런’으로 불리며 활약해, 2000년 중의원 총선거에서 사민당이 4석이 증가한 19석을 차지했다. 하지만 2001년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득표율이나 의석수 모두 큰 폭으로 감소해, 결과적으로 같은 해 열린 제7회 당대회에서 간사장으로 후쿠시마 미즈호(福島瑞穂), 정책심의회장으로 쓰지모토 기요미(辻元清美) 등 시민운동 출신이 당의 주요직을 맡게 되었다. 이후 자민당에 대한 저항성이 더욱 강해졌다.

2000년 총선거 당시 쓰지모토 기요미 선거 포스터

쓰지모토 기요미 포스터

2002년 3월에 시민파의 대명사라고 불리던 쓰지모토 기요미가 비서관 급여 착복 의혹으로 의원직을 사퇴하게 되었다. 이 사건이나 북조선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한 대응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지적이 강해져, 다지마 요코(田嶋陽子) 참의원 의원 등의 탈당까지 부른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2003년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의석이 6석으로 감소하게 되었으며, 당수였던 도이 다카코는 소선거구에서 낙선하고 비례구에서 겨우 당선되기까지 했다. 게다가 시민운동 출신의 의원들까지 이 여파를 받아 대부분이 낙선하게 되었다. 결국 도이 다카코 당수가 패배의 책임을 안고 사퇴하게 되었으며, 11월 15일에는 간사장으로 있던 후쿠시마 미즈호가 새 당수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간사장에는 노조 출신의 마타이치 세이지가 취임함으로써, 시민파의 영향력은 크게 감소하게 되었다.

2004년 6월 30일에 후쿠시마 당수는 ‘자위대는 위헌’이라는 견해를 표명했다. 그 해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당수인 후쿠시마 미즈호를 비롯해 단 2석을 획득해, 개선하지 않은 3석과 합쳐 총 5석을 차지하게 되었다.

2005년 2월 17일에는 재정난을 이유로 당직자들을 정리 해고할 방침을 직원단체에 통고했다. 직원단체는 정리 해고에 반대했지만, 당은 직무 태만 등을 이유로 들어 결국 3명을 해고하게 되었다. 해고된 3명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해고 무효 소송을 진행하였으나, 2007년의 1심과 2심 모두 당이 승소하였다. 이 사건은 노동자의 대표를 칭하는 정당에서 노동쟁의가 일어났다는 이유로 화제가 되었다.

2005년 8월 8일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총리가 우정 민영화 관련 법안이 참의원에서 부결된 것을 계기로 중의원을 해산하였다. 그러자 다음날인 8월 9일, 부당수로 있던 요코미쓰 가쓰히코가 탈당했고, 8월 17일에는 정책심의회장을 역임한 하마다 겐이치가 탈당을 표명하고 모두 민주당으로 이적했다. 두 사람은 8월 19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지만, 모두 지역구에서는 낙선하고, 비례구에서 요코미쓰가 당선되었다. 사민당은 탈당하고 있던 쓰지모토 기요미를 공천하여 오사카에서 출마하도록 했지만, 지역구에서 낙선하고 비례구에서 당선되었다. 그러나 집행유예 기간 중이었던 쓰지모토가 국회의원이 되는 것에 대한 비판도 강하다. 당의 얼굴이던 도이 다카코는 긴키 비례대표 5번으로 출마해 낙선했다. 선거 결과 5석에서 7석으로, 2석이 늘었지만 여전히 법안 제출권은 없는 군소정당이다.

후쿠시마 미즈호 사회민주당 당수

후쿠시마 미즈호 현 사민당수

2006년 2월 2일에 당본부에서 열린 상임간사회에서 자위대가 ‘현상 분명한 위헌상태’이며, ‘축소를 도모하여’, ‘비무장의 일본을 목표로 한다’는 내용을 포함한 ‘사회민주당 선언’이 제안되어, 2월 11일~2월 12일에 걸쳐 열린 당대회에서 이 방침을 포함한 ‘사회민주당 선언’이 정식으로 채택되었다. 이것은 1994년 일본사회당 시절의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밝힌 자위대의 합헌·용인 노선을 수정한 것으로, 지방에서의 토론을 거듭해 많은 당관계자로부터 제출된 의견을 채택한 것이다. 이와 함께 1993년에 정치개혁관련 4법안에 반대해 징계를 받은 17명 중 탈당한 사람을 제외한 9명의 처분을 취소해 명예를 회복한 것과 당수를 역임한 무라야마 도미이치와 도이 다카코가 명예 당수에 취임하는 일도 결정되었다.

2007년의 참의원 선거에서는 “헌법 9조와 연금이 위험하다! 이번에는 사회민주당에”를 캐치카피로 하고, 헌법과 연금을 중심으로 선거운동을 펼쳤지만 결과는 간사장 마타이치 세이지(又市征治)를 포함하여 2석을 확보하는데에 그쳤다. 그해 12월 22일의 제11회 당대회에서는 무투표로 후쿠시마의 세 번째 당수 선거 당선을 결정했으며, 차기 중의원 선거에서 10석 이상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방침을 밝혔다.


