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종御製문/3. 산문편(散文篇)'에 해당되는 글 53건

  1. 2014.07.14 갤럭시 찬가(부제 : 돌파하라 최첨단을) (1)
  2. 2014.07.14 화투놀이 이야기
  3. 2014.07.14 감저시설(甘藷匙說)
  4. 2014.07.14 편교자설
  5. 2014.07.14 출애굽설(출근단상)
  6. 2011.04.15 안드로이드 수도권 전철 어플리케이션 비교탐구 (4)
  7. 2011.02.11 당신을 구라파 전문가로 만들어 드립니다. (9)
  8. 2011.01.23 대학도서관 대출 이력으로 살펴본 독서 내역 #8
  9. 2010.08.12 대학도서관 대출 이력으로 살펴본 독서 내역 #7 (3)
  10. 2010.01.01 대학도서관 대출 이력으로 살펴본 독서 내역 #6 (4)
  11. 2009.09.17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下)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 (6)
  12. 2009.08.14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中)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와 주변 인물 (2)
  13. 2009.08.12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上)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의 배경 (3)
  14. 2009.08.08 해방 이후 한의학 교육의 출발과 동양의과대학
  15. 2009.06.22 대학도서관 대출 이력으로 살펴본 독서 내역 #5 (2)
  16. 2009.04.06 대학도서관 대출 이력으로 살펴본 독서 내역 #4
  17. 2008.09.25 퇴고와 번역 (3)
  18. 2008.08.27 대학도서관 대출 이력으로 살펴본 독서 내역 #3 (2)
  19. 2008.06.22 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1)
  20. 2008.06.22 대학도서관 대출 이력으로 살펴본 독서 내역 #2
  21. 2008.05.23 대학도서관 대출 이력으로 살펴본 독서 내역 #1 (6)
  22. 2008.02.23 경희대학교 2008년 연례보고서 목련리포트에 부쳐
  23. 2008.02.11 숭례문편액고(崇禮門扁額考) (2)
  24. 2008.01.19 까칠한 이벤트 : 수척선생 3기 불로거 하삼십만방문문 (1)
  25. 2008.01.18 위키백과 제언 (4)
  26. 2008.01.08 아미노 요시히코의 『일본이란 무엇인가』
  27. 2007.12.27 통상우편물 규격 사항 (4)
  28. 2007.12.09 동호문답을 읽으며
  29. 2007.12.01 망상린문(望相隣文) (2)
  30. 2007.11.14 양주동 (2)

갤럭시 찬가(부제 : 돌파하라 최첨단을)


무엇이나 마음만 먹으면 생산표준에 따라 만드는

삼성전자 기계공업의 자랑 우리식 갤럭시S

갤럭시는 삼성전자의 위력 갤럭시는 안드로이드 본 때

회장님 가리키는 길따라 돌파하라 최첨단을

아 아리랑 아리랑 민족의 자존심 높이

과학기술 강국을 세우자 어플이 파도쳐온다.


지식경제 시대인 오늘날 떨어지면 기술의 노예되리

첨단으로 세계향해 나가는 우리식 갤럭시노트

갤럭시는 삼성전자의 위력 갤럭시는 안드로이드 본 때

회장님 가리키는 길따라 돌파하라 최첨단을

아 아리랑 아리랑 민족의 자존심 높이

과학기술 강국을 세우자 어플이 파도쳐온다.


애국으로 심장이 불파면 점령못할 첨단은 없어라

구글으로 백배해진 힘으로 모든 것에 패권을 쥐자

갤럭시는 삼성전자의 위력 갤럭시는 안드로이드 본 때

회장님 가리키는 길따라 돌파하라 최첨단을

아 아리랑 아리랑 민족의 자존심 높이

과학기술 강국을 세우자 어플이 파도쳐온다.


갤럭시S3를 쓰며 최첨단을 달리는 현대 소비자로서 갤럭시 찬가를 써 보았다.


(2013년 2월 6일 오후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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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투놀이, 세칭 고스톱 놀이는 수자(數字)를 익히고 또한 사계절의 풍광을 즐기는데 알맞는 놀이문화이다.


왜색이 짙다고 싫어하는 사람이 더러 있으나, 이는 곧 무지몽매한 자이다. 지난 조정 이래로 조선에 들어온 것이 마령서와 감자, 고추, 남령초를 비롯하여 무지기로 많은데 이 가운데 조선에 그야말로 딱 들어맞아 특화된 것이 고추를 비롯한 것이며 그 가운데 화투가 있다. 왜색이 짙다면 돈까스를 먹지말라.


