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종御製문'에 해당되는 글 164건

  1. 2014.07.14 갤럭시 찬가(부제 : 돌파하라 최첨단을) (1)
  2. 2014.07.14 화투놀이 이야기
  3. 2014.07.14 감저시설(甘藷匙說)
  4. 2014.07.14 편교자설
  5. 2014.07.14 출애굽설(출근단상)
  6. 2011.11.24 KT의 PCS 서비스 종료와 휴대전화기 이야기 (2)
  7. 2011.06.29 (교수) 님의 침묵 (1)
  8. 2011.06.29 타는 목마름으로
  9. 2011.06.29 교수와 학생
  10. 2011.06.29 성적이 나왔습니다 (2)
  11. 2011.06.29 칠감도 시 제1호 ~ 제4호
  12. 2011.04.15 안드로이드 수도권 전철 어플리케이션 비교탐구 (4)
  13. 2011.03.27 한국 법제상의 혼인 개념의 고찰과 헌법문제로서의 이른바 ‘동성 결합체’의 보호 방안 연구 (1)
  14. 2011.02.11 당신을 구라파 전문가로 만들어 드립니다. (9)
  15. 2011.01.23 대학도서관 대출 이력으로 살펴본 독서 내역 #8
  16. 2010.12.12 창학 5주년에 즈음하여 (농담대학교 개교 4주년 기념사) (1)
  17. 2010.08.12 대학도서관 대출 이력으로 살펴본 독서 내역 #7 (3)
  18. 2010.08.11 천안터미널야화
  19. 2010.06.26 조선후기 농담의 사회적 경향 (3)
  20. 2010.06.03 바보야, 문제는 무효표가 아냐! (16)
  21. 2010.02.08 구병삭 교수 저서 일부 발췌
  22. 2010.01.01 대학도서관 대출 이력으로 살펴본 독서 내역 #6 (4)
  23. 2009.10.14 고재석 학우께 사룁니다, 를 쓰고 난 뒤에 (16)
  24. 2009.09.17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下)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 (6)
  25. 2009.08.14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中)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와 주변 인물 (2)
  26. 2009.08.12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上)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의 배경 (3)
  27. 2009.08.08 해방 이후 한의학 교육의 출발과 동양의과대학
  28. 2009.08.01 인감제도 폐지라는 황당한 시츄에이션을 맞아 (14)
  29. 2009.07.24 국민일보 칼럼 「여성들은 왜 치마를 가릴까」를 읽고 (13)
  30. 2009.07.23 조선일보의 현실 (7)

갤럭시 찬가(부제 : 돌파하라 최첨단을)


무엇이나 마음만 먹으면 생산표준에 따라 만드는

삼성전자 기계공업의 자랑 우리식 갤럭시S

갤럭시는 삼성전자의 위력 갤럭시는 안드로이드 본 때

회장님 가리키는 길따라 돌파하라 최첨단을

아 아리랑 아리랑 민족의 자존심 높이

과학기술 강국을 세우자 어플이 파도쳐온다.


지식경제 시대인 오늘날 떨어지면 기술의 노예되리

첨단으로 세계향해 나가는 우리식 갤럭시노트

갤럭시는 삼성전자의 위력 갤럭시는 안드로이드 본 때

회장님 가리키는 길따라 돌파하라 최첨단을

아 아리랑 아리랑 민족의 자존심 높이

과학기술 강국을 세우자 어플이 파도쳐온다.


애국으로 심장이 불파면 점령못할 첨단은 없어라

구글으로 백배해진 힘으로 모든 것에 패권을 쥐자

갤럭시는 삼성전자의 위력 갤럭시는 안드로이드 본 때

회장님 가리키는 길따라 돌파하라 최첨단을

아 아리랑 아리랑 민족의 자존심 높이

과학기술 강국을 세우자 어플이 파도쳐온다.


갤럭시S3를 쓰며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 소비자로서 갤럭시 찬가를 써 보았다.


(2013년 2월 6일 오후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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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놀이, 세칭 고스톱 놀이는 수자(數字)를 익히고 또한 사계절의 풍광을 즐기는데 알맞는 놀이문화이다.


왜색이 짙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더러 있으나, 이는 곧 무지몽매한 자이다. 지난 조정 이래로 조선에 들어온 것이 마령서와 감자, 고추, 남령초를 비롯하여 무지기로 많은데 이 가운데 조선에 그야말로 딱 들어맞아 특화된 것이 고추를 비롯한 것이며 그 가운데 화투가 있다. 왜색이 짙다면 돈까스를 먹지말라.


여하간에 화투에는 사계절 풍광이 그대로 들어있고, 또한 패마다 그 달의 수자로 삼으니 두뇌계발에 큰 도움이 된다. 화투를 가지고 하는 놀이에는 여럿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 섯다는 근래에 들어 인터네트로 하는 놀음을 가지고 널리 퍼졌으나 실상 현실에서 패를 떠보면 치는 자가 많지 않다. 고래에는 민화투 놀이가 성하였으나, 곧 고스톱 놀이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 고스톱 놀이에도 인터네트 놀음을 가지고 그야말로 개나소나 고스톱 놀이를 할 수 있다 자처하게 되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인터네트 놀음은 쾌감의 극대화를 위하여 패의 속도를 빠르게 하고, 또한 어거지로 패 조합을 만들어내 실상에서는 있기 힘든 패의 조합이 부지기수로 나오게 되니 곧 사람들이 복표나 녹도복표와 같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많은 고민을 하지 않게 만드니 그야말로 해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화투놀이의 규칙 또한 신묘하기 그지없는데, 또한 지방과 시대에 따라 규칙이 다르니 이른바 세간에서 화투놀이 하기 전에 루-울 미팅(rule meeting)을 가지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내 유소년기에는 분명 7끗을 쌍피로 쳐주기도 하였고, 멍텅구리니 총통이니 하는 규칙이 없었다. 또한 그 이후에 본 일이 없는 로오얄피(royal皮)라는 규칙이 있었는데, 이는 9쌍피 오동쌍피 비쌍피의 3종을 모으게 되면 상대방의 피 한 장을 뺏어올 수 있는 기능을 하였다. 내가 이참에 생각이 나 구글에 쳐보았더니 로오얄피라는 것이 한 건도 뜨지 아니하니 확실히 기묘한 규칙임에 틀림이 없다.


여하간 화투놀이는 두뇌를 계발하고 철을 알게 하는 등 큰 효능이 있으나, 이 또한 해악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사행성으로 이용되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으나, 실상 생각해보면 민중의 곁에서 고래로부터 이어져 온 민속놀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사행성 놀음으로 이용되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인터네트 고스톱 놀이에 이어진 것이지, 결코 민중의 놀음이 그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트럼프 등으로 하는 놀음이야말로 더욱 사행적이다.


최근에는 스마아트폰(Smart Phone)이란 것에도 놀이 응용프로그람이 범람하는 가운데 이러한 화투놀이 프로그람도 많이 출시되었으나, 모두 이용자의 돈을 노리는 쓰레기 수준의 응용프로그람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고래로 본 가운데 프로그람으로 사실상 가치가 있는 것은 비쥬얼 고도리 프로그람 정도 밖에 없던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으나, 야심한 시각에 깊이 생각에 잠기어 근래에는 젊은 사람들이 화투도 못치고 술도 못마시고 담배도 못피우면 이 풍진 세상을 어떻게 사나 싶어 여담으로 몇 자 적어두었다.


(2013년 2월 13일 오후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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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감자 깎는 칼이 다섯 개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한 쪽엔 파채칼이 달리고 반대편으론 감자도 깎고 싹눈도 도려내고, 혹은 하나는 강판이 달려있기도 하는 등 대개 기능성이 우수한 것들이다.


그런데 나는 도통 이것들을 쓰질 못한다. 처음 사고는 한 두어번 써보았지만 역시 평상에는 숟가락으로 감자를 깎는다. 이것은 내가 촌사람이요 인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남새는 그 껍질에 양분이 많다고들 한다. 감자칼을 쓰게 되면 껍질이 너무 두꺼워 깎은 것이 더 많은 날도 있다.


실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대개 신선한 감자는 숟가락을 가져다대고 슥슥 긁으면 금세 껍질이 벗어진다. 이것이 오래된, 묵은, 신선하지 않은 감자인 경우에는 오히려 숟가락이 감자 속으로 파묻힐지언정 더욱 까지지 않는다. 바로 숟가락이 감자의 선도를 판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감자를 깎는 숟가락도 요령이 있다. 그 숟가락 머리가 넓고 판판하고 넙대대하며, 모서리가 칼까지는 아니고 썰리는 정도는 아니나 날카로워야 한다. 내가 이런 숟가락을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데, 밖에선 본 바가 없다. 그야말로 숟가락이 옛것인 셈이다.


여담으로 숟가락으로 감자를 벗기듯, 마늘을 빻는 때에도 믹서기로 드륵드륵 하는 것보다는 절구로 빻는 것이 훨씬 식감이 좋고 보기도 좋다. 먹어보면 안다.


이번에는 감자를 함부르스(가명)에서 샀다. 고래로부터 진노마트(가명)가 농수산물이 신선하기로 이름높았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선도가 좋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다. 게다가 농수산물 이외에는 딱히 대단한 강점이 없던 차에 함부르스에서는 배달도 해주고 좋은 물건으로 골라준다기에 주문했는데, 정말로 물건이 좋다.


밥하다 든 생각을 몇 자 남기어둔다. 이 글의 제목은 감저시설(甘藷匙說) 정도면 적당하겠다.


(2013.08.26.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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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교자(匾餃子)는 조선국 달구벌의 고유한 음식이다. 너른 만두피에다 약간의 소를 싸서 납작하게 접어, 기름에 지져 먹었으므로 편교자, 이른바 납작만두라고 하였다.


본디 교자의 형태는 소가 많은 것을 으뜸으로 쳤는데, 이는 성리학에서 이르기를 인간의 심성에 모든 진리가 이미 들어가 있는 것으로, 만두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편교자를 일컬어 이단의 음식이오, 기름덩어리 밀가루부침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경도(京都)에서 더욱 심하였는데, 속이 개미눈물만큼 들어있어 가히 맛없는 경상도의 음식이라 할 만 하다며 비웃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본시 교자가 중국의 음식이라고 하나, 편교자는 교자와 형태가 전연 다른 바를 상고한다면 기씨가 조선에 와서 왕도를 펼치듯, 편교자야 말로 조선만두의 새로운 발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도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하간 이 편교자의 기원은 한국동란 시절에 먹을 것이 없어서 먹었다거나, 60년대에 중국 교자가 너무 기름져서 야채를 넣어 만들었다는 양 설이 있다. 그러나 이미 60년대에 들어서는 기름을 적게 쓰긴 하였으나, 편교자가 사실상 널리 퍼져있었으므로 후설은 취하기 곤란하다. 또한 이 편교자는 기름에 부치는 것이 중요하므로 후설은 더더욱 취하기 힘들다.


편교자의 양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인다. 원형에 가까운 것은 겹친 교자를 떼지 아니하고 기름에 두루두루 부치는 것이다. 이는 겉과 속이 모두 말랑말랑하여 가히 겉과 속이 내리신 그대로이므로 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후기에 들어서는 서문시장 일대에서 교자를 대강 떼어 기름에 두루두루 볶듯이 부치는 것이다. 이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그대로이므로 군자가 경이직내 의이방외하는 것과 같다.


나는 떼서 부치는 것이 더 좋다.


+ 편교자의 양태와 관련하여 원형이라고 지적한 것은 옛 모습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고로 원래 납작만두는 떼어 기름에 적셔 부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2013.09.21.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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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중교통에서 통화하는 사람이 너무 싫다. 그제는 뻐-쓰에서 가족회의를 하는 냔을 보았는데, 왜 가족회의를 집구석에서 안하고 뻐-쓰에서 하는지 모르겠다.


여하간 금조에는 웬 민주애국지사냔이 아침댓바람부터 전철 플래트폼에서 핏대를 올리면서 삼청교육대를 부활시켜야함을 통화하였는데, 곧 전차에 올라타서도 그 웨침을 멈추지 않았으니 저냔부터 삼청교육대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과 같이 일어났다.


하여간 금일은 무슨 날이긴 한가본지 전차가 늦게 도착하고는 사람도 미어터지는 판국에 웬 갸날픈 처녀 하나가 괴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다 접어놓고 문을 닫으며 타는게 아닌가. 나는 이때에 이 전차의 무서움을 알아채고 내렸어야 할 것을.


본디 1호선을 타본 사람이라면 알겠으나, 인천행은 서울 이북에서 발차하여 남하하고, 천안신창 및 수원병점행은 성북에서 발차하거나 청량리에서 발차하여 남하한다. 대개 수원병점행이나 천안행을 타거든 할랑한 분위기로, 혹 때로는 앉아오는 기회가 있는데 이번에는 열차가 몽조리 지연되는 분위기라 어쩔 수 없이 인천급행을 타게된 것이 그지같은 전말의 시작이었다.


이 인천행이란 것은 타고나거들랑 일단 회기역에서 1할이 빠지고, 청량리에서 3할이 빠지고, 그외 제기동부터 종로오가까지 쪼르르륵 빠지다가 종로삼가에서 다시 삼사할이 빠진다. 물논 그 사이에 계속 들어차기는 하지만, 웬만하거들랑 회기부텀은 신문지 쪼가리 한 장 볼 수는 있는 환경이 된다.


그런데 금일은 회기역에서 그 갸냘픈 처녀가 문을 닫고 타더니, 청량리에서는 빠진 3할 대신에 새로운 3할이 타고는 이제는 웬 거구의 사내가 문을 닫고 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중간중간에 분명히 타는 자보다 내리는 자가 많은데 열차혼잡도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 분명히 배후세력이 장악하고 있음이 틀림없음을 느꼈다.


그리고는 종로삼가에 이르러, 청량리에서의 그 거구만한 두 사내가 내리는 문을 장악하고는 조금이라도 내리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이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금일의 탑승사정은 곤란의 연속이었으니, 곧 종로삼가에서 대략 륙할이 내리지않았나 싶을 정도로 혼란이 그지없었다. 그 두 사내 가운데 한 사내는 곧 밀려났으나, 한 사내는 꿋꿋이 자리를 지키려다 결국 말미에 문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야말로 유대 백성이 애굽을 떨쳐일어나는 풍경과 몹시 흡사하였다.


그 다음에는 3호선을 타러갔더니, 곧 열차가 떠나려하므로 사람들이 맨 마지막칸(10-4)를 통하여 대거 탑승하여 제자리를 찾아가니, 이는 또한 유대백성이 출애굽을 하는 광경과 같이, 전차를 가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새가 흡사 정병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보았던 광경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 몇 자 술하여 놓는다. 아 빠진 것이 있다. 종로삼가 일호선에서 삼호선 내려가는 길이 곧 두 줄짜리 에스카레이타인데, 이 풍경이 또한 자못 대단하다. 특히 금일의 사정은 극심하였더니, 꼭 일단 운전하면서 대가리부터 들이미는 조선사람의 습성과 극히 똑같더라. 오늘의 이야기를 출애굽설이라 이름한다.


(2013.11.26.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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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을 쓴다. 시간이 나기도 했고, 티스토리 관리자 모드 변화 이후 처음 쓰는 글이다. 그만큼 글을 쓴 지가 오래되었다는 말이리라. 여하간 금일 방송통신위원회가 KT의 PCS 서비스 종료를 승인하였음을 보고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억색하여 말을 잇지 못하다가 이제 마음이 좀 가라앉았으므로 이 기회에 KT를 좀 까고 내 핸드폰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다.

머나먼 옛날 옛적에 011이 있었다. 그리고 016, 7, 8, 9가 생겨났는데 원래 이동통신 사업에 말 못할 사정이 많았다. 선경이 011을 차지한 것도 그 과정에서 차마 새 사업자가 되지 못하고 한국이동통신 민영화 입찰에 뛰어들어 먹은 것이다. 그리고 포철과 코오롱이 신세계통신(017)을 내세우고 CDMA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근데 돌연 PCS라는 것이 나타났으니, 한국통신프리텔(016)이 PCS 사업권을 먹었고, 한솔의 한솔텔레콤(018), LG텔레콤(019)이 또한 PCS 사업권을 먹어 경쟁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때 내가 지금의 018을 개통하였으니, 무려 12년 전이다.