일본사회당의 역사적 역할

일본사회당이 분열되었다 다시 합친 1955년 이래 자유민주당과 함께 55년 체제의 한쪽 날개를 담당했지만, 결국 독자적으로는 정권을 취하지 못하고 쇠퇴했으며, 마지막에는 분열되어 상당수가 민주당으로 갈라졌다. ‘신선언’으로 노선을 전환하는 시도는 했지만, 결국 그에 기초한 정책과 운동방침은 ‘신선언’을 추진한 사람조차 제시하지 못했으므로, 독일 사회민주당처럼 노선전환을 통해 정권을 획득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또한 독일 사회민주당은 마르크스주의를 대신해 사회민주주의 이념을 구축하는데 끊임없이 노력해 당의 조직 개혁에도 힘을 쏟았지만, 일본사회당은 지도부가 형성한 사회주의협회등 사실상의 공산주의를 내건 좌파와, 그에 실망해 당을 떠난 에다 사부로 등 반공적이고 현실적 사회개혁을 목표로 한 우파의 충돌이나 친소련파와 친중국파의 대립등으로 이념의 구축이나 당조직 개혁등에는 거의 뜻을 두지 않았던 것을 뒤늦게 절감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일본에서는 중도좌파나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붕괴해, 서유럽의 사민주의 정당처럼 중도우파·보수주의 정당과 정권을 교대하는 세력으로는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고도 경제 성장으로 풍족해진 국민들에게 사회당이 내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또한 매력적으로 작용하지는 않았으며, 소련이나 동유럽의 사회주의 붕괴는 이미지 상으로도 그 매력을 완전히 잃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사회당은 본래 교조적인 사회주의를 대신해 일본에 맞는 사회주의를 구성했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를 실행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생명의 끝을 앞당긴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벌이었던 자민당의 분열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비자민 세력에서는 제1당인 사회당의 야마하나 사다오가 비자민 세력을 결집해 내각을 조직하는 책무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위한 어떤 정책 구상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야마하나나, 마찬가지로 어떠한 구상도 없이 절호의 호기를 살리지 못하고 호소카와 모리히로나 하다 쓰토무를 총리로 옹립한 사회당 또한 정권을 담당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내외에 알린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이것이 자민당을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를 요구하던 사람들의 기대를 실망으로 바꾸어 사회당의 끝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다 자민당과의 연립을 통해 무라야마 내각을 수립한 것은 오랜 지지자들마저 사회당에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도이 다카코마저 이에 반대하지 않고, 중의원 의장으로 자-사-사 연립내각에 협력해버렸으므로, 이후에 연립을 해소하고 자민당을 비판해도 설득력이 없는 것이다.

일본사회당의 존재는 전쟁 이후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평화를 유지하며, 노동자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고, 사회복지를 진전시키는 등의 역할을 완수해 일본이 안정적인 사회발전을 이룰 수 있는 기초를 만드는데 기여했다는 견해도 있다. 또한 비무장 중립론을 내건 사회당의 존재 덕분에 자민당이 미국에 대해 과도한 군사력 증강을 요구할 수 없었으며, 경무장 노선을 계속하게 되었다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55년 체제는 결국 자민당과 사회당이 지지단체의 권익 배분에 노력하게 만든 공생 시스템이었다는 측면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55년체제 말기에는 일본사회당이 안이하게 노조에 의존해, 독자적인 지지세력의 확립을 더욱 등한시하는 바람에 단순히 노조의 이익 대변자로 전락한 것은 유권자가 일본사회당에서 멀어지는 요인이 되었다.


참고문헌

  • 월간 사회당 편집부, 『일본사회당의 30년』, 일본사회당 중앙본부 기관지국, 1975년 11월.
  • 일본사회당 결당 40주년 기념 출판, 『자료 일본사회당 40년사』, 일본사회당 중앙본부, 1986년 7월.
  • 일본사회당 50년사 편찬위원회 편, 『일본사회당사』, 사회민주당 전국연합, 1996년 9월.
  • 우에즈미 미쓰히로(上住充弘), 『일본사회당흥망사』, 지유샤(自由社), 1992년 9월.
  • 나고시 다케오(名越健郎), 『크레믈린 비밀문서는 말한다 - 감춰진 일소 관계사 - 』, 주오코론신샤(中央公論新社), 1994년 10월.
  • 하라 요시히사(原彬久), 『전후사의 중심의 일본사회당 - 그 이상주의는 어떠한 것인가』, 주오코론신샤, 2000년 3월.
  • 야마구치 지로(山口二郎)·이시카와 마스미(石川真澄) 편, 『일본사회당 - 전후 혁명의 사상과 행동』, 니혼케이자이효론샤(日本経済評論社), 2003년 10월.
  1. <A href="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japan/142604.html" target=_blank>CIA, 일 야당분열 ‘비밀공작’ 폈다</A>, 한겨레신문 2006년 7월 19일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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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년 체제는 일본에서 1955년 이후 여당인 자유민주당과 야당인 일본사회당의 양대 정당 구조가 형성된 체제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1993년에 붕괴되었다고 한다.

정치학자 마스미 준노스케가 1964년에 발표한 논문 〈1955년의 정치체제〉(《사상》(思想) 1964년 4월호)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무산정당이 합법화 되면서 일본사회당이나 일본공산당 등이 성립하는 한편, 보수정당도 난립하게 되었다. 일본사회당은 1951년에 대일강화조약과 미일안전보장조약, 일명 안보에 대한 태도가 다른 좌파와 우파가 나뉘어지게 되면서, 각각 세력 확장에 매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사회당의 분열은 보수정권의 역코스나 개헌 논의에 대항하기 위해 ‘호헌과 반안보’라는 깃발아래 1955년에 다시 합치게 되면서, 세력 확장에 힘을 기울였던 좌파와 우파를 합친 세력은 일본의 최대 정당으로 부상하였다.

이러한 움직임에 위기감을 느낀 재계는 일본민주당과 자유당 등의 보수 세력의 결집을 요청하였고, 결국 보수 세력의 연합체인 자유민주당이 결성되었다(보수합동).

‘개헌·보수·안보수호’를 내건 자유민주당과, ‘호헌·혁신·안보철폐’를 내세운 일본사회당의 양대 정당이 출범하면서 일명 55년 체제가 탄생했다(1955년에 성립한 체제이므로 이후에 55년 체제라고 불리게 되었다).

1955년 당시의 국제 정세는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냉전 체제가 기본 골격을 이루고 있었으므로, 55년 체제도 일본의 냉전과 같은 정치구조를 지적한다는 의견도 있다.

자유민주당은 헌법이 강요되었다는 주장 하에, 자주 헌법의 제정을 당의 기본 방침으로 정했다. 1958년의 제28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서로 과반수에 내는 후보를 세워 정면으로 경쟁했다. 이 선거의 투표율 76.99퍼센트는 남녀 보통선거 실시 이후의 일본 최고의 기록이며, 양대 정당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총 467명 중 자유민주당이 287석을, 일본사회당이 166석을 획득해 양대 정당이 97퍼센트의 의석을 차지했다. 그러나 사실은 자유민주당의 압승으로, 일본사회당은 7석이 늘었지만 개헌저지선인 3분의 1을 차지한 것에 머물렀다.