여하간에 화투에는 사계절 풍광이 그대로 들어있고, 또한 패마다 그 달의 수자로 삼으니 두뇌계발에 큰 도움이 된다. 화투를 가지고 하는 놀이에는 여럿이 있으며, 그 가운데에 섯다는 근래에 들어 인터네트로 하는 놀음을 가지고 널리 퍼졌으나 실상 현실에서 패를 떠보면 치는 자가 많지 않다. 고래에는 민화투 놀이가 성하였으나, 곧 고스톱 놀이가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이 고스톱 놀이에도 인터네트 놀음을 가지고 그야말로 개나소나 고스톱 놀이를 할 수 있다 자처하게 되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인터네트 놀음은 쾌감의 극대화를 위하여 패의 속도를 빠르게 하고, 또한 어거지로 패 조합을 만들어내 실상에서는 있기 힘든 패의 조합이 부지기수로 나오게 되니 곧 사람들이 복표나 녹도복표와 같이 일확천금을 노리고, 많은 고민을 하지 않게 만드니 그야말로 해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화투놀이의 규칙 또한 신묘하기 그지없는데, 또한 지방과 시대에 따라 규칙이 다르니 이른바 세간에서 화투놀이 하기 전에 루-울 미팅(rule meeting)을 가지라고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내 유소년기에는 분명 7끗을 쌍피로 쳐주기도 하였고, 멍텅구리니 총통이니 하는 규칙이 없었다. 또한 그 이후에 본 일이 없는 로오얄피(royal皮)라는 규칙이 있었는데, 이는 9쌍피 오동쌍피 비쌍피의 3종을 모으게 되면 상대방의 피 한 장을 뺏어올 수 있는 기능을 하였다. 내가 이참에 생각이 나 구글에 쳐보았더니 로오얄피라는 것이 한 건도 뜨지 아니하니 확실히 기묘한 규칙임에 틀림이 없다.


여하간 화투놀이는 두뇌를 계발하고 철을 알게 하는 등 큰 효능이 있으나, 이 또한 해악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사행성으로 이용되는 등의 부작용이 있었으나, 실상 생각해보면 민중의 곁에서 고래로부터 이어져 온 민속놀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다. 사행성 놀음으로 이용되거나 하는 것들은 모두 인터네트 고스톱 놀이에 이어진 것이지, 결코 민중의 놀음이 그러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트럼프 등으로 하는 놀음이야말로 더욱 사행적이다.


최근에는 스마아트폰(Smart Phone)이란 것에도 놀이 응용프로그람이 범람하는 가운데 이러한 화투놀이 프로그람도 많이 출시되었으나, 모두 이용자의 돈을 노리는 쓰레기 수준의 응용프로그람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고래로 본 가운데 프로그람으로 사실상 가치가 있는 것은 비쥬얼 고도리 프로그람 정도 밖에 없던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으나, 야심한 시각에 깊이 생각에 잠기어 근래에는 젊은 사람들이 화투도 못치고 술도 못마시고 담배도 못피우면 이 풍진 세상을 어떻게 사나 싶어 여담으로 몇 자 적어두었다.


(2013년 2월 13일 오후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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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엔 감자 깎는 칼이 다섯 개 있다. 그 가운데 하나는 한 쪽엔 파채칼이 달리고 반대편으론 감자도 깎고 싹눈도 도려내고, 혹은 하나는 강판이 달려있기도 하는 등 대개 기능성이 우수한 것들이다.


그런데 나는 도통 이것들을 쓰질 못한다. 처음 사고는 한 두어번 써보았지만 역시 평상에는 숟가락으로 감자를 깎는다. 이것은 내가 촌사람이요 인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남새는 그 껍질에 양분이 많다고들 한다. 감자칼을 쓰게 되면 껍질이 너무 두꺼워 깎은 것이 더 많은 날도 있다.


실은 그것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대개 신선한 감자는 숟가락을 가져다대고 슥슥 긁으면 금세 껍질이 벗어진다. 이것이 오래된, 묵은, 신선하지 않은 감자인 경우에는 오히려 숟가락이 감자 속으로 파묻힐지언정 더욱 까지지 않는다. 바로 숟가락이 감자의 선도를 판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감자를 깎는 숟가락도 요령이 있다. 그 숟가락 머리가 넓고 판판하고 넙대대하며, 모서리가 칼까지는 아니고 썰리는 정도는 아니나 날카로워야 한다. 내가 이런 숟가락을 하나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데, 밖에선 본 바가 없다. 그야말로 숟가락이 옛것인 셈이다.