그런데 이놈의 한솔PCS는 세워지자마자 합병설에 시달렸는데, SKT와 LGT의 합병설과 달리 한솔과 한통은 기지국을 공유...하고 있었던지라 합병설은 뭔가 근거가 있는듯 없는듯 했었다. 그러더니 결국 가입자 숫자가 제일 처지다가 덜컥 한국통신프리텔에 잡아먹혀 한솔 대신 한국통신엠닷컴이 되었다가 결국 한국통신프리텔과 함께 KTF가 되었다. 그리고 SK텔레콤이 신세기통신 주식을 야금야금 잡아먹더니, 시장점유율을 50% 밑으로 낮춘다는 괴악한 조건으로 공정위의 승인을 받아 인수하게 되었다.(근데 사실 50% 밑으로 떨어진 바가 없다.) 이게 뭐 800MHz 황금주파수를 다 잡아먹으려는 속셈이었다는 지적도 있긴 한데....

하여간 단기간에 시장이 정리되어 SKT-KTF-LGT의 삼국지가 펼쳐지게 되었는데, 이것이 정말 조조 손권 유비같은 구조가 아니고 사실상 스피드011이냐 그 외의 것들이냐... 하는 시각도 있었고, PCS019와 TTL 등등등 온갖 브랜드가 쏟아져 나오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KT 그룹은 지속적으로 번호이동제도를 도입해달라고 요구했고, 그러던 와중에 정부가 3세대 이동통신에다가 010-NYXX국번(NY는 고유번호, XX는 0~9)을 사업자마다 갈라줘 어느 통신사인지 모르게 한다는 계책을 내놓았으나, 이미 다 까발려져 있다(....)

여하간 그 시절에도 나는 한솔엠닷컴, 아니 KTF에 계속 있었드랬다. 이 번호이동성 제도를 도입한 뒤로 각 사업자간에 이동이 활발해지니, 나도 그 틈을 타 2005년 전후로 핸드폰을 6년만에 당시에 대세이던 슬라이드형으로 바꾸었다. 그 전에 쓰던 것이 바형에 플립이 달린 것이었다. 당시에 이것이 두줄짜리 액정으로 문자라는 것은 생각도 못하던 것인데, 이제 문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른바 3G로 불리는, 영상통화가 되는 그것이 나오게 되었다.

이 번호통합정책이라는 것이 사실 2G라던지 3G 또는 4G니 하는 것들과는 전연 상관이 없이, 이 011의 프리미엄을 없애고저 만든 것이다. 011을 안쓰게 만들면 결국 프리미엄이 없어지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었는데, 더욱 웃긴 것이 SKT의 프리미엄이 통화품질과 전연 상관이 없는 3G 시대까지 이어진 것이다. 2G 시대의 경험이 그대로 이어져, KTF는 더욱 상관 없음과 자신들의 통화품질이 좋음을 광고하였으나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별론을 술하자면  PCS 사업 초기, 즉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극초반만 하더라도 조선에 있는 인구 가운데 경제활동 인구가 3천만이니, 결국 2천 5백만이 이동전화기를 가져다니면 결국 시장이 망할 것이다 하는 이야기가 전문가들에게서도 나오던 참인데, 이것이 세상이 변하고 이제는 사람이 이동전화기를 두개 또는 세개 이상까지 쓰는 작자들이 있을 뿐더러, 아해뿐만 아니라 여염의 부인까지 가지고 다니니 매우 해괴한 일이다. 이를 누가 상상했겠는가.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이 번호 통합 정책의 이유라고 하는, 즉 01X를 내버리고 010을 택하면 즉 010을 누르지 않고 번호만 누르니 아주 편해진다는 헛된 소리뿐만 아니라, 이 번호자원이 부족해진다는 소리를 하는데 특수번호를 제하고 010에 결국 실질적 가용자원이 7~8천만 개인데, 이미 조선의 번호 사용이 5천만을 넘어섰고, KISDI은 이미 010 번호자원이 부족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 바가 있다.

여하간 그러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던 조선의 통신 사정에 종종 번호통합 논의가 진행되어 왔고, 201x년이니 하다 현재는 2018년이라고 박아둔 상황인데 모 언론에서 지적하기를 "제도가 일관성 있게 훼손되어 왔다."는 평을 한 바 있는데, 참으로 적절하다. 그러던 사정에 변화가 생긴 것이 이른바 스마-트 폰이다. 예전에 PDA-폰이라며 팔리던 것이고, 여염에서 함부로 쓸 수 없던 것이었는데 지금은 여염에까지 모두 번져 차가 오건 비가 오건 들고 다니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에 스마-트폰 하면 대개 윈도 모바일이나 팜 OS, 심비안 운운하다 갑자기 옴니아가 나오고 아이폰이 나오더니 스마트폰이 쫙 퍼지기 시작했다. 그 시절에 나는 열심히 피쳐폰(예전 이동전화기를 여염에서 이르는 말)을 기변하고 있었으나, 두 대를 넘지 못했다. 대개 스카-이, 엘지 등을 썼으나 일 년이 넘으면 대개 키-패드가 무너져 쓸 수 없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구글이 안드로이드로 밀어치니, 조선에도 곧 아이폰 덕에 안드로이드 열풍이 몰아쳤다. 갤럭씨 에쓰(S) 등이 시장에 나오고 나서는 여염에까지 스마-트 폰이 밀어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2G로는 스마-트 폰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01X와 2G 혹은 3G는 전연 상관이 없음에도, 01X는 피쳐 폰만을 사용해야 했으니 불만이 여간 아니었다. 본인은 결국 손난로로 불리던 모토-로이 공기계를 구매하였으나, 보름만에 명동에서 유실한 것이 지난 3월이다.

결국 번호통합이란 것에 대한 이야기만 남지 않았는데, 이것이 본래는 KTF라는 당시 후발 사업자가 주도하여 지속적으로 요구하였던 것이다. 요구해서 통과가 되었는지는 이야기했다간 소송걸릴 것 같으므로 언급하지 아니하겠으나, 하여간 두고보니 3G에서의 점유율은 KT가 초반까지만 해도 우월한 상태였으니 이미 시장 점유의 폐해가 해소된 것과 같지 아니한가. 결국 번호 통합의 논리가 전연 없어, 단 하나 남은 것이 이미 바꾼 자들에 대한 것인데 자기네들이 보기에도 모호한 소리만 하다가 최종으로 나온 것이 2018년이니 말해 무엇하랴.

그보다 KT가 괘씸한 것은 2G니 3G니, 혹은 번호통합이니 하는 문제가 아니다. 기업의 실책을 소비자에게 전가하고, 소비자를 쥐어 짜 이익을 보려는 고약한 심보때문이다. 무릇 여염에서부터 큰 상인에 이르기까지, 대개 상도덕이라는 것이 있어 샘숭을 비롯하여 여러 사업자들이 전화기를 내놓고는 생강빵을 먹이니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무는 아니나, 상도덕이다. 아니지킨다고 경찰 출동 하지 아니하고, 쇠고랑을 차지 아니한다. 허나 지키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그런데 이 KT란 놈들은 LTE라는, 이른바 4G를 하려고 900MHz를 받았더니 이것이 덜컥 안해준다고하니, 기존의 고객을 몰아내고 LTE를 하려는 심산이 이미 알려진 바 있다. 그런데 결국 생각해보면, KT가 이전에 주장하던 주지가 무엇인가. 결국 2G건 3G건 다른 통신사 고객을 잡아먹어, 배를 불려보자는 속셈이다. 그런데 난감한 것이 자기네들이 하던대로 하니, 이것 2G건 뭐건 못먹게 되었으니 몇 놈 있는 놈이나 족쳐 배를 불려보자는 것이 아닌가.

2G와 3G의 통신이건, 아니면 번호통합 혹은 이동이건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KT 족속들이 고객을 쥐어짜고, 3G로 이동시키며, 가당치아니한 조건으로 계약을 해지하는 등 불법·탈법·위법의 방법을 동원한 것이 문제이다. 소비자가 봉이고, 참깨이다. 무조건 쥐어짜면 기름이 나오는 줄로 아는 것이다.

이미 언론이나 통신 상에서 그러한 고백이 드러나기 시작했고, 하물며 새벽녘에 2G 소비자들이 연결이 안되는 것 & 오늘은 오후부터 서울 전역에서 곳곳에 2G가 연통되지 않는 것은 어떠한 연유인가. 2G 서비스 종료 후에 LTE 연결을 할 수 있는 것은 무슨 비결인가. 조건이랍시고 달아놓은 것이 2주라면, 고객의 가택에 연통(TM or CM)을 넣었는지 안넣었는지도 모르는 KT가 할만한 짓이 무엇인가 생각하여보면 이번의 2G 종료는 그야말로 방통위에 최루탄을 터트리고 싶지 아니하다고 할 수 없는 조치라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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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님의 침묵
 
교수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교수님은 갔습니다.
푸른 카페트를 깨치고 연구실을 향하여 난 작은 복도를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黃金)의 꽃같이 굳고 빛나든 옛 강의록은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微風)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수업의 추억(追憶)은 나의 성적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교수님의 파워포인트에 귀먹고, 꽃다운 교수님의 판서에 눈멀었습니다.
성적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성적 나올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F는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F를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源泉)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등록금 소중함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다음 학기의 밑빠진 독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기말고사를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교수님은 갔지마는 나는 교수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학생의 통곡은 교수님의 침묵(沈默)을 휩싸고 돕니다.



(출전:2011년 6월 22일 발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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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는 목마름으로
 
신새벽 모니터에
네 이름을 쓴다 ○○○ 교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기말고사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 교수여
아직 끝나지 않은 강의실의 어딘가
발자국소리 연필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장학금의 추억 
되살아오는 성적을 보는 벗들의 초췌한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강의평가에
키보드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 개새끼



(출전:2011년 6월 22일 발굴작)
※  
○○○ 부분은 해독되지 않는 부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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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와 학생
 
아무도 그에게 성적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신입생은 도무지 교수가 
무섭지 않다.
장학금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간이 술에 절어서
노숙자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유월달 교수가
성적을 주지 않아서 서글픈
학생 통장에 새파란 
마이너스가 시리다.



(출전:2011년 6월 22일 발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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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이 나왔습니다

성적이 나오신 뒤로 나는 화면을 볼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성적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수업에 들어간 일이 적으므로 배운 것도 없습니다. 노트도 없어서 필기나 요약을 꾸러 동기에게 갔더니, 동기는 ‘자체휴강은 염치가 없다. 염치가 없는 사람은 성적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성적이 나왔습니다.

나는 교과서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불법복사본이 없습니다. ‘교과서 없는 자는 수업권이 없다. 수업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시험이냐’하고 답안지 뺏어가려는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려는 찰나에 성적이 나왔습니다. 아아! 온갖 학사 조치는 민주화 열사들과 빨갱이 시위꾼만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재입학을 할까, 학적부의 첫 페이지에 휴학칠을 할까, 반수를 할까 망설일 때에 성적이 나왔습니다.




(출전:2011년 6월 21일 발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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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감도 시 제1호

十三人의學生이講義室로疾走하오.
(問題는막다른問題가適當하오.)

第一의學生이모른다고그리오.
第二의學生도모른다고그리오.
第三의學生도모른다고그리오.
第四의學生도모른다고그리오.
第五의學生도모른다고그리오.
第六의學生도모른다고그리오.
第七의學生도모른다고그리오.
第八의學生도모른다고그리오.
第九의學生도모른다고그리오.
第十의學生도모른다고그리오.

第十一의學生이모른다고그리오.
第十二의學生도모른다고그리오.
第十三의學生도모른다고그리오.
十三人의學生은모르는學生과모른다는學生과그렇게뿐이모혓소.
(다른事情은업는것이차라리나앗소)
그中에一人의學生이모르는學生이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學生이모르는學生이라도좃소.
그中에二人의學生이모른다하는學生이라도좃소.
그中에一人의學生이모른다하는學生이라도좃소.
(問題는客觀式이라도適當하오.)
十三人의學生이講義室로疾走하지아니하야도좃소.


칠감도 시 제2호

나의 교수님이 나의 곁에서 조을적에 나는 나의 교수님이 되고 또 나는 나의 교수님의 교수님이 되고 그런데도 나의 교수님은 나의 교수님대로 나의 교수님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교수님의 교수님의 교수님의…… 교수님이 되느냐 나는 웨 나의 교수님을 껑충 뛰어넘어야하는지 나는 웨 드듸어 나와 나의 교수님과 나의 교수님의 교수님과 나의 교수님의 교수님의 교수님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냐


칠감도 시 제3호

시험치는사람은즉문제내지아니하던사람이고또문제내는사람은시험치지아니하는사람이었기도하니까시험치는사람이시험점수를알고싶거든시험치지아니하던사람이시험채점하는것을구경하든지문제내지아니하는사람이채점하는구경을하던지문제내지아니하던사람이나시험치지아니하는사람이채점하지아니하는것을구경하든지하였으면그만이다.


칠감도 시 제4호

學生의成績에관한문제.
ㆍ F C- C0 C+ B- B0 B+ A- A0 A+
F ㆍ C- C0 C+ B- B0 B+ A- A0 A+
F C- ㆍ C0 C+ B- B0 B+ A- A0 A+
F C- C0 ㆍ C+ B- B0 B+ A- A0 A+
F C- C0 C+ ㆍ B- B0 B+ A- A0 A+
F C- C0 C+ B- ㆍ B0 B+ A- A0 A+
F C- C0 C+ B- B0 ㆍ B+ A- A0 A+
F C- C0 C+ B- B0 B+ ㆍ A- A0 A+
F C- C0 C+ B- B0 B+ A- ㆍ A0 A+
F C- C0 C+ B- B0 B+ A- A0 ㆍ A+
F C- C0 C+ B- B0 B+ A- A0 A+ ㆍ

採點 F : A+

26.06.2011
以上 擔當敎授 天 漁



(출전:2011년 6월 21일 발굴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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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성령의 기름부음 받아, 영접한지도 어언 1개월이 지났다. 일은 없고, 이게 재밌어서 어플만 맨날 만지작만지작 하고 있는데.... 과인은 지하철 내비게이션 b를 쓰는데, 이걸 쓰면서 항상 아쉬웠던 것이 왜 환승역에서 호선별 경로검색이 되지 않느냐였다. 이 부분은 후술하기로 하고... 그래서 내친김에 어플들을 죄다 받아서 비교탐구를 시행하였다.

다음은 안드로이드 마케-ㅌ에서 제공하는 수도권 전철 경로 어플리케이션(노선도만 제공은 제외) 6개종을 분석한 결과표이다.


전철 경로 어플리케이션이 가져야 하는 기능이나, 현재 유통되는 어플리케이션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모두 정리해보았다. 다만 지하철 도착정보는 과인의 단말기 문제인지, 갑자기 작동이 안돼서 꺼고 켜고 다 해봐도 안되길래 때려쳤다. 그리고 저 정보들은 내가 급하게 작동시켜보고 넣은 것이므로,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총평은 다음과 같다. 설치 횟수가 많은 것은, 물론 오래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역시 이용자의 눈에서 가장 편하고, 유용한 어플리케이션이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지원 사항 중 요금이라거나, 이런 부분은 사실 최근에는 크게 필요가 없는 부분인지라 지원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노선도상에서 클릭을 지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다소 불편한 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바탕이 되는 노선도의 모양새를 두고 생각건대, 일부 사용자들이 직접 막 만들어서 쓰는 정도가 아니라면 서울메트로나 도시철도공사나 다음이나 네이버나 그 소용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럼에도 자체적인 노선도를 쓰는 것은 메트로이드다. 그러나 과연 메트로이드가 쓸만한지는 별론으로 한다.

역시 중요한 정보는 막차정보이다. 막차를 못타면 아 시망...이므로 막차정보를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사용자가 원하는 것일진대, 지원하지 않는 어플이 다소 있다. 그 외에 광고라던지, SD카드 이동 또한 사용자에게 중요한 선택요소가 될 수 있다.