이처럼 양대 정당이라고 해도 선거나 국회에서는 양 당의 비율이 2대 1이었다. 그 때문에 ‘1과 2분의1 정당제’라는 표현이 나타났다. 보수와 혁신의 비율이 2대 1으로 나타난 것은 1947년에 보수 세력이 분열되면서 일본사회당이 제1당으로 부상한 제23회 중의원 총선거에서도 이미 나타나 있었다.

55년 체제는 일본사회당이 정권을 취하지 못하고, 자유민주당은 헌법 개정을 위한 3분의 2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정권 교체와 헌법 개정이 없는 체제에 해당한다.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민들에게 신헌법이 정착되고, 자유민주당의 의원도 개헌에 신경쓰지 않는 의원이 주류가 되었다. 이를 통해 보수 본류로 불리는 의원들을 중심으로 안전보장면에 있어서 미국에 의존하고, 국방 예산을 경제 정책으로 돌리는 정책이 채용되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호헌과 반안보’를 내세운 일본사회당은 그 정체성이 희미해지게 되었다.

사회적으로도 안보 체제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1960년대에, 일본사회당은 이탈리아공산당에서 유래한 구조개혁론을 도입하기도 했지만, 의회를 경시하고 사회주의 혁명에 사로잡힌 좌파에 의해 배격되었다. 결국 ‘호헌과 반안보’를 계속해서 고집하는 좌파 주도의 일본사회당은 그 지지기반을 상실하기 시작했다.

그뿐 아니라 주요 지지기반이 좁아지면서 결국 노동조합이 주류가 되었고, 1960년대말부터는 선거에서 줄곧 후보자를 줄이는 대책을 세우게 되었다. 정권 획득의 의욕을 보이지 않고, 선거때마다 세력을 줄인 이러한 경향은 ‘장기 저락 경향’이라고 불린다. 게다가 민사당과 일본공산당의 성장, 공명당의 결성 등으로 야당이 분열되면서, 자유민주당에 대적할 수 있는 정당은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자유민주당도 세력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일본사회당 또한 세력은 늘지않고 줄기만 했다. 게다가 공산주의의 현실이 드러나면서, 사회주의에 대한 국민의 기대감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도 세력 감소에 박차를 가했다.

자유민주당의 일당 독재가 무너지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오직(汚職) 사건이 속출하면서 정치에 대한 불신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다나카 가쿠에이가 자유민주당 내의 파벌간의 세력 균형을 무너뜨리면서, 자유민주당 내에도 혼란이 가속화되었다. 게다가 버블경제의 붕괴와 그에 따른 불황, 그리고 끊이지 않은 정치에 대한 불신이 자유민주당의 지지를 하락시켰다.

일본사회당은 도이 다카코를 중심으로 하는 마돈나 선풍, 도이 칠드런의 등장 등으로 일시적으로 세력을 확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다시 장기적인 저락에 돌입했다. 자유민주당의 지지율 감소에도 불구하고, 증가하지 않는 일본사회당의 낮은 지지율은 자체적인 불만과 무력감을 높였고, 결국 그는 다시 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증가를 낳았다.

1988년의 리쿠르트 사건이나 1992년의 도쿄사가와큐빈 사건 등으로 정치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고,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의 정치개혁 법안에 반대하는 자유민주당 의원이 대량으로 탈당하면서 하다 쓰토무·오자와 이치로 등이 신생당을 결성하고, 다케무라 마사요시는 신당 사키가케를 결성했다. 그 결과 1993년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은 의석이 대폭 감소했고, 일본사회당 또한 참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자유민주당의 탈당자를 중심으로 한 신생당·신당 사키가케·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일본신당, 공명당, 민사당이 약진하면서 자유민주당을 기반으로 하는 미야자와 기이치 내각은 총사직하게 되었다. 야당은 호소카와 모리히로를 총리로 옹립하는 것에 합의하고, 자유민주당과의 연계를 모색한 일본사회당과 신당 사키가케도 수락하여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로써 ‘55년 체제’는 정식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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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1944년 1월 14일 ~ ) 는 일본의 중의원 의원으로, 니가타 현 출신이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의 장녀로, 가쿠에이 총리 재임 당시 모친이 병약하였으므로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와세다대를 졸업했으며, 제130대 외무대신과 제54대 과학기술청 장관을 역임하였다.

아버지였던 다나카 가쿠에이와 비슷한 성격으로, 정치의 움직임을 짧으면서도 재미있게 표현한다. 유권자 앞에서 자신의 방식으로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이 여성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게하는 요인이 되었고, 또한 그에게서 아버지였던 가쿠에이의 모습을 찾으려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논리적인 정책 비판이나 자신의 신념에 근거한 이념이나 정책이 결여되어 있다는 지적도 있다. 또한 정치에서 언변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다른 정치인과 비교해 단순한 비난이나 인격적인 공격이 두드러진 점이 많은 것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텔레비전 프로듀서 테리 이토(テリー伊藤)는 그를 두고 ‘정치만담가’라고 칭한 적이 있다. 정치가에게 필요한 확고한 이념이나 정책, 지도력, 설득력 등이 모자란다는 지적이 많다.

니가타 현 주에쓰 지방의 기업 에치고 교통 그룹의 오너이다. 선거에서 에치고 교통의 영업소는 선거 정보 수집이나 표밭 다지기 등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이는 아버지였던 다나카 가쿠에이가 구축한 것을 계승한 것이다. 또한 다나카 마키코의 대외적인 호오(好惡)는 아버지의 영향을 매우 크게 받았는데, 아버지를 배신한 다케시다 노보루(竹下登)의 파벌에 있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민주당과 연합하고 있지만 민주당의 의원을 날카롭게 비판할 때도 있다. 자민당 탈당 이후에는 고이즈미 저격수로 활약하면서, 그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일이나 “독도는 일본영토”라고 한 발언을 비판하기도 했다.