여담으로 숟가락으로 감자를 벗기듯, 마늘을 빻는 때에도 믹서기로 드륵드륵 하는 것보다는 절구로 빻는 것이 훨씬 식감이 좋고 보기도 좋다. 먹어보면 안다.


이번에는 감자를 함부르스(가명)에서 샀다. 고래로부터 진노마트(가명)가 농수산물이 신선하기로 이름높았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선도가 좋지 않아 아쉬움이 많았다. 게다가 농수산물 이외에는 딱히 대단한 강점이 없던 차에 함부르스에서는 배달도 해주고 좋은 물건으로 골라준다기에 주문했는데, 정말로 물건이 좋다.


밥하다 든 생각을 몇 자 남기어둔다. 이 글의 제목은 감저시설(甘藷匙說) 정도면 적당하겠다.


(2013.08.26.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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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교자(匾餃子)는 조선국 달구벌의 고유한 음식이다. 너른 만두피에다 약간의 소를 싸서 납작하게 접어, 기름에 지져 먹었으므로 편교자, 이른바 납작만두라고 하였다.


본디 교자의 형태는 소가 많은 것을 으뜸으로 쳤는데, 이는 성리학에서 이르기를 인간의 심성에 모든 진리가 이미 들어가 있는 것으로, 만두 또한 그와 같다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편교자를 일컬어 이단의 음식이오, 기름덩어리 밀가루부침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경도(京都)에서 더욱 심하였는데, 속이 개미눈물만큼 들어있어 가히 맛없는 경상도의 음식이라 할 만 하다며 비웃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본시 교자가 중국의 음식이라고 하나, 편교자는 교자와 형태가 전연 다른 바를 상고한다면 기씨가 조선에 와서 왕도를 펼치듯, 편교자야 말로 조선만두의 새로운 발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자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도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여하간 이 편교자의 기원은 한국동란 시절에 먹을 것이 없어서 먹었다거나, 60년대에 중국 교자가 너무 기름져서 야채를 넣어 만들었다는 양 설이 있다. 그러나 이미 60년대에 들어서는 기름을 적게 쓰긴 하였으나, 편교자가 사실상 널리 퍼져있었으므로 후설은 취하기 곤란하다. 또한 이 편교자는 기름에 부치는 것이 중요하므로 후설은 더더욱 취하기 힘들다.


편교자의 양태는 크게 두 갈래로 나뉘인다. 원형에 가까운 것은 겹친 교자를 떼지 아니하고 기름에 두루두루 부치는 것이다. 이는 겉과 속이 모두 말랑말랑하여 가히 겉과 속이 내리신 그대로이므로 덕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후기에 들어서는 서문시장 일대에서 교자를 대강 떼어 기름에 두루두루 볶듯이 부치는 것이다. 이는 겉은 바삭하고 속은 그대로이므로 군자가 경이직내 의이방외하는 것과 같다.


나는 떼서 부치는 것이 더 좋다.


+ 편교자의 양태와 관련하여 원형이라고 지적한 것은 옛 모습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고로 원래 납작만두는 떼어 기름에 적셔 부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이다.


(2013.09.21.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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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중교통에서 통화하는 사람이 너무 싫다. 그제는 뻐-쓰에서 가족회의를 하는 냔을 보았는데, 왜 가족회의를 집구석에서 안하고 뻐-쓰에서 하는지 모르겠다.


여하간 금조에는 웬 민주애국지사냔이 아침댓바람부터 전철 플래트폼에서 핏대를 올리면서 삼청교육대를 부활시켜야함을 통화하였는데, 곧 전차에 올라타서도 그 웨침을 멈추지 않았으니 저냔부터 삼청교육대 보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과 같이 일어났다.


하여간 금일은 무슨 날이긴 한가본지 전차가 늦게 도착하고는 사람도 미어터지는 판국에 웬 갸날픈 처녀 하나가 괴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다 접어놓고 문을 닫으며 타는게 아닌가. 나는 이때에 이 전차의 무서움을 알아채고 내렸어야 할 것을.


본디 1호선을 타본 사람이라면 알겠으나, 인천행은 서울 이북에서 발차하여 남하하고, 천안신창 및 수원병점행은 성북에서 발차하거나 청량리에서 발차하여 남하한다. 대개 수원병점행이나 천안행을 타거든 할랑한 분위기로, 혹 때로는 앉아오는 기회가 있는데 이번에는 열차가 몽조리 지연되는 분위기라 어쩔 수 없이 인천급행을 타게된 것이 그지같은 전말의 시작이었다.