그보다 모든 어플에 아쉬운 점이야말로, 환승역별 경로검색이다. 이를테면 어딘가에서 종로3가역이나 노원역을 간다고 칠때, 가장 가까운 경로를 보여준다. 그런데, 노선상의 이동요소를 통해 나타나는 경로는 종로3가역이 통째로 나오지만. 사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동의 요소는 땅밑뿐만 아니라 땅위도 고려되어야 한다.

장황한데, 요약하면 이렇다. 만약 종로3가 피카디리를 간다고 1호선 종로3가역을 가야되는데, 5호선 경로를 가르쳐줬다. 그럼 5호선에서 내려서 올라와서 한참을 걸어야.... 아..... 이를테면 낙원상가를 가기 위해 상월곡-종로3가 경로는 대부분 상월곡-동묘앞-
종로3가(1)의 루트를 안내하지만, 사실 종로3가(5)를 간다면 상월곡-청구-종로3가(5)를 타면 의외로 빠르게 갈 수 있다. 막장환승 노원역 또한 4,7호선의 거리 차이를 감안하면, 이런 루트가 다소 나올거같은데 쓸 일이 없어서 모르겠다.
 

제품별 평이다.

1. 지하철 내비게이션 b

 안드로이드 지하철 어플계의 갑이라 하겠다. 다만 불의의 타격이 자주 나타나는 수도권 전철 1호선이라거나... 2호선이라거나.... 시망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를 위한 다양한 정보와 선택사항을 제공하는 것은 역시 많은 사용자들이 사용할만한 요소가 된다. 광고가 없는 줄 알았는데, 가끔씩 어디선가 뜨더라. 사용자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광고는 좋다.

 특이한 요소로, 경로의 발착역 전환이 가능하다. 매우 편하다, 쓰다보면... 의외로 데이터를 무서워하는 경우에는, 이런 프로그램이 오히려 좋으리라 생각한다.

2. Smarter subway
  도시철도공사 노선도를 바탕으로 한다. SD카드 이동이 안되는 것을 제외하곤, b와 비교할 때 의외로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페이스나 경로정보상의 여러 요소가 b에 비교할 때 다소 떨어진다. 다만 아마도 출시된지 얼마 안됐을 것 같으니, 나중에 크게 좋아진다면 다른 프로그람의 지위를 넘볼지도 모르겠다.


3. 기타 평
 지하철노선도와 서울지하철, 메트로이드의 스크린샷이다. 지하철도착정보의 스크린샷이 없음을 양해바란다...


 지하철노선도는 그냥 지하철노선도다. 아무런 평도 필요없다.....

 서울지하철 어플의 경우, 스크린샷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텍스트 중심이면서도 상당히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이를테면 타고가다가 급하게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 어느 역에서 내려야할지라거나.... 실시간 도착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만큼, 데이터 걱정없는 자에게는 상당히 편리하게 소용될 수도 있다. 미래가 아주 기대되는 어플이다.

  메트로이드는, 음...... 밥상에 숟가락 하나 올린 느낌이다. 노선도는 야심차게 쓰는 모양인데, 음.... 피쳐폰 지하철검색과 다른 점이 없다.

 지하철도착정보는...... 열리지도 않아서 죄송합니다. 다른분들 리뷰를 보세요.


<총정리>
지하철 내비게이션 b가 지금은 최고.
서울지하철은 정보량이 최고. 미래가 기대됨.
Smarter subway는 b와 유사한데, 둘중에 하나만 있어도 될듯. b를 추천하지만, Ss의 인터페이스가 더 좋다면 Ss를 추천.
지하철노선도는..... 프린트하세요.
메트로이드는........ 음........
지하철도착정보는 죄송합니다...... 

위 어플들은 모두 안드로이드 마케-ㅌ에서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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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요약

 2010년은 방송인 홍석천이 지난 2000년에 최초로 사회에 자신의 성 정체성을 밝히는 ‘커밍아웃’을 선언한지 10년째가 되는 해이다. 그 10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인식은 해를 거듭하면서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군형법 제92조에서 말하는 ‘추행’이라 함은 계간(항문 성교)에 이르지 아니한 동성애 성행위 등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성적 만족 행위”라고 판시함으로써, 동성애 행위를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한다’고 언급했다.

 위의 판결에서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듯이, 한국의 법제는 동성애에 대하여 무관심 혹은 무시 내지는 부정적인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합리적 이유 없이 성별·장애·병력·나이·출신국가·민족·인종·피부색·언어 등을 이유로 고용, 교육기관의 교육 및 직업훈련 등에서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하는 차별금지법안에서는 끝까지 동성애에 대한 차별 금지 규정이 논란이 되다가 법무부의 입법예고 이전에 급하게 삭제된 바 있다.

 이러한 법제도 내의 동성애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부정적인 태도와는 달리 동성애와 관련한 법적 담론상의 문제는 크게 변화하고 있다. 최근의 동성관계에 대한 논의는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을 인정하는 문제, 그리고 그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단계에서 더욱 나아가, 과연 동성관계에서 나타나는 법적인 문제점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 이를테면 동성간에 사실혼과 유사한 관계가 나타나는 경우에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하는 문제 ― 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여러 외국의 입법 동향을 살펴보면 이러한 접근에 더욱 참고할 만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단순히 일시적인 경향으로서의 현상이 아니라 오랜 기간 동안의 진지한 논의를 걸친 입법으로서, 일정한 동성 결합체의 보호에서 벗어나 동성 결합체의 공동생활관계를 이른바 ‘동성혼’(same-sex marriage)으로 보호하는 국가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은 우리 사회와 법제에 크게 참고할 만한 부분이다.

 법적 제도를 통한 동성 결합체의 보호는 지금에 이르러 피할 수 없는 법적 요청이다. 기본권과 법적 제도의 보장은 상호보완적이다. 동성 결합체 구성원이 가지는 객관적 가치질서로서의 기본권은 법적 제도의 형성을 통하여 동성 결합체의 헌법질서 내의 편입과 함께 그 보호를 요청하고 있다. ‘성적 지향성’을 이유로 인하여 헌법이 보장하는 가족 질서 내에 편입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동성 결합체의 법적 보호 방안에는 그 기존 질서 고수의 정도에 따라 구분할 때에, 현행 제도 하에서의 공정증서 계약이나 입양 제도의 활용과 같이 일체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되 당사자의 영역으로 두는 방법,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 일부 특별법(이를테면 주택임대차보호법)을 통하여 개별적으로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자에 대하여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방법, 그리고 사실혼 관계에 있는 결합체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방법, 시민 연대 제도 혹은 등록 동반자 제도를 통하여 권리를 인정하는 방법, 마지막으로 혼인의 범위를 확장하여 동성 결합체의 혼인을 법으로 인정하는 방법이 있다.

 현재까지 국내의 법적 보호 방안은 일체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방법이었으나, 이러한 방법은 세계적인 추세로 볼 때 오래 지속되지 않을 전망이다. 동성의 결합체가 이미 존재한다는 점에서 지금과 같이 어떠한 대응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점에서 법률혼 혹은 이성간의 결합체인 사실혼과 동등하게 취급되어야 한다. 당사자 간의 합의에 의하여 형성된 어떠한 애정적 공동생활관계, 즉 사실상의 혼인 관계에 있어서 공동생활의 안정망을 통하여 보호하는 것 또한 법의 역할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과연 ‘성적(性的) 지향성’이 헌법상 규정된 혼인과 가족제도의 보장 대상에서 제외되는 이유가 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혼인의 절대적인 요소로 인식되어 오던 ‘인간의 근본적인 결합’이라거나 ‘자녀를 수반해야 한다’는 의식 등은 급격히 달라지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의 혼인의 변화에 대한 법제도에의 반영 없이 기존의 “관습적이고 전통적인 구시대의 의식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혼인의 개념을 고수한다면, 오히려 “혼인이 지니는 역사성을 저해하는 결과”마저 낳게 하는 것이다.

 ‘이성간의 결합’이라는 내용을 헌법상의 규정을 통하여 ‘주어진 구성원리’ 혹은 ‘핵심적인 구조원리’로 보게 된다면 ‘동성 결합체’를 혼인에 포함하여 보호하는 것은 헌법에 위반하게 된다. 그러나 헌법 제36조 제1항의 ‘양성’이라는 문구를 가지고 반드시 혼인은 ‘일남일녀의 결합’만을 강요하는 규정으로 볼 수는 없다.  헌법 제36조 제1항의 규정은 인간의 존엄과 가부장적 가치관으로 인하여 피해를 입고 있는 여성을 보호하여 민주적인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규정이지, 동성혼을 금지하고자 하는 규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현행 헌법의 혼인 내에 ‘이성간의 결합’이라는 요소가 본질적 요소, 즉 주어진 구성원리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동성혼인”이라는 새로운 가족개념 자체를 염두에 두지 못한 것일 뿐, 혼인으로의 동성혼인 개념의 포섭이나 동성 결합체에 대한 보호 자체를 금지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또한 혼인에 있어서 “이성성(異性性)의 요청”은 혼인의 역사에서 나타나는 전통이지만, 그 법률혼의 독점적 지위는 사회의 변화와 함께 조금씩 완화되어 갔다. 혼인과 가족생활의 변화가 먼저 찾아온 서구 사회에서는 법률혼의 위상이 광범하게 침식되어 왔으며, 다양한 혼인유사동거(婚姻類似同居)의 법적 효과는 확대되고 다양한 가족형태가 출현하였다. 기존의 법률혼주의와 일부일처제에 일부 반하는 면이 있을지라도, 그 면이 언제나 정의에 반하는 것이라고는 할 수는 없고, 기존의 법률혼주의나 일부일처제에 다소 모순이 있는 경우에는, 이를 극복하는 것이야말로 정의에 합치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가족의 정의(定義)는 “자연 혹은 보편(普遍)의 반영이 아니라, 한 쪽의 정의(定義)를 채용하여 다른 한 쪽을 부정하는 것에 의하여 자의적으로 구축되는 사항이라는 점”이라는 지적이나 정책적으로는 인구정책적 목적에서의 혼인 제도의 반영을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법적으로 ‘출산’은 어떠한 혼인 요건에도 해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기존의 가족제도에서 과연 명백히 동성 결합체의 보호를 금지하여야 할 이유도 발견되지 않는다.

 결국 혼인에서 ‘이성성’이라는 요소는 혼인 자체의 정의(定義)의 문제가 아니라, 법이 ‘이성 결합체’를 기준으로 혼인을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도출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한 연장선에서 혼인만을 유일하고 정당한 결합 관계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공동생활을 보장함에 있어 국가나 사회의 법적 보호나 이익은 동성 결합체라고 할지라도 평등하게 부여하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방안을 택할 것인가는 입법자의 역할이다. 그러나 프랑스식의 민사연대계약은 혼인의 본질적인 효과인 부양의무 또는 정조의무가 인정되지 않으므로, 동성 결합체에 대하여 혼인 또는 준혼(準婚)으로서의 보호를 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북구 혹은 독일과 같은 등록된 동반자 제도 또는 영국의 시민 동반자 제도의 경우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본질적인 근거에 의거하지 않았다는 문제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혼인의 개념을 확장하는 것은 아직 여론이 형성되어 있지 아니하고, 더욱 깊은 검토를 필요로 한다고 할 것이다.

 이후에 있어서의 제도 설정은 동성 결합체를 구성하는 상호의 성실과 책임을 보증할 수 있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측면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리고 결합체의 삶을 구성하는 생활공간으로서의 주거권, 재산법적 계약의 측면, 권리의 승계자로서의 지위, 그리고 관계 해소 이후의 일정한 재산법적 책임과 상속 관계 등이 복합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동성 결합체의 권리 보장은 단순히 하나의 공동 생활체로서의, 그리고 가족 공동체의 외연 확대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결합체를 구성하는 각 개인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측면에서 크나큰 의의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헌법이 선언하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직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동성 결합체, 그리고 실질적으로 결합체를 구성하는 동성애자는 격리 혹은 외면되어야 할 사회적인 존재가 아니다. 기본권의 주체가 되는,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 헌법상의 한 주체이기 때문이다. 인격적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또한 자기 자신의 결단을 가지고 스스로를 규율하며 주변 세계를 형성할 권리를 가진 주체로서 결합체를 구성하는 것에 대하여 제도적인 보장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헌법적 가치에서의 인간 존엄성의 실현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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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에 가거나 책 볼 필요 전혀 없습니다. 매뉴얼만 숙지하시면 당신도 구라파 전문가가 되실 수 있습니다.

일단 구라파 전문가가 되기 위해 추앙해야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구라파 전체에서는 절대 독일이나 불란서, 영국 따위를 꼽아서는 안됩니다. 그런 나라를 꼽는 것은 다른 구라파 전문가들에게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메뉴얼은 역시 룩셈부르크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뭐하는 나라인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책 한권 안 읽어도 됩니다. 라트비아 정도도 괜찮겠군요.

동구에서는 무조건 유고슬라비아보다 구 유고를, 러시아보다는 구 소련을 추앙해야합니다. 이도저도 다 싫으면 헝가리 정도 추천드립니다.

남구에서는 이태리를 타겟으로 잡고, 종자부터 게으른 쌍놈들이라고 까대면서 희랍을 추앙하십시오.서반아는 조금 애매한 존재군요. 코르시카 추천합니다. 나폴레옹 이런거 몰라도 됩니다. 독립운동 했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북구에서는 노르웨이, 덴마크는 안됩니다. 핀랜드보다는 라트비아를 꼽으시고, 아이슬랜드와 덴마크는 무시하시되, 덴마크령 그린랜드는 천국이라며 마지못해 인정하는 제스쳐를 취해주십시오.

좋은 나라는 불란서, 덴마크, 핀랜드 다 세금 너무 많이 낸다며 까시고 곧 죽어도 사람들이 모르는 희랍을 추앙하십시오. 그중에서도 교육복지가 좋습니다. 대학 식당도 무상급식이란것만 알면 됩니다. 걍 댓글마다 대학무상급식 ㄷㄷㄷ하시면 됩니다. 굳이 불란서를 언급해야겠다면, 이민자들 문제때문에 불난것만 이야기해주십시요.

대충 이 정도 입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원복선생 먼나라이웃나라 읽고 구라파에 관심생겼다고 절대 고백하지 마십시오. 캐무시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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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씨슨 8인데, 이번엔 더럽게 안봤다. 갈치5년(2010년) 8월 12일부터 12월 31일까지다.
  1. 섹슈얼리티와 법 (이준일)
  2. (読む) 日本国憲法 (憲法を読もう会)
  3. ('암행어사 출두요') 조선의 법 이야기 (류승훈)
  4.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 (박성서)
  5. 농협법 (이승언)
  6. (회사등기의) 법률상식 (김정수)
  7. (지식제로에서 시작하는) 상법입문 (伊藤眞, 1958-)
  8. (회사등기의) 법률상식 (김정수)
  9. (註釋) 民法 (박준서)
  10. 現代日本の憲法 (元山健,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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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학 5주년에 즈음하여
(농담대학교 개교 4주년 기념사)


 사랑하는 농담대학 구성원 여러분, 농대가 드디어 개교 4주년을 맞았습니다. 지난 4년을 되돌아보면, 이 4년의 세월은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농담입국 구국농담.
 농대는 그간 교시 아래에, 농담 발전을 위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선도하여 왔습니다. 입국(立國), 즉 나라를 바로 세우는 이념은 어선조의 발전에 지대하게 기여하였고, 구국(救國)은 곧 남조선의 발전에 이바지하였으리라 믿습니다.

 야생의, 자연세계에서는 약육강식과 진화의 원리가 지배합니다. 적자는 생존하는 것이 곧 법칙이 되고, 생물들은 그 법칙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사회는 다릅니다. 서로 화합하고, 도우며, 즐겁게 살아가는 원리에 따라 이루어집니다. 인류사회의 발전을 이끌어 왔고, 문화적인 아름다움을 누리게 된 것도 이러한 인류사회의 공정한 이론 덕분입니다.