외무대신 재임 당시에는 내각과 자신의 방침에 저항하는 관료를 교체하고, 정치가 주도하는 움직임을 만들고자 했다. 지식의 습득을 위해 원자력 정책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서 관료의 브리핑을 적극적으로 받았다고 한다.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총리 취임을 전후로, 그의 부친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와 다나카 마키코의 부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펼쳤던 이른바 가쿠후쿠(角福) 전쟁을 방불케하는, 후쿠다 야스오와 다나카 마키코 또는 다나카 파였던 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간의 제2의 가쿠후쿠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각주:1] 다나카 마키코는 또한 거의 모든 각료가 유임한 후쿠다 내각을 두고 ‘아베 야스오 내각’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각주:2].

  1. <A href="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892754" target=_blank>후쿠다의 일본 (下) 35년 앙숙 … 최후의 `가쿠후쿠 전쟁`</A>, 중앙일보 2007년 9월 22일자. [본문으로]
  2. <A href="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2912380" target=_blank>다나카 전 외상 `현 내각은 아베 야스오 내각`</A>, 중앙일보 2007년 10월 13일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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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와 이치로(小沢一郎, 1942년 5월 24일 ~ )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3선 중의원 의원이다.

제34대 자치대신, 제44대 국가공안위원장, 자유민주당 간사장, 신생당 대표간사, 신진당 당수, 자유당 당수, 민주당 대표 등을 역임하였다.


성장기


도쿄 시(현 도쿄 도 다이토 구)에서 변호사이자 도쿄 부의회 의원이었던 아버지 오자와 사에키와 어머니 오자와 미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도쿄 도립 고이시카와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가 되기 위해 도쿄대학을 목표로 2년간 공부했지만, 아버지의 급서로 단념하고 게이오기주쿠대학 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정치 입문 이후

아버지가 급서한 후 사법시험 공부를 위해 입학한 니혼대학 대학원에 재학중이던 1969년, 중의원 선거에 당시 이와테 2구에 자유민주당의 공천으로 입후보하여 27세의 젊은 나이로 당선되었다. 당시 선거를 지휘하던 사람이 간사장이던 다나카 가쿠에이로, 이후 오자와는 다나카의 파벌에 들어가 그의 지도를 받는다.

총무국장과 중의원 의원운영위원장을 지내고, 제2차 나카소네 내각 제2차 개조내각에서는 자치대신 겸 국가공안위원장을 지낸다. 그러나 록히드 사건으로 당적을 이탈했음에도 불구하고 파벌의 영수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하던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반기를 들고 다케시타 노보루, 가네마루 신 등과 함께 연구회 ‘소세이카이’(創政会)를 결성하고 이후 다케시타의 파벌로 독립한다. 다케시타 내각 발족 이후 오자와는 당과 정부의 요직을 지내 다케시타 파의 주요한 인물이 된다.

제1차 가이후 내각에서는 당 간사장에 취임하고, 자유주의 체제의 유지를 명목으로 경제단체연합회 산하의 기업에서 선거자금으로 3백억 엔을 모으고 제39회 중의원 선거에서 승리하는 등의 실적을 올렸다.

걸프 전쟁 당시에 자위대를 파견하는 것에 대해 국회에서 공명당의 협력을 위해 도쿄 도지사 선거에서 신인을 공천했지만, 낙선하여 그 책임을 지고 간사장을 사임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파벌의 2인자 자리를 차지하고, 가네마루(金丸)와 다케시타(竹下)와 함께 ‘곤치쿠쇼’(金竹小)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나 이후 가네마루가 오자와에게 파벌의 흐름을 옮기려는 시도를 하면서 다케시타와의 마찰이 깊어지게 되었다.

1991년에는 정치개혁 법안이 국회에서 폐안이 된 것을 두고 가이후 도시키 수상이 중의원 해산의 뜻을 담은 발언을 하였다가 당내의 반발을 초래해 총사직하게 되었다(이른바 가이후 오로시). 이후 가네마루가 후임 총리로 취임하도록 설득하고, 여러 의원들도 그를 총리로 옹립하고자 하였지만 당시 49세였던 오자와는 지나치게 젊다는 이유로 이를 고사했다. 또 6월에는 협심증으로 쓰러지면서 건강불안설도 나왔다.

1992년에 도쿄사가와큐빈 사건을 두고 가네마루가 여론으로부터 강력한 비판을 받고 파벌회장을 사임하고 의원직을 사임했다. 오자와는 그 후임으로 가네마루와 가까웠던 의원들과 함께 하다 쓰토무를 옹립해, 다케시타 직계의 오부치 게이조를 추대하려던 하시모토 류타로 등과 대립하게 된다. 당초 중립이었던 다케시타는 스스로 오부치의 지지를 결정하면서, 후임 회장은 오부치로 내정되었다. 이에 오자와는 일부 의원들과 ‘개혁포럼 21’을 결성해 하다 파로 독립하게 된다.

미야자와 내각 개조내각에서 하네다 파는 경제기획청 장관과 과학기술청 장관의 두 자리만이 배정되었고, 간사장마저 오부치 파의 가지야마 세이로쿠가 취임하면서 하네다 파는 비주류로 전락했다. 이에 대해 오자와는 주류 파벌을 ‘수구파’로, 자신을 ‘개혁파’로 칭하고 지론이었던 정치개혁의 실현을 전면에 내세웠다.


자민당 탈당과 신생당 시대

야당에서 미야자와 내각에 대한 불신임안이 상정되자, 1993년 6월 18일 하다 파와 오자와 파의 의원 39명이 찬성하고, 16명이 결성하는 이른바 반역으로 불신임안이 255 대 220으로 가결되면서 미야자와 내각이 해산하게 되었다. 6월 21일에는 다케무라 마사요시 등이 자민당을 탈당하고 신당 사키가케를 결성했으며, 이는 하다 파와 오자와 파의 의원들이 탈당을 결단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6월 23일에는 하다 파와 오자와 파가 탈당해 신생당을 결성하고, 오자와는 대표간사로 취임했다.