 그러나 인류사회는 또한 슬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양차 세계대전과 6·25 동란을 거치고, 한국에서 벌어진 4·3 사건, 5·18 광주 사건 등 피의 참상은 다시 회상해보면 어떻게 인간이 이럴 수 있었는가 싶기도 합니다.

 농대의 교시인 ‘농담입국 구국농담’은 바로 이러한 반성에서 출발한 것이기도 합니다. 인류사회에서 서로의 즐거움을 빼앗고, 좀 더 자신을 위하는 일에서 모든 다툼은 출발하게 됩니다. 그 즐거움을 함께 누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사유하고, 즐거운 대화를 통해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농대의 창학정신이자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이러한 농대의 문화적 아이콘이 바로 교표와 참새입니다. 교표를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듯이, 교표는 농대의 여러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모든 진리가 출발하는 책, 그리고 평화를 상징하는 월계관, 그리고 대화에 필요한 커피를 젓는 커피스틱, 그리고 노인에게 꼭 필요한 지팡이가 그것입니다. 늙어서도 농담하는 것이 바로 농대의 목표입니다. 참새는 정말로 작은 새입니다. 그렇지만 참새는 생태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존재이고, 쉴새 없이 지저귑니다. 서로 대화를 통해야 모든 평화가 이룩됩니다. 그야말로 참새의 가치가 지대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맛있습니다.

 목련과 목련나무는 또 다른 차원의 상징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그 존재를 의심받아 오면서도, 언어 문화에서 사라지지 않은 것이 바로 농담입니다. 추운 겨울을 견뎌내듯, 목련의 생명력이 농담의 생명력을 표상하는 것입니다.

 지난 4년, 농대와 함께한 이러한 상징의 역사는 바로 교시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인류사회를 보다 평화롭고, 보다 즐겁게 하는 것은 앞으로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이제 우리는 또 다른 4년, 그리고 10년을 준비해야 합니다.

 중세 이후 대학의 설립은 새로운 지식의 보급과 스콜라를 졸업한 이들의 지식에 대한 욕구에서 출발하였습니다. 십자군 원정을 통해 구라파는 새로운 지식에 직면하게 되었고, 문화적 교류를 통해 유입된 이러한 지식들은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게 됩니다.

 University라는 단어는 모두를 의미하는 universitas에서 유래합니다. 전문 분야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 모여 결합한 결사체에서 출발한 대학이 바로 파리 대학이나 나폴리 대학 등 최초의 대학에 해당합니다. 서로 배우고 가르치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어떤 견해에 다르면 유니버시티는 ‘교수 중심의 조합’에 학생이 결합한 것이고, 칼리지는 ‘학생 중심의 조합’에 교수가 결합한 것이라 합니다. 충분한 근거는 부족하지만, 농대의 성격을 나타내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대학은 독립된 사회이자 자유로운 사회입니다. 그렇기에 농대는 최후의 자유로운 농담의 보루이자, 최전선이기도 합니다.

 대학의 자치와 다양한 교류는 그럼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요.

 대학은 근본적으로 지적 측면에서 출발합니다. 학문적인 발전을 위해 이러한 대학의 가치가 뒤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학문적 권위와 진리 탐구 아래에 다양한 발전을 가한 것은, 바로 이러한 목표에서 비롯합니다. 고유의 지식과 새로운 지식이 결합하는, 다양한 문화적 교류를 통해 나오는 이러한 성과야말로 인류 사회에 이바지하는 대학의 고유한 가치입니다.

 이처럼 대학과 지성의 궁극적 목표는 보다 나은 인류사회를 만드는 데에 있습니다. 이를 위해 대학은 좀 더 외부와 교류하고, 소통하며, 호흡해야 합니다. 좀 더 나은 세상, 좀 더 정의로운 사회, 좀 더 풍요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것이 대학사회의 중요한 책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사회의 변화는 또 다른 위협을 가져옵니다. 사회의 발전과 대학이라는 존재의 성장은 대학의 정체성을 모호하게 하고 있습니다. 대학이 지식을 보증하지 못하고, 발전을 보증하지 못한 채로 자본에 의하여 예비 노동자를 생산하는 공급기지로서의 정체성을 강요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대학이라는 존재는 이미 천년 이상의 시간을 통해 구성되어 온 사회입니다. 그 목적과 존재 자체가 바로 인류사회를 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히 한국사회에서 나타나는 학문적 위기 국면은 이러한 대학의 존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특히 모 기업이 주도하여 서울 흑석동 모 대학을 인수하자 엄청난 격변이 일어났습니다. 아오, 이게 뭔가요. 모 재벌이 주도하는 대학은 어떠한 대학일까요. 박모 재단 이사장은 “대학의 주인은 엄밀히 말하면 학교법인이며 교수와 교직원은 직장인, 학생은 교육 서비스를 받는 대상”이라는 엄청난 발언을 한 바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흑석동 모 대학은 그냥 흑석직업학교가 되는 것입니다.

 대학의 가치는 돈이 아니라, 학문적 공동체로서의 사회적 제도입니다. 그 규칙에 따라 학문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이야말로 대학을 위한 모든 제도의 출발점이 되는 가치입니다. 그런 가치에 자본은 오히려 미친 이론을 들이댑니다. 자신들은 교육업자라면서 고객을 내치고, 고객이 원하는 바 또한 이루어내지 못합니다.

 학문적 공동체로서의 대학과 유사한 제도가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신앙적 공동체입니다. 만일 자본이 이러한 신앙적 공동체, 이를테면 교회나 사찰을 인수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우리는 바로 이런 것을 사이비종교라고 부릅니다. 자본주의의 영리활동이 그 성찰 없이 아무데나 파고드는 것이야말로, 제도의 건전성과 가치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우리 농대는 인류의 소중한 가치, 대학의 소중한 가치에 관심을 두고 출발하였습니다. 과연 대학은 어떠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학문적 공동체로서의 자유로운 대학 이념을 창달하는 것은 어디에서 출발하는가. 이러한 고민에서 바로 농담대학교라는 새로운 형태의 학문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농대 구성원 여러분.

 앞의 이러한 가치들, 즉 대학과 인류사회의 가치들, 그리고 농대의 가치에 주목하는 것은 농대만의 일이 아니라 인류사회 모두의 일입니다. 그리고 농대 구성원 여러분이 함께하여 이룩하는 일입니다.

 평화로운 지구 인류사회와 새로운 새천년의 디자인.
 바로 농대의 미래가 인류 사회의 미래입니다.
 인류 사회의 미래는 바로 농대의 미래입니다.

 서로 함께하며 지난 4년을 되돌아보고, 창학 5주년을 맞는 감개가 새롭습니다.


 감사합니다.


갈치5년(2010년) 12월 12일
농담대학교 설립자 겸 어선왕조 국왕
농담대학교 교무처장
김    천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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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리즈도 벌써 일곱번째다. 결국 7학기가 끝났다는 소리일 것이다. 9번째에서 대충 씨-슨(season) 1이 끝났으면 좋겠다. 하여간 이번에는 금년도 1월 1일부터 8월 11일까지다.

  1. (そうだったのか!)日本現代史 (池上 彰) : 이 책이 아주 수작이다. 어디 일본어 배우는 사학과 학생들이 읽어도 아주 좋을 책.
  2. (만화)화엄경 (임일휴) : 재밌었다.....
  3. (사과향의)요리백과 (김지현)
  4. (상법·민법·상업등기법개정에의한정석)법인등기요해 (김용환)
  5. (알기쉬운)법령정비기준 (법제처) : 이 책도 법하는 사람, 번역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옆에 두고 보아야 할 정도로 좋은 책이다.
  6. (일본잡지)모던일본과조선1940 (홍선영) : 이런 책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모던 일본 조선판 1940년도본을 번역을 떠놓은 책이다.
  7. <戦争責任>とは何か (木佐芳男)
  8. ドイツ憲法入門 (名雪健二)
  9. 경성리포트 (최병택)
  10. 경성상계 (박상하)
  11. 내셔널리즘 (강상중) :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좀 있다.
  12. 농협법 (이승언)
  13. 다양한 가족 출현에 따른 쟁점과 가족관련법의 방향 정립에 관한 연구 (변화순)
  14.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장림종) : 미투데이에도 썼는데, 이런 책이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점이 바람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세대 아파트의 모습을 어느정도 보여주는 책.
  15. 대한민국을바꾸는61가지방법 (홍동식)
  16. 도쿄 게스트하우스 (角田光代,1967-) : 가쿠타 미쓰요의 책. 기억에 남을 정도로 상당히 즐겁게 읽었다. 물론 내용에 대한 논의는 사양한다.
  17. 모던걸 (신하경)
  18. 밥상 혁명 (강양구,1977-)
  19. 翻訳語としての日本の法律用語 (古田裕清)
  20. 法令用語の常識 (林修三,1910-) / 法令作成の常識 (林修三,1910-) / 法令解釈の常識 (林修三,1910-) : 세 책을 한데 묶은 것은 사실상 책이 쎄-ㅅ트이기 때문이다. 하야시 선생은 일찍이 법제국에 장관으로 계셨는데, 사실 1989년에 작고하셨다. 1959년에 초판이 나오고, 1975년도에 2판이 나왔는데 이것이 아직까지 나오고 있다. 책 뒤에 보면 이천9년 3월에 찍은 것이 제2판 제33쇄다. 그만큼 스테-디 쎌러라는 소리일 것이다. 법령용어와 법령해석, 그리고 법령작성이라는 주제하에 일반인이 읽을 수 있도록 적절한 해석을 가미하였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에게까지 꾸준히 읽히는 책이라는 것, 그리고 아직까지 읽힌다는 점은 분명 수작중의 수작이라는 증거이리라.
  21. 법원과 검찰의 탄생 (문준영)
  22. 法学マテリアルズ (茂野隆晴,1941-)
  23. 변용하는 일본형 시스템 (한상일)
  24. 分かりやすい法律·条例の書き方 (礒崎陽輔)
  25. 비교빈곤정책론 (김상균)
  26. 司法官僚 (新藤宗幸)
  27. 생명과 법 (이로문)
  28. 世界の名刺 ベストアイデアブック (山野英之) : 명함 데-싸인 하려고 봤는데, 너무 신기한 디자인이 많아서 도저히 참고할 수가 없었다................
  29. 섹슈얼리티와 법 (이준일) : 이준일 교수의 수작. 사실 섹슈얼리티라고 하면 야릇한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사실 옛날 대학냄새나는 용어를 쓴다면 여성과 법, 법과 성같은 이름도 되었으리라.
  30. 소세키 선생의 사건일지 (柳広司,1967-) : 이거 예전에 봤던거 같은데, 기억이 안나서 또 봤다.
  31. 안녕 헌법 (차병직) : 아주 사기꾼들이다. 좋은 책처럼 위장하고, 오히려 일반인은 읽기가 더 힘들다.
  32. 梁柱東全集 (梁柱東) : 양주동 박사의 여요전주를 보려고 구했을 것이다.
  33. 옥새 (민홍규) : 전일에 민홍규씨가 옥새를 사실 전통이 아니라 요샛방식으로 만들었다고 뉴스가 나오던디.....
  34. 일본,저탄소사회로달린다 (김해창)
  35. 日本の統治構造 (飯尾潤,1962-)
  36. 日本共産党の硏究 (立花隆) : 빌리고 보니 하권이었는데, 상권이 없어서 못봤다....
  37. 日本國憲法の多角的檢證 (法學館憲法硏究所)
  38. 日本国憲法解釈の再検討 (高見勝利)
  39. 조선시대 왕실교육 (육수화)
  40. 조선총독부 법제 정책 (이승일)
  41. 注釈憲法 (伊藤正己,1919-)
  42. 창조 도시 요코하마 (野田邦弘,1951-) : 창조도시의 개념을 조선에 적용하는 데에 얼마나 고심이 필요한지 엿보게 해주는 책이다.
  43. 逐条解説·法の適用に関する通則法 (小出邦夫)
  44. 트로트의 정치학 (손민정) : "뽕짝을 불러야지 시원하지, 뭐. 팝숑같은거는 아무리 불러도 가심에 와닿질 않잖어."(신신애 曰)
  45. 폐쇄병동 (帚木蓬生,1947-)
  46. 학교를만들자! (工藤和美,1960-) : 학교를 만드는 이야기. 그렇다고 개교하는건 아니고, 건물짓는 이야기다. 학교를 왜 이쁘게 만들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있으면 읽어라.
  47.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 (김민수) : 잼은 없더라.
  48. 한국 사회의 신빈곤 (한국도시연구소)
  49. 한국의 가난 (김수현)
  50. 헌법 (이국운)
  51. 憲法その眞實 (坂本修,1932-)
  52. 憲法の基本 (小泉洋一,1957-)
  53. 헌법논쟁 (長谷部恭男,1956-)
  54. 헌법재판소,한국현대사를말하다 (이범준,1973-) : 근간이었던듯. 헌재의 전사 후사 이면사를 담았다.
  55. 憲法絵本 (橋本勝)
  56. 芦辺憲法学を読む (高見勝利)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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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화라고 적었는데, 밤에 피는 꽃이 아니고..... 내 천안터미널, 이른바 야우리는 몇번 가긴 했는데. 홈페이지를 살펴보니까 게시판에 있는 글이 대개 여직원 나빠요 왜 돈 던져요 왜 반말해요 싸울래요 투닥투닥하는 글이 대부분이다. 그래도 좀 살펴보다가, 심야에 빵터진 글이 있다.

한 이용자님(헐~님)께서 "여기 서비스가 왜이래요?"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길래, 나는 예의 여직원글인줄 알았다. 그런데 내용이 이렇더라.

여기는 전화를 걸때마다 안받네요 ㅡㅡ;;

무슨 배짱이신지 ㅡㅡ;;

이거때문에 웃은건 아니고, 답변을 보고는 한참을 웃었다.

답변 보기(누지름)


뭔 배짱이........................ 뭔 배짱이 뭔 배짱이 뭔 배짱이 뭔 배짱이 뭔 배짱이 뭔 배짱이 뭔 배짱이 뭔 배짱이 뭔 배짱이 뭔 배짱이 뭔 배짱이 뭔 배짱이 



......CS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실감하는 순간이다.

이런 글도 있다.

천안 고속버스터미널 뭐하는겁니까??

학생이 충주대까지가는데 막차가 끈켜서 가는길에 세워달라는데 그게 왜 안된다는겁니까??

당신내들 그런식으로 장사해서 남는게 뭐가있나요??

손님한테 불친절하고 드러워서 버스안타고 택시타고 다닌다

사실 그 밑에 글이 하나가 더 있다.

더보기


기사님이십니까..................................


이것말고 "발음상 혼선되는 노선명은 주의해주세요"라는 표제의 공지글도 하나 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안 터미널 입니다.
매표창구에서 발음상 또는 어감상 혼선으로인해 인식의 오류가 발생하곤 합니다.
아래 노선의 승차권을 끊으실때에는 해당노선의 소재지 도 까지 말씀해주시면 혼선을 줄일수 있습니다.

      ****  아     래 ****
  1.  청주, 전주, 경주, 영주, 원주, 공주
  2.  인천, 이천, 진천, 춘천
  3.  증평, 신평 / 서천, 서초동
  4.  부산, 부천 / 당진, 강릉
  5.  공주, 공도 / 홍성, 동서울
  6.  안성, 안산, 아산 / 광정, 광천
  7.  대천, 대전, 제천
   8. 사 례 : "충북 청주", "전라도 전주", "경기도 이천", "인천광역시","당진 신평", "충북 증평"  등으로  말씀해주시면 소통 오류로 인한 시간낭비 및 자원낭비를 줄일수 있습니다.

참으로 현명하지 않을 수 없다..... 2번을 정신없이 읽다보면 몽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니 시도해보아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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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국제농담컨퍼런스 2009 발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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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지방선거가 끝이 났다. 이번 선거의 관전 포인트는 모처에서 이야기한대로, ① 개표기가 고장난 서초구의 표안풀기, ② 야식먹던 송파의 표안풀기, ③ 동작관악의 한명숙 표풀어주기, ④ 괴상하게도 오늘은 문수가 좋더라니(문수좋은 날), ⑤ 유시민 출구조사 누설... ⑥ 안상수 선거포기 귀가선언, ⑦ 골프장 부킹 마감, ⑧ 서초급 잠수함에서 쏜 1번 어뢰에 도봉에서 물기둥이 솟아오른 사건 등등이라고 하겠는데.

그 가운데 문수좋은 날과 관련하여 경기도에서 18만 무효표에 대해 난리가 났길래.. 여하간 사건의 개요는 무효표가 18만 3387표가 나왔는데 이게 정권의 음모아니냐, 심상정의 표다, 선관위의 농락이다.. 뭐 이런 추측성 던지기가 난무한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는걸 아무도 감을 못잡길래 약간 분석을 하여보면.

경기도에서 김지사의 득표율은 52.20퍼센트, 유전장관의 득표율은 47.80퍼센트다. 이 비율은 유효표 기준이고, 표차이는 딱 19만 1600표, 득표율차이는 4.4퍼센트다. 그런데 여기서 무효표가 4퍼센트다! 하는 주장이 나오는데, 여기서 4퍼센트라는 비율은 저 유효표 기준의 계산이 아니라 무효표를 포함한 투표수의 계산에서 나온다. 투표수로 계산하면 김지사는 50.09퍼센트, 유전지사는 45.87퍼센트. 그리고 격차는 4.04퍼센트로, 이른바 무효표 4퍼센트라는 공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 사태는 정상적일까. 투표자 126만 명의 경북에서 무효표는 4만 8천표가 나왔다. 투표자 453만명의 경기에서 18만 3천표가 나왔다. 어떤가, 감이 오시는가. 비율이 3.8퍼센트다. 경기도의 4.04퍼센트와 큰 차이가 없다. 경기도의 18만 무효표는 정상적인 범위에서 충분히 나올 수 있는 무효표란 이야기다. 그래도 못믿는 분들을 위해, 정말 그 표들이 어디서 나왔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평균 무효표 비율인 4.04퍼센트 이상인 지역을 순서대로 정렬하고, 이른바 유전장관이 김지사를 꺾은 지역에 푸른 띠를 둘러봤다. 감이 오시는가. 오히려 무효표 비율이 엄청나게 높은 지역은 연천, 가평, 여주, 포천, 안성, 동두천과 같은 김지사의 강세지역이다. 오히려 유전장관이 득을 본 것. 그래도 못믿을 사람이 있으므로, 이번에는 비율이 아니라 단순히 무효표의 숫자로 정렬해보았다.



무효표 5천 표 이상 나온 지역이다. 어떤가. 김지사와 유전장관이 거의 비등한 고양덕양을 제외하면, 상위 5개 시에서 김지사가 강세를 보인다. 물론 이 지역은 7천표대 이상이다. 이 밑으로 가보면 5천표대를 제외하고는 또 김지사 강세지역이다. 미덥지 않으면 선관위 개표 페이지를 참조하시기 바란다.

이정도 하면 믿을만도 한데, 이제 통계의 전체를 보지 못한다는 이유로 또 안믿는 분들이 계신다. 그런 분들은 선관위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그리고 전체 판세로 분석할 때, 경기도 44개 선거구 가운데 백중세를 유지한(김지사와 유전장관의 득표율이 1퍼센트 이내 차이) 지역 2개 선거구를 제외하고, 유효표기준의 득표율과 전체 투표수 기준의 득표율이 모두 1퍼센트 이상 차이가 나는 42개 선거구 가운데, 유전장관이 우세를 보인 선거구는 모두 14개, 김지사가 우세를 보인 선거구는 28개다.

그 중에서 유전장관이 우세한 선거구의 평균 무효표 비율은 3.98퍼센트, 김지사가 우세한 선거구의 평균 무효표 비율은 4.69퍼센트다. 오히려 유전장관이 득을 본거라니까? 전자의 무효표가 6만 5천여 표, 후자의 무효표가 11만여 표다. 문제는 무효표가 아니라, 후보를 잘못 선택한거에 있는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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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 전문(前文)의 분석[각주:1]

1. 언어적 분석[각주:2]
 1) 축어 : 표준어 이상으로 고풍적이며 일상 통용되지 아니하는 장중한 문체로 헌법의 생성 내지 제정과 그 효력에 관하여 기념하는 언어를 쓴다.
 2) 평상어
 3) 전문어

2. 이론적 분석[각주:3]
 1) 헌법문화로서의 국민에게 접근하는 언어문화
 2) 자기이해의 표명과 기초정립으로서의 전문
 3) 시대 속에서의 교량적 기능
 4) 다른 헌법규범(조문)과의 내용적 조화

생각건대, 인간의 생명은 人間의 實存 그 자체이고 모든 기본권의 理論的 前提이며 本質的 內容을 이루고 있다. 死刑이 아닌 終身刑으로 하더라도, 國家의 安保·秩序維持·公共福利에는 하등 지장이 없을 것이며, 인간의 尊嚴性과 基本權의 본질적 내용의 침해금지를 고려할 때 저자는 死刑制度가 違憲이라고 본다. 그러나 극악무도한 범죄행위로 모든 국민이 용인할 수 없는 경우에는 選擇的으로 사형을 용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각주:4]
  1. 이하 구병삭, 신헌법원론(제3전정판), 박영사, 1996년, 166~167쪽. [본문으로]
  2. P. Häberle, Präambeln im Text und Kontext von Verfassungen, in Joseph Listal und Herbert Schambeck, Hrsg. Demokratie und Bewährung, FS. für Johannes Broermann, S.227ff. [본문으로]
  3. P. Häberle, a.a.O., S.229ff. [본문으로]
  4. 이하 구병삭, 전게서, 546쪽. 414쪽에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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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결산. 2009년 6월 21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대출 목록이다.

  1. 참을 수 없는 월요일 (柴田よしき, 1959-)
  2. 리인카네이션 (樹林伸, 1962-)
  3. 절대 울지 않아 (山本文緒, 1962-)
  4. 내 안의 특별한 악마 (姫野カオルコ, 1958-)
  5. 친구가 되기 5분 전 (重松清, 1963-)
  6. 사슴남자 (万城目学, 1976-)
  7.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海堂尊, 1961-)
  8. 憲法概観 (小嶋和司)
  9. 注釈憲法 (野中俊彦)
  10. 日本国憲法解釈の再検討 (高見勝利)
  11. (新) 国会事典 (浅野一郎)
  12. (Jurist増刊) 憲法の争点 (大石眞)
  13. 皇室事典 (皇室事典編集委員会)
  14. (朝鮮時代)山水畵 (국립광주박물관)
  15. 梁柱東全集 (梁柱東)
  16. 승자의 저주 (Thaler, Richard H., 1945-)
  17. (일본) 법제업무 편람 (한국. 법제처)
  18. 만세전 (염상섭, 1897-1963)
  19. 日本の自立 (北岡伸一, 1948-)
  20. 憲法9條 (畠基晃)
  21. 일본은 왜 평화헌법을 폐기하려 하는가 (伊藤 成彦, 1931-)
  22. 憲法第9條と自衛權 (粕谷進)
  23. 平和憲法の理論 (山內敏弘)
  24.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 (小田部雄次, 1952-)
  25. 옥중서신 (김대중, 1924-2009)
  26. 平和基本法 (前田哲男)
  27. 自民党 (北岡伸一)
  28. いまこそ輝け平和憲法 (石村善治)
  29. 憲法九条を沖縄‧アジアから見つめる (饒平名長秀)
  30. 護憲の論理18のポイント (小倉正宏)

금번에도 몇권 안되므로 총평만. 주석헌법(9번)이 유히카쿠에서 나온 책인데, 전문~9조까지 되어있다. 론문쓸 때에 많이 보았는데 참 좋은 책. 그 가운데에도 다카미 가쓰토시(10번 저자)의 기술이 탁견이다. 황실사전도 체계적으로 보기 좋게 정리가 된 책이다.

국보 양박사 전집은 참 재미있는 책이다. 양박사 책 안보고 누가 문학을 하나. 그 외에 야마우치의 23번책도 탁견이다. DJ의 옥중서신도 흥미로운 책이다. 기타오카 신이치의 자민당은 내가 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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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내용이 없다. 글에서 밝힌 대로 천학하고 졸필인 탓이다. 그래도 학내에서 공식적으로 쓰는 글이라 내 글의 색채가 많이 죽어있다. 학교가는 길에 민주주의가 죽었다길래 빡쳐서 쓰고는 저녁에 퇴고한 뒤에 업로드하였다. 명일 효단이나 정오 전후로 붙일까 하는데, 먹고살만한 문제나 총학생회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지면이 허락치 않아서 쓰지 못하였다. 이 부분은 나중에 따로 언급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저 내가 생각하는 내용과 궁금한 내용, 그리고 학교에 대한 애정을, 정확히는 사상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고자 노력했다. 얼마나 전달될지는 모르겠다. 글에서 언급한 단편선 학우 덕분에 대자보까지 붙일 생각을 했다. 보실지 모르지만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나중에 방명록에다 써야지.

폰트가 알만한 사람은 아는 조선일보명조체다. 조선일보를 좋아하진 않지만, 획이 깔끔해 좋아한다. 경희대 정통 보수본류, 우익 김천어에 걸맞지 않은가. 그렇다고 조선일보계열 우익은 아니다, 차라리 동아일보계 우익... 여하간 일반학우만이 대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을 언급하려고 해봤는데, 역시 얼마나 전달될지는 모르겠다. 솔까말 궁금하긴 한데 차마 대놓고 물어보지 못하는 부분을 목숨걸고 던져봤다. 심야에 칼맞으면 어떡하지 덜덜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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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上)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의 배경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中)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와 주변 인물


 실증의 주구로서 자료를 찾느라 한달이 걸리었다. 내가 장황하게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으니 결국에 글이 끝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내용을 결국 대폭 생략하고 중심적인 내용만 훑어보기로 하겠다.

 이른바 민족사학측이 주장하는 내용 일곱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군의 부정이 사실인가. 입수한 1974년도 『인문계 고등 학교 국사』(문교부 지음, 펴냄 / 한국교과서주식회사 되박아펴냄)와 1979년에 발행된 『고등 학교 국사』(국편 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 편찬)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자는 누가 지었는지 잘 안나오지만, 후자의 경우는 연구진에 최영희 위원장을 위시하여 고병익, 김원룡, 백낙준, 신석호, 이광린, 이기백, 이병도, 전해종, 최완기, 한우근 교수를 비롯하여 그 외에도 수십인이 있고, 집필진에는 고대 및 고려편을 김철준 교수가 담당하였다고 나온다. 물론 김철준 교수에 대하여는 이전의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두 책 모두 내용이 대동소이하니 같은 사람이지 싶다. 여하간 그 10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과 곰의 변신인 여인 사이에서 출생한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는 단군 신화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단군은 제사장이라는 뜻이며, 왕검은 정치적 군장을 뜻하는 것이므로, 단군 왕검은 곧 제정 일치 시대의 족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군 신화에 나타난 토테미즘이라든지, 바람신이니, 구름신이니, 비신이니 하는 것은 이미 신석기 시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나, 청동기 시대에 들어오면서는 이러한 여러 신들을 통솔하는 하느님(천신) 사상이 성립된 것이었다.

 천신의 아들이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하는 단군 신화는 우리 나라 최초의 건국 신화로서, 당시 고조선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세계관의 구실을 하였으며, 뒤에 민족 문화 전통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고조선은 주(周)와도 교섭을 가지면서 점차 동방 사회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1974년판: 우리 나라에서 ~ 고조선은 주나라와도 교섭을 가졌으며, 중국 춘추 시대에는 남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영역을 차지하여 동방 사회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을 부정한 바는 없었다. 영토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나 중심지에 대하여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지도 또한 없어서 딱히 한반도 내에 한정하고 있지는 않으며 분명 만주를 차지하였다고 언급(1974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뒤에 [고조선의 변천] 파트에서는 "처음에 산뚱 반도와 북중국 방면에 있던 동이족들은, 전국시대에 중국에서 각 지방의 소국가들을 통합하는 파동이 일어나자,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해왔다."고 하여 분명 위치까지 소개하고 있다.

 백제의 요서경락, 즉 이른바 민족사학측이 반영해달라고 주장하던 "백제가 3~7세기 동안 북경에서 상해에 이르는 중국의 동안(東岸)을 통치하였음."이라는 주장이나 "고구려, 신라 특히 백제 사람들이 일본문화를 건설하였음."이라는 주장은 정말로 당시의 교과서에는 없었는가.


 한편, 4세기 중엽 진이 약화되었을 때, 백제는 부여족이 살고 있던 랴오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당시 백제는 기마 민족 세력이 일찍부터 진출하여 식민지 세력을 세워 놓은 일본 지역, 그리고 랴오시 지방, 산뚱 반도 등지를 본국과 연결할 수 있는 고대 상업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974년판 교과서 19쪽)

 한편, 4세기 중엽 진이 약화되었을 때, 백제는 부여족이 살고 있던 요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기마 민족 세력이 일찍부터 진출하여 각 지방에 식민지 국가를 세워 놓았던 일본 지역, 그리고 요서 지방, 산뚱 반도 등지와 본국과를 연결하는 고대 상업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1979년판 교과서 22쪽)


 분명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교과서에 보충설명을 붙인 방통고등학교 교재에서는 "근거는 중국측 문헌인 송서, 양서 등의 백제전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모두 요동의 동쪽 천여 리 지점에 있었는데, 후에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백제는 요서를 점거하였다." 라고 기록한 데 있다."고 근거까지 달아주고 있다. 문화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일본에 건너가 각처에서 식민지를 개척하였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사람들이 가지고 간 새로운 문화가 그 곳 토착 사회를 자극하여 일본의 고대 국가를 성립시키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가장 컸는데, (중략) 한편, 고구려도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74년판 교과서 36쪽)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일본에 건너가 각처에서 그들을 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사람들이 가지고 간 새로운 문화가 그 곳 토착 사회를 자극하여 일본의 고대 국가를 성립시켰다. 그 중에서도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가장 컸다. (중략) 한편, 고구려도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79년판 교과서 44쪽)


 여기서 언급하는 교과서 인용에는 띄어쓰기 한 획 일 점도 고친 바 없는 원문 그대로이다. 서울대학 사범대를 뒤져보면 다 튀어나오는 교재이니 찾아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 외의 주장인 신라의 처음 영토는 동부 만주라느니 하는 부분은 언급치 아니하겠다.

 여하간 잡론을 한참 하다가 드디어 안 박사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략)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현재 우리의 역사가들은 대개 일본의 식민사관 이러한 허위의 식민사관을 배웠던 까닭에 오늘날 우리의 국정국사교과서를 완전히 일제 식민사관의 복사판을 만들어 두었읍니다. /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찾기 위하여선 우리는 우리의 옛이제(古今)의 책들은 물론이려니와 중국의 옛이제의 책들을 널리 또 깊이 연구하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이러면서 동이(東夷) 글자에 대한 설명을 비롯하여 너무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위원장이 한 말씀을 올렸다.


 안호상박사님! 이 국사청원은 오늘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공청회 기회가 있고 또 그때 진술할 기회가 또 있읍니다. 오늫 안박사님이 제일 먼저 나오신 것은 청원을 신청하신 분이기 때문에 국사교과서 내용의 시정될 그 부분을 중심으로 해서 어떻게 잘못되었다는 그 점만 오늘은 중점적으로 해주시고 그 뒤에 더 넓고 깊은 문제는 또 기회에 공술할 기회가 있을 것같습니다. 시간 제한도 있고 다음 공술할 분도 있고 해서 그 전문적인 분야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 주시기 바랍니다. 교과서 중심으로 또 청원낸 중심으로 말씀을 해 주세요.


 그리하자 안 박사가 다시 공술을 시작한다.