7월 18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의 과반수가 무너지고, 신생당과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가 약진했다. 자민당의 미야자와 총재의 후임으로는 고노 요헤이가 선출되었다.

오자와는 총선거 직후부터 일본신당의 대표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비공식회담을 가지고, 이후 8월 9일에는 8당 연립의 호소카와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호소카와 정권에서 오자와는 내각과는 별도로 여당의 기관인 ‘연립여당 대표자회의’를 가져 공명당 서기장 이치카와 유이치와 정권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고, 내각관방장관으로 관저 주도를 구상하던 신당 사키가케의 대표 다케무라 마사요시와 격렬하게 대립했다.

1994년 2월 3일, 호소카와 당시 총리는 부가세를 폐지하고 7퍼센트의 ‘국민복지세’를 창설하려는 구상을 발표해 여론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혔다. 호소카와 총리는 이후 국민복지세 구상을 철회했지만, 이후 연립여당간의 대립이 첨예화되면서 4월에 호소카와 총리는 사의를 표명했다.

갑작스런 호소카와 총리의 사직에, 오자와는 자민당의 와타나베 미치오와의 제휴를 시도했지만, 와타나베가 탈당을 거부하면서 구상이 좌절되고 연립여당은 하다 쓰토무를 후임 수반으로 내정하는 것에 합이한다. 그러나 1994년 4월 25일에 신생당과 일본신당, 민사당 등이 사회당을 제외한 형태로 통일 회파(교섭단체) ‘가이신’(改新)을 결성하면서 일본사회당의 반발을 초래했다. 결국 사회당은 4월 26일에 연립 정권에서 이탈하고, 4월 28일에는 소수여당 내각 하다 내각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오자와와 하다 간에 미묘한 마찰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하다 내각은 1994년도 예산을 성립시켰지만, 소수여당의 해소를 노린 연립여당과 사회당 사이의 정책합의가 결렬되고, 자민당은 내각불신임안을 중의원에 제출하였다. 당초는 중의원을 해산하는 방향으로 구상되었지만, 결국 총선거를 단념하고 6월 25일에 내각이 총사직함으로써 하다 내각은 총 64일간의 단명 정권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가이후 도시키는 이후 하다의 후임을 노렸지만, 1994년 6월 29일의 수반지명선거에서 자민당은 사회당 위원장 무라야마 도미이치에게 투표하기로 결정하면서 가이후는 자민당을 탈당해 ‘자유개혁연합’을 결성하고 연립여당의 총리 후보가 되었다. 그러나 결선투표에서 261 대 214로 무라야마 위원장이 당선되면서, 오자와는 처음으로 야당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신생당 내에서는 오자와의 책임을 추궁하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구 연립여당을 규합해 새로운 세력의 결성을 위해서는 오자와의 힘을 필요로 했다. 같은 해 9월 28일에는 일본공산당을 제외한 야당 187명의 의원이 모여 중의원 회파 ‘가이카쿠’(改革)를 결성했다. 같은 날 중의원 의원 186명과 참의원 의원 39명, 총 225명의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신당준비회’가 정식으로 발족하고, 실행위원장으로 오자와가 선출되었다.


신진당 시대

오자와를 중심으로 하는 신당 결성은 12월 10일의 신진당의 결성으로 결실을 맺었다. 오자와는 당수로 가이후를 옹립하고, 간사장으로 취임했다.

신진당은 1995년 7월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개선 의석 19석을 크게 넘는 40석을 획득하였다. 같은 해 12월의 당수 선거에 스스로 입후보하기로 한 오자와는 오래된 맹우인 하다와 격돌하게 된다. 오자와는 하다를 꺾고 후임 당수로 당선되었지만, 선거 직후 투표자 명부가 파기되는 등 선거 결과가 불명확해 당 내에는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1996년 10월 20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부가세율의 유지와 18조 엔의 감세를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4석을 잃은 156석을 획득하면서 사실상 패배하였다. 총선거의 패배로 당 내의 반발이 격심해지면서 탈당자가 속출했다. 하다 쓰토무와 호소카와 모리히로 등은 비주류파를 구성하고, 1996년 12월 26일에는 하다를 비롯한 국회의원 13명이 탈당해 태양당을 결성했다. 오자와는 당시 자민당의 가메이 시즈카 등과 제휴하여 이른바 ‘보보 연합’(保保連合) 노선을 구상했지만, 신진당 내에서 이러한 노선을 두고 반대파가 나타나게 되어 가노 미치히코는 당 내에서 연구회 ‘개혁회의’(改革会議)를 결성했다.

1997년 12월 18일의 당수 선거에서 가노를 꺾고 오자와가 당선되었지만, 선거 전에 공명당이 차기 참의원 선거에서 독자적으로 싸울 방침을 결정하면서 양 당의 관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오자와는 이후 당내 세력에 해산을 요구하고, 12월 25일에는 신진당의 해산과 신당 결성을 발표했다. 해산이 결정된 신진당은 이후 격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자유당 시대

1998년 1월 6일에는 자유당이 결성되고, 오자와가 당수에 취임하였다. 당초에는 100명 이상의 국회의원이 모일 것이라고 기대되었지만, 막상 결성이 되자 중의원 의원 42명과 참의원 의원 12명의 총 54명이 참가하는 것에 머무르면서 제1야당의 자리를 민주당에 내주게 되었다.

7월 12일의 제18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고전할 것이라고 전망되었지만, 오자와의 인기를 몰아 비례대표로 514만 표를 얻어 총 6석을 획득해 선전했다. 참의원 선거 이후의 임시국회에서는 민주당의 대표 간 나오토를 야당 통일 후보로 정하고, 참의원에서 자민당의 오부치 게이조를 꺾고 간 나오토가 총리로 지명되었다. 다만 중의원 우월의 원칙에 따라 간 나오토 대신 오부치가 수상으로 취임했다. 오자와는 참의원에서 야당의 연대를 통해 정부를 공격하고자 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1998년 10월에는 내각관방장관이던 노나카 히로무와 회담을 가지고 연립 교섭을 시작했다. 11월 19일에는 오부치 수상과 양 당간의 연립 정권에 합의하고, 199년 1월 14일 정식으로 연립 정권이 성립하면서 오자와는 5년만에 여당으로 복귀하게 되었다.