 그러면 교과서중심으로 말씀드리겠읍니다. 1974년에 국정국사교과서를 낼 적에 단군의 역사와 연대표를 빼어 버렸읍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이 국사교과서가 망국적이요 민족반역적이라고 떠들었더니 작년판과 금년판에는 서기 앞 2333년전에 단군 한배검이 고조선 임금이 되었다 해 놓고 교과서 글에는 오로지 단군신화만 기록했지 단군역사는 한 마디 말도 없읍니다. (중략)

 일제교육의 중독자와 공산주의의 광신자와 외래종교의 맹신자와 또 단군역사의 문외한을 빼고는 국 한문으로 단군역사를 쓴 큰 학자들이 많은데 그들의 이름을 대강 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교헌 어윤적 장도무 박은식 신채호 최남선 정인보 정렬모 안재홍 문일평 권덕규 박형표 최동 문정창 정명악 등입니다. (중략)

 1974년과 1977년의 국사교과서에선 고조선이 평양 대동강가에서 일어났으며 또 고조선의 문화중심지가 대동강가라 하였읍니다. (중. 국사 2, 9면:고. 국사 9면) (후략)


 여하간 이런 발언이 죽 이어지고 다시 한배검 단군 운운하다가 다음으로 당시 국편 최영희 위원장이 진술한다.


 지금 바로 전에 말씀해 주신 안박사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또 가까운 사이고 어떤 회에 예컨대 무궁화회같은 데에서 제가 강연을 할 때에는 같이 들어 주시고 하는 분이었읍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제가 이렇게 서게 된 것은 저 개인으로는 몹시 서글프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 모임이 또 이 공청회를 통해서 우리의 역사와 또 교과서가 올바르게 발전해 나가는 한 계기가 된다면 민족과 우리의 역사학을 위하여 참 좋은 일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읍니다. (중략)

 돌이켜 우리나라에 있어서 해방이후에 우리나라 국사학계를 간단히 저 나름대로 정리해 봤읍니다. 해방후 우리 국사학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새로운 발견이 많이 됐읍니다. 여기에는 고고학뿐만 아니라 고대사에서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이제까지 우리가 몰랐던 많은 사료가 발견됐읍니다. 여기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감춰졌고 발표못한 것도 많지만 우리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많이 찾아냈읍니다. (중략)

 이제까지 우리 국사학자들은 솔직이 말씀드려서 가난속에서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연구를 계속해 왔읍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이러한 학자들이 식민사관의 앞잡이 내지 주류라고 규탄될 때는 저 스스로 부덕한 것을 느끼고 몹시 서글프기 한이 없읍니다. 지금 청원내용안에 “조선사”라는 것이 지금 나와 있읍니다. 그런게 이것이 그 “조선사”가 일제들에 의해서 식민사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관념적인 조선사 같기도 하나 여러 가지 책을 읽어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조선사”로 알고 있읍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조선사” 특히 고대사 부분을 이 책을 인용해서 연구하는 학자는 한사람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미 원전 즉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원전을 자꾸 끄집어내고 새롭게 해석해 나가고 있읍니다. (중략) 이미 중국의 원전에서 잘못된 것 예컨대 일본서기나 일본의 고사기에서 잘못된 것을 우리는 시정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우리 학문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승의 학설을 뒤집고 또 시정해 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가르친 이세의 역사학도들은 또 그렇게 저희들의 학설을 시정해 나가게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돼야만 새로운 학문이 이루어질 줄로 압니다.

 여기에 청원서에 제3에 구체적인 지금 안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국사상의 사실과 현행 국사교과서에 잘못된 내용이라는 것이 있읍니다. 한데 여기에 페이지수가 잘못되어 있읍니다. 이 교과서에 페이지수가 왜 잘못되어 있느냐하면 이것은 현행 교과서가 아닙니다. (후략)



 여하간 이런 후에 드디어 이른바 민족사학계에서 서울대 박시인 교수가 나온다.


 (전략) 일제치하에 저들이 조작한 조선사라는 것을 전공한 분들이 국사학교수가 그 조선사를 편찬할 때에 가담했던 분들이 국사편찬위원장도 되고 그 분들이 쓴 국사교과서를 검인정교과서로서 문교부가 인정해서 사용해 왔읍니다. 그러한 결과 국민들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불행하게 생각하고 일본을 숭상하고 미국사람을 좋아하고 북한에서는 소련을 좋아하는 경향이 나타났읍니다.

 그러므로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작고하신 박대통령께서는 여러번 교육대회에 나가셔서 국적있는 교육을 해달라고 역설하였읍니다.

 그러나 국사교과서가 일제식민사관을 그대로 담고 있으므로 효과가 없기 때문에 드디어 68년 12월 5일에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했읍니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상부상조 협동해서 새 역사를 이룩하자고 하지만 협동하지 않는 기풍과 반정부적인 언동이 계속돼 왔읍니다.(중략)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왜 교과서에다가 싣습니까? 우리 조상은 곰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 그와 혼인했다고 하였으니 국민학교 교실이 얼마나 떠들겠읍니까? 웃음판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실어서는 아니됩니다. 이 이야기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의 아들 천자라는 뜻입니다.(중략)

 태조성은 이씨요 휘는 旦이고 자는 尹晉, 즉 임금이 앞으로 전진한다는 뜻입니다. 이성계라고 하는 것은 일본사람들이 한 말을 지금도 그대로 입버릇처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태조대왕은 旦, 지평선 혹은 동해 지평선에 아침해가 떠올라 오는 때이고 나라이름은 조선국호와 태조의 이름이 딱 맞습니다. sunrise, morning bright에는 사대주의가 없읍니다. 대주의라는 국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중략) 문제가 있으면 씨족회의에서 결정했다고 한 것은 인민대회나 인민재판을 한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제공한 것입니다.


 아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이야기나 쓰려니 잼이 없어서 못쓰겠다. 궁금하면 그냥 공청회 회의록을 보아라 다음이다.

1차 회의록 / 2차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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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上)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의 배경에 이은 제2부입니다.


 국편에서 한 방 드시고, 재판에서도 한 방 드셔 총 두방을 드신 안호상 박사는 다시 재야(?)에서의 활동을 강화해 갔고, 특히 교육현장과 군대를 중심으로 강연도 하고 책도 주고 하면서 다시 전력(?)을 보충한다. 마침 문교부가 1970년~1981년에 걸쳐 초·중·고의 단계적 교육과정 개편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피격 이후 등장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갑자기 「교육의 정상화 및 가열 과외 해소 방안」을 발표해 버렸다. 그 내용의 큰 골자로는 과외금지와 함께 교육량의 축소와 수준의 하향이라는 것인데, 그 덕에 문교부는 단계적 개편 대신 새로운 개편안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다시 안 박사를 필두로 하는 이른바 재야사학자들은 이번에는 국회에「국사교과서내용시정요구에관한청원」을 제출한다. 당시 청원을 소개한 사람은 총 19명인데, 대충 소개를 하자면 5공의 실세라는 권정달 의원, 한국일보 정치부장과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거쳐 5공 시절(후일이다)에 KBS 사장과 문화공보부 차장을 지낸 박현태 의원[각주:1], 민정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지내는 조종호 의원, 중정 기조실장과 민정당 사무총장 및 원내총무를 지낸 이종찬 의원, 반공검사로 이름을 떨치다가 나중에는 대표적인 보수우익으로 불리던 오제도 의원, 민주정의당 정책위의장을 지내고 요새는 소망교회 계열로 알려진 이진우 의원, 민정당평화통일위원장을 지낸 이상선 의원, 5·16 당시에는 진보언론계를 대표하다가 5공때 언론 통제에 가담하였다고 비판을 받는 송지영 의원[각주:2], 대통령 특사와 체신부 장관을 지낸 김기철 의원, 관제야당으로 유명한 민한당의 전국구 1번 유옥우 의원, 그다음 민한당 전국구 2번 이태구 의원, 민한당 전국구 4번 손태곤 의원, 민한당 전국구 6번 정규헌 의원[각주:3], 민주한국당 문교공보위원장을 지낸 임재정 의원, 민주공화당중앙위원을 거쳐 나중에는 신민주공화당에서 대표를 맡는 국민당 신철균 의원, 요새는 월간 디플로머시(DIPLOMACY) 회장으로 더 유명한 임덕규 의원, 나중에는 국회부의장을 지내는 김종하 의원, 국회 내무위 간사를 지낸 조덕현 위원, 주일공사로 있으면서 총련 성묘단 운동을 지휘해 유명해 진 조일제 의원까지. 실세부터 실세가 아닌 사람까지 19명이 소개하여 1981년 8월 31일에 드디어 문공위에 제출된 청원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현재 사용하는 교과서에 일제시대 식민사관에 의하여 왜곡된 내용이 많아 올바른 국사교육을 해치고 있으므로 이러한 허구적인 내용이 시정되어야 한다.

 · 단군과 기자는 실존 인물임.
 · 단군과 기자의 영토는 중국 북경까지였음.
 · 왕검성은 중국 요령성(遼寧省))에 있었음.
 · 락랑군(樂浪郡)은 중국 북경지방에 있었음.
 · 백제가 3~7세기 동안 북경에서 상해에 이르는 중국의 동안(東岸)을 통치하였음.
 · 신라의 처음 영토는 동부 만주이고, 통일신라의 국경은 한때 북경이었음.
 · 고구려, 신라 특히 백제 사람들이 일본문화를 건설하였음.


 이러한 내용은 7번 외에는 과거에 국편에 낸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후에 무슨 협의를 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회의록 같은 것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국사교과서 청원은 특히 1981년 11월 24일에 열린 제108회 국회 제17차 문교공보위원회 회의록에서 협의를 거듭했고, 공청회를 여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일시, 장소, 진술인 선정 등에 위원장과 간사에게 일임하여 개최하기로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아, 드디어 친일부역매국식민사학주구청산의 역사적인 날이 밝은 모양이다. 1981년 11월 26일 목요일에 열린 제108회 국회 제19차 문교공보위원회는 위원 21명(전원이 몇 명인가는 알 수 없더라..)에 그냥 의원도 7명이나 참석하고, 문교부 장관(당시 이규호씨)에 차관(당시 정태수씨)[각주:4]에 황철수 장학편수실장[각주:5]에 정태범 문교부 편수총괄관까지. 이 사람들은 차치하고, 이 날 참석한 사람은 한국교육개발원 홍웅선 원장을 비롯하여 이른바 재야사학 측의 안 박사(국사찾기협의회 회장이란 직함이었다.)와 박시인 교수[각주:6]였고, 이른바 식민주구측은 국사편찬위원회 최영희 위원장[각주:7]과 서울대 김철준 교수, 그리고 동국대 이용범 교수이다. 깊이 보지는 않으려고 했으나, 이들에 대해서 좀 설명하는 것이 식민사학주구론과 얼마나 다른지를 언급하기 위해서는 좀 부연을 하여도 괜찮다 싶어 적는다.

 김철준 교수는 서울대 인문대 교수로 1948년 서울대 사학과 졸업 후 국립박물관 학예관을 거쳐 단국대, 연세대, 서울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김철준 교수를 이기백 교수와 함께 이병도의 수제자라고 언급하면서 이 세 명 밑에서 우리 나라 식민사학계의 주류가 다 나왔다는 주장이 많다. 경북대학교 이영호 교수의 논문 「일계 김철준 : 해방 후 한국고대사학의 개척자」(한국고대사연구 53, 2009.3.)의 내용 일부를 길지만 인용해본다.


 일계 김철준은 이기백과 함께 해방 후 한국고대사학계를 이끌어 온 쌍벽이라 할 만하다. 해방 직후의 혼란한 시기에 서울대 사학과를 선후하여 졸업한 이들은, 인생의 동반자인 동시에 학문적 경쟁자로서 한국 고대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략) 그는 문화전통에 관심을 경주하여 박은식, 신채호 등 민족사가를 높이 평가하면서, 일본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문헌고증학은 민족의 시대적 사명을 외면한 식민지체질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단편적인 자료의 고증을 일삼는 문헌고증학으로는 문화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학위논문이며 주저서인 『한국고대사회연구』에는 그의 대표작인 첫 논문 「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이 제외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인류학에 바탕을 둔 그의 연구는 이미 신라사의 실제와 일정한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는 신라말 고려초를 한국사의 전환기로 파악하였다. 나아가 고대사회와 중세사회의 차이점을 친족집단의 변화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시론으로 발표된 그의 견해는 무리한 점이 많아 여러 연구자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학계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일부 제자들은 그를 떠나거나 경원시하였다. 처음 그의 영향을 받아 사회인류학의 지견을 원용하여 신라 골품제사회의 혈족집단의 의의를 추구했던 이기동이나, 종교사회학에 관심을 두면서 고대사상사, 특히 불교사상사를 연구하고자 했던 김두진은, 이후 인류학적 이론에 바탕을 둔 고대사연구를 접었다. 종전 자신들의 연구방법론을 일대 전환한 것이다. (중략)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인류학적 연구와 실증적 연구, 직관적 연구와 분석적 연구 사이의 관계는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하겠다. 실증에 바탕을 둔 이기백의 사학이 돋보였던 것은 이 때(1980년 즈음)였다.

 동료, 제자들이 『김철준박사 화갑기념 사학논총』(지식산업사)을 간행한 것이다. 이는 4ㆍ6배판 970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으로, 모두 34편의 논문이 실렸다. 그러나 한국고대사 논문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있던 노태돈이 쓴 글 등 모두 4편에 불과하였다. 학계에서의 그의 위상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주요 고대사학자들을 망라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정작 자신이 지도했던 학계의 핵심적인 여러 제자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그는 재혼을 하고, 인문대 학장과 한국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988년 8월 정년 때에도 고대사를 전공한 제자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정년기념호인 서울대 국사학과의 기관지 『한국사론』제19집에 실린 고대사 논문은 전체 16편 중 3편이었다. (후략)



 이른바 재야사학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친일부역매국식민사학의 중시조의 위치가 어떤지는 가늠할 수 있겠다...

 이용범 교수는 동국대 사학과 교수로, 만몽사(滿蒙史)를 연구하다가 「중세 동북아세아사 연구」로 197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첨성대를 천문대가 아닌 제단(祭壇)이라고 본 견해와 신라 고가(古歌)인 처용가의 처용이 나당항로(羅唐航路)에서의 고대(古代) 대식상인(大食商人:아라비아 상인)들의 행적으로 볼 때 대식상인이 틀림없다는 견해로 유명하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해사를 연구하는 임상선 연구위원의 「취아 이용범의 만몽사 연구와 동북공정」(『동국사학』 제42집, 2006년. 동국대학교 사학과 창립 6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논문.)의 일부를 인용하면,


 취아 이용범 선생이 본격적으로 만주, 몽고사 연구에 나선 것은 대학 3학년 초, 동국대학교 사학과 유급조수로 학교에 돌아오면서부터이며, 한국전쟁 때 개명사판 요금사 3사의 역사책 2권을 손에 쥔 것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필자는 학부 4학년 때 발해사 연구성과를 정리한 선생의 글을 읽고,(이용범, 발해사연구의 회고와 국사, 한국사상, 1964.) 졸업논문으로 발해사 인식의 시대별 추이 : 당시의 인물과 사서를 중심으로(1986)를 작성한 후, 대학원에서의 학위논문 주제를 상의하기 위하여 선생을 뵈온 적이 있다. 당시 선생은 "할 것이 없어!"라고 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발해사 중에서 중요하면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라며 주신 주제가 바로 '발해의 천도'였다. (중간 생략)

 고조선의 서쪽 경계와 관련하여 중요한 지점인 위략(魏略) 만반한(滿潘汗)을 종래 패수, 즉 금일의 청천강이라 하여 연이 이곳까지 영토를 개척한 것이라는 학설은 일본의 현대 동양사학을 개척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와 몽고학 대가 야나이 와타리(箭内亘) 두 사람의 공동 주장이나, 그 권위에 눌려 추단 과정에서 범한 허다한 독단과 불합리한 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학계에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이 영향 밑에서 성장한 몇몇 우리 학계의 선배들도 또 그대로 승복함으로써 이 설이 발표된 지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국사의 한 구석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진(秦)의 장성의 요동의 지점에 대해서도, 현재 중국학계의 통설인 황해도 수안까지 장성이 연장되었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예리한 비판을 하였다. 즉 진서(秦書)의 주장은 사료적 가치가 앞서는 위략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설이며 이 기사만을 근거삼아 진 장성의 종점을 한반도 내까지, 즉 황해도 수안까지 연장된 것으로 추측하여 단정하는 것은 아무런 방증이 될 문헌도 없으며, 진의 장성은 결코 현재의 요양(遙陽)을 넘지는 못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이용범, 고대의 만주관계, 한국일보사, 1976년.)