1999년 7월, 공명당이 연립 정권에 참여하면서, 자민당과 공명당만으로 참의원의 과반수를 차지하게 되었으므로 자유당의 존재감은 저하되었다. 자민당과 자유당의 선거 협력도 좀처럼 진행되지 않았고, 오자와는 자민당의 오부치 총리에게 양 당의 해산과 새로운 보수 정당의 결성을 요구했다. 2000년 4월 1일에는 회담을 가졌지만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결국 연립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 직후 오부치는 뇌경색으로 쓰러지게 된다.

자유당은 오자와를 지지하는 연립 이탈파와, 연립 잔류파로 분열되고 잔류파 국회의원 26명은 보수당을 결성하게 된다. 분리된 보수당은 자유당측에 정당보조금의 분할을 위해 분당 처리를 요구했지만, 자유당이 거부하면서 탈당한 것이 된 보수당은 보조금 없이 총선거를 맞이하게 되었다.

2000년 6월 25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도 고전이 예상되었지만, 비례대표에서 약 660만 표를 얻으면서 총 22석을 획득하게 되었다. 보수당은 7석으로 대패했다.

같은 해 7월 29일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고이즈미 준이치로의 높은 인기로 자민당에는 순풍이 불고, 오자와 왕국으로 불리던 참의원 이와테 선거구에서도 근소한 차로 이기는 고전을 겪게 된다. 의석수는 전과 같은 6석이었지만, 비례대표는 420만 표로 감소했다.


민주당 시대

2002년, 당시 민주당의 대표였던 하토야마 유키오는 당내의 구심력을 강화하기 위해 야당의 결집을 필요로 했고 오자와에게 접근했다. 당시 오자와 또한 자유당의 지지층 약화 등으로 독자 선거에서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으므로, 두 사람의 결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토야마는 민주당과 자유당의 합병을 위한 협의를 진행하기로 발표했지만, 당 내에서 조정이 불충분했고 오자와에 대한 거부반응도 있어 협의는 좌절되고 하토야마 또한 사임하게 되었다. 그러나 후임으로 선출된 간 나오토 또한 하토야마의 노선을 이어 양 당의 합병을 추진했고, 당명과 강령·임원을 민주당의 체제 대로 유지하는 선에서 합당이 결정되었다.

2003년 9월 26일, 자유당이 민주당과 정식으로 합치고 오자와는 당대표 대행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2003년 11월 9일의 중의원 총선거에서는 민주당이 정권교체의 열망을 안고 40석이 증거한 177석을 획득했다.

합병 이후 오자와가 처음으로 손을 잡은 사람은 구 일본사회당 계열의 요코미치 다카히로였다. 두 사람은 안전보장 정책에서 일치하면서 두 세력의 행동은 가까워졌다. 또한 오자와는 야당 결집을 위해 사민당이 민주당에 합류할 것을 호소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2004년 5월, 연금미납 문제로 인한 혼란의 책임을 지고 간 나오토가 사임하면서 후임 대표로 내정되었다. 그러나 직후에 오자와 또한 국민연금이 강제 가입 제도가 된 1986년 이전에 미가입이었다는 이유로 취임을 사퇴하면서, 간사장이던 오카다 가쓰야가 대표로 취임했다.

같은 해 7월 11일의 참의원 통상선거에서는 정부와 여당의 연금 법안이 쟁점이 되고, 이에 반대한 민주당에 순풍이 불어 선거구와 비례대표에서 50석을 획득해 자민당의 획득 의석보다 1석 많은 승리를 얻었다. 오자와는 선거 이후 오카다의 요청에 따라 당 부대표에 취임한다.

2005년 9월 11일, 우정민영화를 쟁점으로 하는 중의원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60석 이상을 잃는 참패를 당하면서 오카다 대표 또한 사의를 표명했다. 이후 당 대표 선거에서 마에하라 세이지가 선출되었고, 오자와는 대표 대행에 취임할 것을 요청받았지만, 오카다 집행부의 부대표이자 총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이를 고사했다.


민주당 대표

2006년 3월 31일에 마에하라 대표가 호리에 메일 문제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자 오자와는 기자회견에서 “앞장서서 당을 재생해 정권 교체의 횃불를 밝히는 결의”라며 후임 대표 선거에 출마할 것을 표명했다. 오자와의 선출을 예상한 여러 여론조사의 결과와 마찬가지고, 4월 7일의 대표 선거에서 오자와는 상대 후보였던 간 나오토를 큰 차이로 따돌리고 대표로 당선되었다. 오자와는 당 안팎에 당의 결집을 어필하기 위해 선거의 상대 후보였던 간 나오토를 대표 대행으로, 하토야마 유키오를 간사장으로 선임하는 트로이카 체제를 구축했다.

오자와가 대표로 취임한 직후에 치뤄진 4월 24일의 중의원 지바 7구 보궐선거에서는 메일 문제의 역풍으로 민주당 후보의 당선이 힘들다는 예상이 있었지만, 근소한 차이로 승리했다.

5월 9일에 회견을 가지고 중의원 본회의를 자주 결석하는 것에 대해 ‘(의사의 충고를 지켜) 식후에 바로 일을 하는 등의 일은 삼가고 있다’며 자신의 몸 관리를 이유로 든 것에 대해 ‘의회 경시’라는 강한 비판을 받았다. 또한 건강 상태를 이야기한 것에 대해 여러가지 추측이 나돌았다. 9월 25일에는 임시 당대회에서 정식으로 대표로 재선된 후 협심증 발작 징후를 느끼고 입원해 검사하기도 했다. 10월 5일에 퇴원한 오자와는 동맥경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 핵실험 직후 동북아 정세를 두고 일본이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있는지, 이른바 〈주변사태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를 둘러싸고 오자와 이치로를 중심으로 하는 트로이카 체제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견해를 발표했다. 그러나 마에하라 전 대표를 비롯한 당내 일각에서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었고, 또한 민주당의 외교·방위 부문은 ‘오자와 대표의 트로이카 체제의 견해는 민주당의 공식견해가 아니다’라고 발표해 이를 둘러싼 민주당 내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다. 오자와는 “핵무장 논의를 용인하면 ‘(핵무기의 보유, 제조, 수입을 하지 않기로 한) 비핵3원칙을 지킨다’는 말도 국민이나 국제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일부 보수층은 2002년 당시 자유당 당수로 있던 오자와가 일본의 핵보유능력을 두고 “일본은 하루아침에 몇천 발의 핵탄두를 가질 수 있다”고 발언한 것과 비교하여 비판했다.

오자와는 자유당 시대부터 방위청이 ‘성’(省)으로 승격할 것을 주장했으며, 실제로 승격시에도 “국방의 소임을 맡은 기관이 내각부의 한 외국(外局)으로만 있는 상태는 좋은 것이 아니다”라고 진술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여전히 이를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었으므로 중의원 안전보장위원회에서 이를 심의할 때는 결석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오자와 대표의 최종 결단에 따라 법안에 찬성으로 선회했다.

11월의 후쿠시마 현지사 선거에서는 사민당,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에서는 공산당 및 사민당과 공동으로 투쟁했다. 후쿠시마 현지사 선거에서는 여당의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지만, 오키나와 현지사 선거에서는 패배하면서 민주당과 다른 정책과 지지층을 가진 정당과 연합했음에도 진 것을 두고 야당 공동 투쟁의 목적에 대해 다시 검토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7년 참의원 선거의 전초전이라고 불린 2007년 2월 4일의 아이치 현지사 선거와 기타큐슈 시장 선거가 시행되었다. 아이치 현지사 선거에서는 아쉽게 패했지만, 기타큐슈 시장 선거에서는 야당의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러한 결과는 야나기사와 하쿠오 후생노동상이 “여성은 애낳는 기계”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오자와 대표가 야나기사와 후생노동상이 사임하기 전에는 법안을 심의할 수 없다는 전술을 주도하고, 사임을 유도하는데에는 실패했지만 이를 쟁점화하는데 성공한 것이 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4월 8일의 통일지방선거에서는 이와테 현지사 선거에서 ‘오자와 칠드런’의 대표로 불리는 닷소 타쿠야가 출마해 2위 후보와 3배 가까운 차이를 벌리며 압승하여 오자와 왕국의 건재를 과시했다.

제21회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할 것이라고 전망한 오자와는 7월 8일, 선거에서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할 때에는 “야당의 대표를 언제까지 맡고 있어도 어쩔 수 없다”며 대표직을 사임하고 정계를 은퇴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통해 자신의 책임을 명확히 하고, 참의원 선거에서 패하더라도 사직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향을 비친 아베 신조 총리에 대한 비판과 차별화에 성공하면서 민주당의 승리가 강고해졌다.

7월 29일에 시행된 참의원 통상선거에서 민주당은 60석을 획득하면서 참의원 제1당으로 부상하고, 야당 전체는 과반수를 획득했다. 이 선거에서 오자와의 비서 30명 이상이 1인구를 중심으로 격전지에서 선거의 전술을 지도하였고, 오자와의 탁월한 선거 전술을 유감없이 발휘한 선거가 되었다.

아베 신조 총리가 사의를 표명하자 자민당은 후임 총재로 후쿠다 야스오를 선출했다. 9월 25일의 내각총리대신 지명선거에서 중의원은 후쿠다를, 참의원은 오자와를 지명하면서 양 원의 지명이 엇갈리게 되었다. 이후 타협점을 찾지 못해 중의원의 의결이 우월하다고 규정한 헌법에 따라 후쿠다가 총리로 취임하게 되었다. 양원의 지명이 다른 것은 오부치 게이조 내각에서 민주당의 간 나오토가 총리로 지명된 이래 9년만이며, 역대 4번째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계열이었던 오자와 이치로와 후쿠다 야스오의 대결은 ‘제2의 가쿠후쿠 전쟁’이라고도 불리지만, 본인들은 그런 생각을 전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지 않아 오자와 대신 후쿠다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다나카 마키코 쪽을 지적하는 견해도 있다.

2007년 11월 2일, 오자와 민주당 대표는 자민당의 후쿠다 야스오 총재와 회담하였고, 이 때 연립정권에 대한 제안이 있었으므로 당으로 돌아와 임시임원회에 상의했다. 그러나 임원회에서 대연립정권에 대한 강한 반대에 부딫히면서 2시간 후에 연립을 거절하였다. 이때 아사히 신문과 닛케이를 제외한 여러 언론에서 오자와가 후쿠다 총리에게 대연정을 제안했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오자와는 이에 대해 “일부 언론에 의한 민주당에 대한 이유없는 중상모략 보도로, 여론 조작”이라고 비판하며, “나는 대연립 제안을 일체 하지 않았다”고 발언해 이 건에 대해 부정하고 있다.[각주:1]

오자와 대표는 2007년 11월 4일에 이 대연립 구상을 둘러싼 당내의 반발의 목소리를 수렴해, 이에 책임을 지고 대표직을 사임하는 의사를 표명했다.[각주:2] 그러나 정계에서 대표직 유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대두되면서, 오자와는 11월 6일에 “창피한 일이지만, 여러분의 뜻에 따라 부디 한 번 더 열심히 하고 싶다”며 대표직 속투를 표명하였다.


평가

다나카 가쿠에이의 장남 - 1942년에 태어난 오자와가 5세로 죽은 다나카의 장남과 동갑이었으므로, 다나카는 오자와를 아들처럼 귀여워했다.

가네마루 신은 오자와와 하다 쓰토무, 가지야마 세이로쿠 세 사람을 두고 “평시의 하다, 난세의 오자와, 대난세의 가지야마”라고 평했다.