 또한 이용범 교수의 저서인 『중세 동북아세아사 연구』(아세아문화사, 1976년.)의 일부와 그 서평을 살펴보면,


 발해왕국자체의 구성이 고구려유민을 주체세력으로 이루어졌으나 문화와 혈연을 달리하는 이부족과의 복합국가로서의 취강성(脆强性)은 숨길 수 없는 사회였던 것이며, 이 왕국의 지배층인 고구려유민이 지연 혈연 또는 문화면에서 우리 국사와 밀접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한 민족 또는 국가로서의 의식에 강력한 작용을 하는 요소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발해사가 한 민족사형성에 있어서 거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공동추억체의식이 우리 국사에서 그 자취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연구, 27쪽)

 발해사연구는 우리 학계에서 열의를 가질만한 연구대상인 것은 틀림없으나 문제는 우리가 시도하는 바를 뒷받침할 뚜렷한 이론적 근거가 없는 한, 이와 같은 시도는 오히려 우리 국사에 공허한 내용을 첨가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일 것이다. 발해사를 국사체계에 넣는데 먼저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은 우리와의 추억공동체로서의 발해사연구가 더 진실하게 개척되어야 하겠다. (연구, 29쪽)


 여기에서 이박사는 발해사를 동북아시아사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고자 했다. 종래의 식민지사관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에서, 또는 신라를 유일한 왕통왕조(王統王朝)[각주:8]로 보았던 지난 날의 한국사체계를 탈피하는 새 민족사체계의 입장에서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고자하는 욕심은 이교수에게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박사는 한국에서 발해왕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시기가, 민족의 주체의식의 고조기에 있었던, 한국의 지난날의 발해관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와 같은 시도가 오늘날에도 이론상으로 많은 문제로 남아 있어서,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거론하여 냉철한 학자적인 자세를 재확립시키고 있다.[각주:9]


 그리고 그냥 재밌는 부분이 있어서, 임영정 교수의 「동국사학 60년의 성과」(『동국사학』 제42집, 2006년. 동국대학교 사학과 창립 6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논문.)의 일부를 옮기면,


 선생님은 천성적으로 급한 성격이었는데, 그것이 원고 집필과 식사시에 유감없이 드러났다. 원고 집필 자세를 보면, 양반다리로 앉은 채 방바닥에 엎드려 200자 원고자 한 권만 달랑 앞에 놓고 만년필로 세로 글을  쓰신다. 그 옆에는 담배갑·껌 종이·신문지조각 등이 널브러져 있는데, 이는 관계문헌과 사료를 밖에서 메모하여 온 것이었다. 또 집필된 원고를 보면, 어떤 문장은 한 단락이 200자 원고지 4~5매에 달하는데 도저히 간편하게 줄여볼 수 없으면서도 명문장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식사하실 때에도 미처 수저가 갖춰지지 않으면 손으로 집어 드시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주변 이야기가 길었다. 드디어 오후 2시 11분에 공청회가 개최되었는데, 우선 한병채 위원장이 인사말을 올리는데.


 우리 한민족은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내외에 표방하면서도 아직까지 일본역사보다 길어서는 안되는 부분인 한사군이전의 2천년이 넘는 고조선의 민족사가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채 오늘에까지 이르렀읍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조상이 누구인지 조차에 대한 국사학의 논의가 분분한 상태에서 국민교육용 국사교과서에까지 그 실체가 정리되지 못하여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조상의 뿌리를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국조 단군의 개국정신인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능력과 공민의 자질을 갖추게 한다는 교육의 기본목표에 어긋나는 결과를 자초하였읍니다. 따라서 조상의 얼과 민족정기를 이어받아 민주국가발전에 봉사하며 인류의 평화와 공영에 이바지하여야 할 교육문화는 그 파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후략)



 여하간에 위원장은 광복 후에 식민사관 대토론을 가져야되는데 그런 과정없이 오늘에 이르렀고, 학계가 국사학 연구발전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사실이나 업적을 지금까지 민족정사로서 론란이 되는 까닭이 그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점을 엄정한 중립적 입장에서 파헤치고 새 역사창조의 기본이 되는 사관 및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재인식·검토하여야 할 시점이라면서, 자주적 철학과 민족정통을 계승해 나갈 사관의 정립 위에 새로운 민족의 가치관을 확립하고, 새 문화 창달을 위한 국민의 윤리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한다.

 한위원장의 말에서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5공 색깔이 묻어나온다. 당연하다. 1958년에 사법과에 합격한 뒤로 판사, 변호사를 거쳐 국회의원으로 화려하게 입성한 뒤 81년부터는 민주정의당 의원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다가, 나중에는 국회 법사위원장을 거쳐 88년에는 새 6공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으로 올라갈 정도로 5공의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노무현 탄핵심판 당시 국회 소추위측 변호인을 맡기도 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또 애매하게 끊기로 한다. 사실 나도 실증사학의 뒤를 쫓는 사람이라 자료 수집에 무수한 시간이 걸리고, 또한 아직 수집하지 못한 자료가 허다하여 지금 모두 썼다간 나중에 보충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에 자료를 좀 더 보강하여 나머지를 쓰기로 약정하자니 여러 날이 걸리겠음이다. 하여간 다음 下편은 마지막 편이므로 공청회 내용을 모두 훑을 것이다. 아마도 下편 이후에 한 편을 더 써야하겠으니, 그 편은 보(補)로 하기로 하고 그에서 정말 "청문회 결과"가 나타났는지 살필 것이다.

 자료를 수집하면서 교과서뿐만 아니라 그 해에는 또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이 전해지고 파동이 일어난 일이다. 국회 문공위는 그 때에 결의문도 채택하기도 했고, 불매운동까지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국회와 이른바 친일부역매국식민사학의 모습이 하나 나타난 것이 있다. 사실 회의록만으로는 결과가 어떤지 알기 어렵고, 또한 지금 파악하고 있는 회의록이 전산화 이후의 것이라 코옴퓨타로 내용을 보니 찾기가 힘이 든다. 그리하여 겨우겨우 하나하나 찾아가며 제11대 국회 문공위 회의록을 거반 훑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 것이다. 글 쓰는데 실증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며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데, 하물며 국사 교과서나 역사 서술에 있어서랴. 곱씹을 필요가 있겠다.
  1. 윤종영씨는 박현열이라고 썼지만, 태(兌) 자를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인다. 11대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은 박현태 의원이다. [본문으로]
  2. 후일 KBS 이사장을 지냈는데, 이병도를 회개(?) 시킬 사람은 최태영 박사밖에 없다고 했다고 하면서 종종 등장한다. [본문으로]
  3. 윤종영씨는 정구헌이라고 썼으나, 박현태 의원과 마찬가지로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4. 여담이나 정태수 차관이 진주 출신에 이규호 장관이 진양 출신이라 당시 진주 마피아의 진주시 문교부라고 불렸다고도 한다. 그냥 웃겨서 첨언한다. [본문으로]
  5. 나중에 국회의원도 지냈다. 13대. [본문으로]
  6. 서울대 인문대 교수였으나, 국사학자는 아니다. 영문 전공하시다 나중에 「한국 상고설화의 연구 : 태양신화의 이동을 중심으로」로 국문과에서 박사를 받았다. [본문으로]
  7. 1950년에 고려대 사학과 졸업 후 해군사관학교와 숭실대를 거쳐 1972년부터 10년간 국편 위원장으로 활동. 1975년에 단국대 사학과에서 「임진왜란중의 사회동태에 관한 연구 : 의병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석호 교수의 제자라고 한다(과자신보:쿠키뉴스 부고). [본문으로]
  8. 정통왕조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9. 황원구, 「서평 : 이용범 저 , 한만교류사연구」, 『역사학보』 123호, 역사학회, 1989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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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

청문회 개요
  1. 친일부역매국식민사학의 결정판인 국사교과서를 바꾸기 위해 뜻있는 민족역사학자와 국회의원 19명의 요청으로 1981. 11.26 ~ 27 양일간 국회에서 "국사청문회"가 열렸다.
  2. 민족사학측은 안호상(安浩相), 박시인(朴時仁), 임승국(林承國) 3인이었고
  3. 식민강단사학측은 최영희(崔永禧), 김철준(金哲埈), 이용범(李龍範), 전해종(全海宗), 이기백(李基白), 이원순(李元淳), 안승주(安承周) 7인 이었다(이들 명단을 기억하여 그들이 쓴 역사책을 확인해보면 도움이 될 것임 : 전원 그 당시 국사편찬위원임)
  4. 식민강단사학측은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의 수제자"들 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음이며, 비전공자들과 토론하는 것이 격에 맞지 않아 불쾌하다는 둥 거들먹거리던 그들에게
  5. 국회는 국사편찬위원 전원 경질이라는 철퇴와 청문회 내용을 국사책에 반영할 것을 결정하였다.
    1. 이러한 민족 사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83년 국사교과서" 개편시 다음 사항이 반영되었다.
    2. 단군왕검의 고조선 개국사실 수록(역사로 인정)
    3. 백제의 대륙진출 수록
    4. 한 4군의 한반도 위치설 삭제 등
  6. 이것이 밀알이 되어 “제 2의 국사청문회”를 개최하여 "81년의 국사청문회" 보다 더 발전된 결과가 나와 매국식민사학 척결, 땅에 떨어진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른바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 개요라는 이름으로 나도는 글이다. 원전(?)이나 작자 미상으로, 어느 누가 저런 이야기를 처음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오오 친일부역매국식민강단사학측의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아마 은둔한 모양이다.

 저 국사청문회라는 것의 원 명칭은 국사교과서내용시정요구에관한청원(공청회)이다. 1981년 11월 26일 목요일에 열린 제108회 국회 제19차 문교공보위원회와 1981년 11월 27일 금요일에 열린 제20차 문교공보위원회를 묶어서 이르는 말일 것이다. 다행히 근래에는 의사록이나 회의록이 모두 PDF 화일로 만들어져 국회에서 웹상으로 다 까놓고 있으니, 원전(?)이란 것을 보고 진짠지 짜간지 알 수 있게 되었다.

 26일 오후 2시 11분부터 시작된 공청회는 당일 오후 9시 16분에 산회된 후, 다음 날인 27일 오후 2시 17분에 개의하여 오후 10시 36분에 끝이 났다. 총 15시간을 넘는 마라톤 공청회였으니, 그 로고(勞苦)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살펴볼 것은 이러한 초유의 공청회가 왜 열렸어야 했고, 그리고 저 개요라고 나돌아다니는 것(구글에서 검색하면 펌글에 펌글을 타고 돌아서 원본도 알 수 없다.)이 진짜인지 구라인지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박정희가 죽고 1980년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일당이 집권한 시기는 때마침 교육과정 개정 주기와 맞물려 4차 교육과정 준비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박정희가 유신을 통해 국사 교과서에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을 엄청나게 집어넣은 것처럼 전두환 일당도 국사를 비롯한 국책과목 교과서를 자신들을 미화하는 내용으로 채우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호상 등 이른바 재야 사학자들은 이번 개정이 고대사와 관련된 자신들의 주장을 교과서에 반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고 대대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유신 시기에 군에서는 5·16 군사반란 직후 혁명재판부 검찰부장으로 위세를 떨치다가 박정희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구속된 바 있는 박창암이 발행하던 <자유>라는 잡지를 정훈교재로 배부했는데, 이 잡지는 재야 사학자들의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군에는 젊은 영관급 장교들을 중심으로 왜곡된 형태의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당당하게 미국을 향한 민족의 자주성이나 작전지휘권 문제 등을 제기하지는 못하고 엉뚱하게 고대사에 심취해 대리만족을 구하고 있었다. 이들 군 요소요소와 보안사 등에 포진한 장교들은 “국사 교과서는 국민들에게 민족의식과 민족적 자부심, 긍지를 심어주는 민족 경전과 같은 것”이라며, 따라서 “국사 교과서 내용은 학문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입증할 수 없는 내용이더라도 국민교육용으로 필요하다면 수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약성경에는 믿을 수 없는 내용도 많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이를 자기들의 고대사 교과서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당시 문교부 편수관으로 국사 교과서 편찬을 담당한 윤종용의 회고록 <국사 교과서 파동> 참조).

 저런 회고가 있는데, 실제인지는 내가 군대를 안가봐서 모르겠다. 여하간에 1980년을 전후로 이른바 재야사학이라 불리는 세력이 급격하게 성장하기는 했다. 어차피 이른바 재야사학과 소위 강단사학이라고 불리는 집단(?, 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다.)의 대립이 국회까지 온 것은 안호상 박사의 영향이 크다. 일민 안호상 박사는 원래 철학박사인듯 하다. 독일 예나대학 박사인데, 귀국 후에 보전 교수를 지내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 동아대, 경희대(법인이사도 지냈다. 말년이지만.) 등에서 교수(강의를 했는지는 모르겠다.)도 지냈고. 안박사에 대하여는 초록불님이 상고하신 일이 있다. 자세한 것은 유사역사학 태두 중 하나인 안호상, 그는 누구인가?(누지름)을 참조.

 하여간 안박사를 비롯하여 임승국, 박시인씨 등은 안박사를 중심으로 원로 사학자 이병도 교수, 신석호 교수 등의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 참여 기록을 들어 이들은 친일파이며, 이들에 의하여 형성된 지금(당시라고 하면 되겠다.)의 사학계는 모두 식민사학의 부류라고 맹공하였다. 그러나 국사학계는 별 반응이 없었다.

 안박사는 이에 감응을 받았는지, 국사의 고칠 점과 국사 교과서 내용 시정에 관한 건의서를 대통령, 국무총리, 문교부장관에게 제출하게 된다. 문교부도 나서 건의서를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이라 약칭.)에 보내고 협의하여 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관계학자 20여 명과 함께 대응방안을 논의하였다. 이 때에 참여한 사람은 국편위원으로 국편 최영희 위원장, 서울대 고병익 교수, 동대학 김원룡 교수, 동대학 김철준 교수, 동대학 한우근 교수, 동대학 이병도 명예교수, 인하대 유홍렬 교수, 연세대 백낙준 명예총장, 서강대 이광린 교수, 동대학 이기백 교수, 동대학 전해종 교수, 고려대 조기준 교수, 신석호 선생,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선근 원장과 위원 외 인사로는 로는 이화여대 강우철 교수, 숙명여대 이만열 교수, 동국대 이용범 교수, 서울대 이원순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이현종 및 신지현이다. 소속을 하나하나 찾아 넣은 것은, 얼마나 그때의 의견이 일반적인 의견이었나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 건의서의 주요 내용은 ① 고조선의 영역은 북으로는 흑룡강까지 서남쪽은 북경까지이다. ② 단군 시대 1200년의 역사가 없다.③ 단군을 신화로 해석하여 부정하고 있다. ④ 연나라 사람 위만을 고조선의 창건주로 삼았다. ⑤ 위만 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은 현 평양이 아니라 산해관 부근이다. ⑥ 낙랑은 중국 북경 지방에 있었다. ⑦ 백제가 400여 년 간 중국의 중남부를 지배하였다. 는 등이었다. 여하간 회의의 결론은 건의서의 내용이 학문적 검토의 대상이 되지 못하여 묵살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일단은 정부에 정식으로 건의한 것이므로 이를 반박하는 검토의견서를 작성하여 회신키로 하였다. 그 당시 답변의 요지는 건의서의 내용이 역사의 발전과정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료에 대한 충분한 비판과 해석이 결여되어 있다. 특히 인접과학인 고고학적 검토가 전혀 없고, 근본 자료가 될 수 없는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자료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더욱이 교과서는 국민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교재이므로,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더라도 학계의 정설로 정립되기 전에는 교과서에 수록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사료의 해석에 있어서 학계에서 전혀 인용하지 않는 사료를 사용하며, 단군신화 문제에 대하여는 어느 민족의 역사에서나 기원과 건국의 과정은 대개 신화로 표현하고 있으며, 신화 속에는 역사적 사실도 내포되어 있으나 전부를 사실로 인정할 수는 없다. 왕검성과 낙랑의 위치에 대하여는 건의자가 제시한 사료에 비하여 사료가치가 더욱 높은 사료에 바탕하고 있으며, 출토된 유적과 출토품과 일치하지 않는다. 등등등. 다음에 다시 언급할 내용이므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안박사는 건의서 채택에 실패하자 이제는 법원에 제소하게 된다. 문교부 장관을 상대로 행정소송과 민사소송을 건 것인데, 2년 간의 재판 끝에 학문적인 내용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받게 된다.

 황급히 공사(公事)를 보러 글을 자른다. 나머지는 공사(公私)가 다망하니 곧 올릴 것이다.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中)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와 주변 인물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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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 같이 한의과대학에서 예과 2년, 본과 4년의 6년제 학문으로 형성된 것이 1964년이다. 바로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전신인 동양의과대학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몇 가지 자료를 첨가하여 뒤집던 내용을 밑에 술(述)하여 둔다. 혹여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해방(解放) 이후에 의생(醫生)이라고 불리던 한의사들, 즉 왜정(倭政) 때에 한의사 면허를 받았던 사람들이 미군정 시절에 「의생협회」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대한한의사협회 홈페이지에서 언급하는 「조선의사회」가 아닌가 한다. 「조선의생회」라는 명칭도 있는데, 어느 것이 진짜 명칭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이게 이야기할 대상은 아니니까. 전의(典醫) 출신이던 박호풍(朴鎬豊)·김영훈(金永勳) 양 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참여하여 이 때에 「동양학관」이라는 한의학 강습소를 만든 것이 당시 해방 이후 최초의 한의학 교육기관이 아닌가 한다. 박호풍 선생은 이후 1957년에 동양의약대학 학장 시절에 문교부에서 최초로 한의학 교수증을 받는다.

동양학관말고 1939년에 동양의학협회 창립총회에서 동양의학강습소를 창립했는데, 1946년에 조헌영 선생이 인수하여 동양의학전문학원으로 허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나중에 동양대학관이 된다는 말인데, 알 수 없다.

이후에 박호풍 선생을 설립대표자로 하여 1947년 12월 31일에 재단법인 행림학원(杏林學院) 설립인가를 받고, 1948년 3월 24일에는 동양대학관을 설립하게 된다. 인문과학 및 동양의학과를 갖춘 4년제 을종대학으로, 관장은 이사자이던 박호풍 선생이었다. 당시 위치가 서울시 성동구 마장동 365번지라고 하는데, 지금은 없는 번지라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 비슷한 시기에 딱 마장동 365번지에 지금 강동구에 있는 한영고등학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음은 물론이다.

전쟁 직전인 1950년 5월에 동양대학관 제1회 졸업생 20명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6월 10일에 부산동양의학전문학원이 설립되었다고(한의사협회 홈페이지) 하는데, 이 부분이 모호해서 잘 모르겠다. 하여간 동양대학관도 부산으로 쫓겨 내려갔는데, 왜정 때의 『조선의료령』(朝鮮醫療令, 1944·8·21 제령제31호)을 대체할 새로운 의료 관련 법률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제2대 국회에서 국민의료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당시 본회의 속기록 등을 살펴보면 확실히 양의(洋醫)를 우위로 두자는 의견과 함께 한의사(韓醫師)가 아니라 한의사(韓醫士)로 하자, 한의원이 아니라 진찰소라고 하자는 의견도 있을 정도로 양의가 우세했으며, 실제 국민의료법에서는 의료업자로는 의료·치과의사를 제1종으로 하고, 보건원·조산원·간호원을 제3종으로 하면서 그 사이에 제2종으로 한의사를 두게 되었다. 당시 의생을 한의사로 하면서 조선의료령을 폐지하고 문교부장관이 인가한 한의학을 전공하는 대학을 졸업한자 또는 검정시험에 합격한 자로 규정하였는데, 이때 부산으로 피란중이던 동양의학관은 천막 하나를 세워 서울한의과대학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고 한다. 1951년 12월 15일에 설립인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1953년 3월 5일에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치는 않으나 아마 후자가 유력하지 않나 한다. 승격인가를 받아 개교한 것이 1953년 4월 1일이다.

서울 수복 이후에 안암동 산10의15호에 목조건물 단층 3개동으로 서울한의과대학이 들어섰다고 하는데, 번지가 물론 지금과 달라서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 번지수로 따지면 안암동5가 개운사 근처인데, 찾아간 사람 말로는 안암동 2가에 한의대길에 대광빌라 자리(경동교회 옆)가 자리라고 한다. 거기 도로 이름 유래도 그러하니 아마 여기일 것이다.

서울한의과대학이 1955년 3월 10일에 동양의학대학으로 바꾸었다가, 8월 1일에 약학과 병설하면서 다시 명칭을 동양의약대학으로 고치게 된다. 동양의약대학 한의학과는 1959년 3월 27일에 제1기(통산8기)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다시 명맥을 이어간다.

동양의약대학는 5·16 군사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부의 이른바 개혁조치로 다시 철퇴를 맞게되는데, 교육에관한임시특례법을 만들어 학교의 정비 조치가 가능하게 만든 뒤 학교정비기준령을 통해 특정 종파의 신학교나 기준에 미달하는 학교를 폐지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 기준에 걸리고 만 것이다. 결국 1962년에는 제1학년생 모집이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62년 3월 27일에 각종학교인 동양의약학교 설립인가를 얻어내 명맥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의료법 개정을 통해 한의사 면허의 자격을 「국공립대학교의과대학에서 의과대학과정중 최종 2년간 한방의학과에서 한방의학을 전공한 자로서 한의학사의 학위를 받고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한 자」로 규정하면서 유일한 한의학 교육기관조차 폐지될 위기에 이르렀다.

이 때 동양의약대학 부활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자리마저 전임 회장이 사망하면서 공석이 되었다. 이 때 당시 종로에서 성제원한의원을 하던 김정제 선생이 회장이 되었는데, 그 당시의 학생대표였던 김병운 선생의 회고가 다음과 같다.

"의료법 개정을 요구하러 간 학생들에게 김 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문사분과위원장이 누구냐고 묻더군요. 홍종철이라고 대답하자 '홍 장군은 내가 잘 알지, 내 환자야!' 하면서 얼마 후 돈화문앞 집으로 홍종철 위원장을 초대하였어요. 이 자리에서 김 회장은 한의계의 입장을 전달하였으나 홍 위원장이 거절하자 홍 위원장의 부인이 '김 회장이 생명의 은인인데 안 해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했어요.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이 폐기되고 의료법개정안도 14조 2항이 수정되어 최고회의를 통과하였습니다. 동양의약대학이 부활한 것이지요."

1963년 12월 13일에 동양의학대학이 부활되었고, 3일 뒤에 예과 2년 본과 4년의 6년제 의가대학 인가가 났다. 마침 의료법 개정안에서 면허 자격을 「의과대학 한의학과에서 한방의학을 전공한 자로서 한의학사의 학위를 받고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한 자」로 규정하는 바람에 1월 21일에 다시 이름을 동양의과대학으로 바꾼다.

행림학원과 동양의과대학은 1965년에 경희대학교에 합병되는데, 당시 경영난에 봉착한 동양의과대학은 우선 동국대와 고려대에 합병을 타진했으나 불발되어서 경희대로 온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이로써 3월 27일에 흡수 합병을 결의하고, 한 달 만인 4월 27일에 합병 조인과 함께 대지 6천 평, 건평 1만 592평의 의대부속병원을 착공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경희의료원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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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안전부가 유례깊은 인감제도를 폐지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단계적으로. 그럼 인감대신에 무엇으로 하느냐 살피어 보았더니, 주로 이것저것 하기는 하는데 권리양도에는 신분증사본이나 권리증에 대한 인증을, 재개발 동의 같은 본인동의에는 신분증 사본이랑 자필서명, 보상금 등 수령에는 신분증 사본이랑 통장 사본, 인허가에는 그냥 표기, 임원 임명에는 신분증 사본, 신고에는 신분증 사본이라고 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권리양도다. 물론 민원에는 인터네트로 공인인증서 써서 할 수 있게 하고, 전자위임장으로 인감증명서를 대신하게 하고, 읍면동에서는 노인들한테 본인서명사실확인서(가칭)을 끊어준다고 한다. 또 공증제도를 확대한다, 뭐 주민등록법을 개정해서 신분증에 서명 등록을 권장한다 이러고 있다.

가장 큰 문제가 서명제도다. 왜 인감증명서를 갖다붙이느냐. 그것은 무슨 계약서든 수령서든 인감을 찍으면 본인인줄 모르니, 인감증명서를 갖다붙여서 본인이 가진 인감으로 찍었소 하고 보증하는 것이다. 인감증명서 발급에도 또한 본인확인을 거치니 이중으로 보장이 되는 것이다.

또한 서명이라는 것, 사인이라는 것이 서구에서 건너온 측면이 큰데(조선에도 수결제가 있었다. 자세한 것은 수결을 참조.). 왜 양코쟁이들은 사인을 쓰냐 살피니, 물론 서구에도 도장이 있었다. 가문도장 같은 것인데, 귀족제가 붕괴되면서 이제 상놈들이 들고 일어난 세상이니 그런 것 필요없다 하여 사인이 급격하게 퍼진 것인데. 이 제도가 무서운 것이 뭐 베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써도 티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나폴레옹 1세가 즉위하고 이기고 지고 귀양가고 하는 동안 사인이 무시무시하게 바뀌었다고 하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사인을 신분증에 하든 말든 사인으로 "증명"을 한다는 것이 무의미해지는데 뭐하러 사인을 갖다 붙이나.

특히 신분증 위조는 이미 심각한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8자를 6자로도 고치고, 3자로도 고치는 것이 이 나라 신분증이라는 것을 1980년대 후반 출생자들은 익히 잘 아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게다가 주민등록증 초기판은 몇년 지나면 다 희미해지고 긁히고 지워지는 것이 다반사였으니, 무슨 증명을 하겠는가.

인감사고가 일년에 200건 밑으로 일어난다는듸, 인감증명서 나가는 통수만 일년에 사천만통이다. 사천만통 찍어서 200건 일어나면 그냥 표기오류보다 적지 않냐. 확률로는 0.00048%라는 경이로운 사고율이다. 실제로 인감사고 터지면 제일 1순위로 까보는게 공무원 실수다. 동사무소 주사 주사보들 좀 더 놀아보자고 폐지입김넣었다는 이야기가 보도로까지 나온다. 4년동안 터진 인감사고 773건중에 죽은 사람 인감 도용한게 324건이고, 신분증 도용이 155건, 위변조가 77건이다. 죽은놈 인감 도용하는거랑 신분증 훔치고 위변조하는거랑 비교했을 때에 저정도면 심각한거 아닌가. 공무원이 신분확인 실수해서 터진 것도 68건이다. 이게 무슨 인감의 잘못이냐, 공무원의 잘못이지. 오죽하면 폐지 뒤에 공증업이 그렇게 호황이 될텐데, 공증협회이사(남상우氏)가 "인감증명제도는 95년의 역사를 거치면서 그 필요성이 인정됐고 안정성까지 갖춘 제도"라며 "과연 폐지해야할 만큼 큰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라고까지 했겠냐.

수억 수십억 거래한다면야 인감을 찍든 전자뭐시기를 하든 당연히 불안해서 하겠지만, 일이백 아니면 일이천 전세거래 하면서 공증찍고 온갖 짓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인감증명서 천원도 안드는데, 나중에 공증하면 천원밑으로 되나연??? 인감증명서는 생긴거만 보면 되는디, 사인은 펜종류에 따라 힘의 강약 패턴까지 다 봐야되는데 일반사람이 볼 수 있나연??? 필적감정사 키울건가연??? 지금은 인감증명서 뗄 때 신분증 보고 지문까지 보는디, 공증인이 하면 지문확인도 하나연??? 옛날에 조폐공사 국감할 때 주민증 위조 적발 건수가 2002년 240건, 2003년 300건, 2004년 372건이었다. 과연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줄었을까?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았을게다.

사실 이에 대해서 조선일보에 윤배경 변호사가 한 말이 있는데, 사건이 터지면 돈 들고 튀는 놈이 나타나는데 결국에 소송을 걸데를 찾다보면 공무원이 실수한거라 국가나 지자체에 소송을 걸고, 그러면 결국 공무원과 담당기관은 패닉에 빠진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건 정부가 엄살피우는 거에 불과하고, 국민이 세금을 내는 이유는 공공서비스에 대한 기대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마도 이 상황의 이면에는 현 정부 고위직에 있는 누가 인감때문에 한번 데여서 인감이면 학을 떼는게 아닐까 생각하는데, 진위는 저 너머에. 하여간 이런 좋은 제도를 뭣하러 폐지하냐. 올초에 인감 등록하고, 임원 등록한게 아까워서 이러는건 절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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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칼럼 하나를 읽고나서 포스팅을 하지 않을 수 ㅇ벗다. 국민일보 손수호 논설위원의 칼럼, 「여성들은 왜 치마를 가릴까」를 읽고


노출의 계절이다. 노출이 단순히 벗어던지는 행위와 다른 것은 사회적으로 규율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아름답고 싶은 미학과 도덕의 잣대가 되는 수학이 경합한다.

여성은 스스로 노출의 수위를 정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부여된 특권이다.(중략) 죽도록 앞이 막힌 구두와 바닥까지 닿는 바지를 입을 수밖에 없는 남성으로서 이 한없는 자유를 부러워하다가도 문득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거나 계단에서 가방으로 치마 뒷자락을 가리는 동작이다. 인사할 때 손바닥으로 가슴팍을 누르는 장면도 그러하다.

왜 노출을 방어할까. 기껏 대중의 시선을 유도해 놓고 다시 차단하는 것은 모순 아닌가. 그런 부자연스런 행동이 오히려 불필요한 관심을 촉발시키고, 나아가 선량한 사람들의 감각체계를 흩뜨리는 것은 아닐까. (중략)

왜 모를까. 치마를 가린다는 것은 원치 않는 노출을 차단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이리라. 의상은 평지를 기준으로 재단했으니 경사각에 의한 의외의 경우를 대비하는 것이겠지. 그래도 의문이 남는다. 여성들은 어디까지를 '의외의 노출'로 여길까.

눈여겨 보면 같은 치마를 입어도 계단을 내려갈 때는 방치하니 뒷쪽 시선을 염려한다. 같은 치마라도 튤립형은 주의가 덜하다. 펄럭이는 나팔꽃형 치마를 조심하는 것이다. 같은 수준의 노출이라도 바지는 제외된다. 노출의 양의 문제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바람을 염두에 두는가 했더니 바람 없는 실내에서도 그러했다. 결론은 나팔꽃형의 짧은 치마를 입었을 때의 뒤쪽이다.

실제 경사각에 따른 노출의 차이는 어느 정도일까. 수학을 전공한 조카에게 물었더니 사소한 변수를 생략할라치면 여성의 치마 끝단과 다리 사이의 간격에다 탄젠트 값을 곱하면 된다고 했다. 경사도를 30으로 잡고 여성의 치마 끝단과 다리 사이의 간격을 5㎝로 둘 경우 5×tan 30도=5×0.577…=약 2.89㎝라는 것이다. 그러니 3㎝를 보호하기 위해 가방으로 가리는 것이고, 치마가 드리우는 음영을 감안하면 1.5㎝ 정도의 미미한 거리가 산출된다. (중략)

이는 겸양이나 조신함이 아니라 타인을 잠재적 범법자쯤으로 여기는 불온한 시선이 깔려 있다. 자신의 치마 가리기는 남의 시선 가리기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여성들은 노출의 미학을 과시하며 자연스럽게 걸었으면 좋겠다. 평지든 계단이든 보무도 당당하게!

아침부터 한참 웃었닼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논설위원님, 제가 이 글을 정말 보고 싶은데 왜 그렇게 가리십니까 하는 사회적인 외침으로 보아도 되겠습니까. 그리고 동감이 가지 않는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면 제가 나쁜 놈입니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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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가 보도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조선일보에 기자가 모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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