이시하라 신타로는 “나는 그(오자와)를 평가하지 않는다. 저 사람처럼 미국이 하라는 대로 한 사람은 없다.”고 평했다. 주위에서는 오자와가 도호쿠 지방 출신의 기질을 가지고 있어 순진하고 말재주 없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때문에 설명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여 측근이 떨어져나가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있다. 오자와는 이를 두고 “떠나는 이 잡지 않고, 오는 이 막지 않고”라고 말한 바 있다.

당 내외의 오자와 알레르기는 오래된 의원에게서 강하다. ‘독단적이고, 측근정치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거나 자민당의 분열과 이후의 분열 공작, 신진당의 분열과 해산 등이 주 비판 대상이 된다.

자민당 간사장 시절에 숙취로 전국간사장회의에 불참하거나, 선거에서 질 것 같으면 선거 지휘를 포기하고 외유에 나가기도 했으므로 ‘워스트1간사장’이라는 평가도 있다.
  1. <A href="http://www.dpj.or.jp/news/files/19.11.4kougi.pdf" target=_blank>오자와 이치로 중상보도에 엄중히 항의하다</A>, 민주당, 2007년 11월 4일.; <A href="http://www.asahi.com/politics/update/1104/TKY200711040096.html" target=_blank>오자와씨 ‘혼란에 매듭’ ‘보도에 분노’라고도 회견 전문</A>, 아사히 신문, 2007년 11월 4일자. [본문으로]
  2. <A href="http://www.dpj.or.jp/news/dpjnews.cgi?indication=dp&amp;num=12145" target=_blank>오자와 대표가 사직서를 제출, 집행부에 진퇴를 일임</A>, 민주당, 2007년 11월 4일.; <A href="http://www.asahi.com/politics/update/1104/TKY200711040051.html" target=_blank>오자와씨가 대표사임의 의향표명 “정치적 혼란의 매듭”</A>, 아사히 신문, 2007년 11월 4일자.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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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12일 오전 2시 16분 현재 개표 종료

자민당 296석 + 공명당 31석 = 여당 327석
민주당 113석 + 사민당 6석 + 공산당 10석 + 국민신당 4석 + 신당일본 1석 + 기타 19석 = 야당 153석

으로 집권당인 자민당이 단독으로 과반수인 240석을 훌쩍 넘겼습니다. 또한 자민당+공명당 의석이 2/3에 해당하는 320석을 넘겨 개헌선을 확보했습니다.

사민당은 오키나와 2구에서 테루야 칸토쿠씨가 당선된 것이 지역구의 전부이며, 나머지 5석과 공산당의 10석은 전부 비례의석입니다. 민주당은 지역구 52석, 비례구 61석을 획득했습니다.

자민당은 소선거구 219석, 비례구 77석을 획득했으며 치바현 등의 지역구에서 거의 대부분을 싹쓸이 해가는 현상을 보여줬습니다. 공명당은 지역구 8석, 비례구 23석입니다. 처음에 예상된 자민당 300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296석을 확보해 과반수를 훌쩍 넘어섰을뿐만 아니라 우정개혁이라는 전략이 충분히 유효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도쿄도는 도쿄 18구에서 자민당 칸 나오토 의원이 당선된 것을 제외하면 25개 선거구중 23개 선거구를 자민당이, 1구를 공명당이 차지했으며, 치바현의 제 4구에서 민주당의 노다씨가 당선된 것을 제외하면 모두 자민당이 획득해 자민당이 전국적으로 압승한 것이 여실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본 곳은 민주당으로, 선거전의 177석에서 개표 종료시까지 64석을 잃어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희색이 만연해 있으며, 민주당의 오카다 대표는 11일 밤, '민주당이 집권하지 않으면 대표를 사임한다고 말한 내용은 아직도 유효하다'며 물러날 의사를 나타냈습니다.

고이즈미 총리는 12일에 공명당 칸자키 대표와 가진 당수회담을 두고 연립정권의 유지를 확인합니다. 22일 전후에 소집될 특별 국회에서 총리 지명을 받을 고이즈미 총리는, 즉시 현재의 각료를 기반으로 한 제 3차 고이즈미 내각을 출범시킬 예정입니다.

자민당을 탈당해 신당을 출범시킨 신당일본, 국민신당, 무소속 등의 前 자민당 의원들은 패색이 짙습니다. 신당일본의 경우는 총선전에는 3석이었던것에 비해 비례구에서 단 1석만을 얻었고, 국민신당은 총선전의 4석에서 히로시마와 도야마의 지역구에서 1석씩, 비례구에서 2석을 얻었지만, 실제로 탈자민으로 의원이었던 사람은 3명이며 무소속 의원들도 큰 선전을 보여주지 못해 탈자민의 영향은 크게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야당인 민주당을 지원하며 정권 교체를 호소했던 다나카 마키코 전 외상은 니가타 5구에서 출마해 자민당의 오네야마씨를 2만여표라는 큰 차로 제치고 당선되었습니다. 그는 "'개혁이라는 말이 (자민당의 대승이라는) 결과를 낳아 유감스럽다" 고 말했숩니다.

도이 다카코 전 사민당수는 긴키구역 비례대표 최하위(5위)로 입후보했지만, 1위만 당선되어 낙선했습니다.


< 최종결과 분석 >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이번 선거의 성공을 기반으로 연임하게 되어 내년의 임기만료까지 총 4년 5개월간 재임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는 지금쯤 레임덕 현상이 눈에 드러나고 차기 정권 싸움이 드러날 때지만, 이번 선거를 통해 상황이 극반전되었습니다. 일부에서는 고이즈미 총리를 '대통령형 총리'로 등극했다고 평가하기도 할 정도이며, 정계가 우익을 중심으로 크게 재편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선거에서 실제로 자민당의 누가 '소선거구는 자민당, 비례구는 공명당' 이라고 했다던데 어느정도 공명당의 영향도 들어가 있던 모양입니다. 자민당도 무시못할 공명당. 남묘호렝게교?


일본총선중앙상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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