이 인천행이란 것은 타고나거들랑 일단 회기역에서 1할이 빠지고, 청량리에서 3할이 빠지고, 그외 제기동부터 종로오가까지 쪼르르륵 빠지다가 종로삼가에서 다시 삼사할이 빠진다. 물논 그 사이에 계속 들어차기는 하지만, 웬만하거들랑 회기부텀은 신문지 쪼가리 한 장 볼 수는 있는 환경이 된다.


그런데 금일은 회기역에서 그 갸냘픈 처녀가 문을 닫고 타더니, 청량리에서는 빠진 3할 대신에 새로운 3할이 타고는 이제는 웬 거구의 사내가 문을 닫고 타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는 중간중간에 분명히 타는 자보다 내리는 자가 많은데 열차혼잡도가 더욱 높아지는 것이 분명히 배후세력이 장악하고 있음이 틀림없음을 느꼈다.


그리고는 종로삼가에 이르러, 청량리에서의 그 거구만한 두 사내가 내리는 문을 장악하고는 조금이라도 내리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이었다.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금일의 탑승사정은 곤란의 연속이었으니, 곧 종로삼가에서 대략 륙할이 내리지않았나 싶을 정도로 혼란이 그지없었다. 그 두 사내 가운데 한 사내는 곧 밀려났으나, 한 사내는 꿋꿋이 자리를 지키려다 결국 말미에 문 밖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야말로 유대 백성이 애굽을 떨쳐일어나는 풍경과 몹시 흡사하였다.


그 다음에는 3호선을 타러갔더니, 곧 열차가 떠나려하므로 사람들이 맨 마지막칸(10-4)를 통하여 대거 탑승하여 제자리를 찾아가니, 이는 또한 유대백성이 출애굽을 하는 광경과 같이, 전차를 가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양새가 흡사 정병과 같은 모습이었다.


아침에 출근하는 길에 보았던 광경을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 몇 자 술하여 놓는다. 아 빠진 것이 있다. 종로삼가 일호선에서 삼호선 내려가는 길이 곧 두 줄짜리 에스카레이타인데, 이 풍경이 또한 자못 대단하다. 특히 금일의 사정은 극심하였더니, 꼭 일단 운전하면서 대가리부터 들이미는 조선사람의 습성과 극히 똑같더라. 오늘의 이야기를 출애굽설이라 이름한다.


(2013.11.26.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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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성령의 기름부음 받아, 영접한지도 어언 1개월이 지났다. 일은 없고, 이게 재밌어서 어플만 맨날 만지작만지작 하고 있는데.... 과인은 지하철 내비게이션 b를 쓰는데, 이걸 쓰면서 항상 아쉬웠던 것이 왜 환승역에서 호선별 경로검색이 되지 않느냐였다. 이 부분은 후술하기로 하고... 그래서 내친김에 어플들을 죄다 받아서 비교탐구를 시행하였다.

다음은 안드로이드 마케-ㅌ에서 제공하는 수도권 전철 경로 어플리케이션(노선도만 제공은 제외) 6개종을 분석한 결과표이다.


전철 경로 어플리케이션이 가져야 하는 기능이나, 현재 유통되는 어플리케이션이 가지고 있는 기능을 모두 정리해보았다. 다만 지하철 도착정보는 과인의 단말기 문제인지, 갑자기 작동이 안돼서 꺼고 켜고 다 해봐도 안되길래 때려쳤다. 그리고 저 정보들은 내가 급하게 작동시켜보고 넣은 것이므로, 다소 차이가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총평은 다음과 같다. 설치 횟수가 많은 것은, 물론 오래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역시 이용자의 눈에서 가장 편하고, 유용한 어플리케이션이라는 점을 보여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를테면 지원 사항 중 요금이라거나, 이런 부분은 사실 최근에는 크게 필요가 없는 부분인지라 지원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노선도상에서 클릭을 지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다소 불편한 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바탕이 되는 노선도의 모양새를 두고 생각건대, 일부 사용자들이 직접 막 만들어서 쓰는 정도가 아니라면 서울메트로나 도시철도공사나 다음이나 네이버나 그 소용은 거의 대동소이하다. 그럼에도 자체적인 노선도를 쓰는 것은 메트로이드다. 그러나 과연 메트로이드가 쓸만한지는 별론으로 한다.

역시 중요한 정보는 막차정보이다. 막차를 못타면 아 시망...이므로 막차정보를 지원하는 것이야말로 사용자가 원하는 것일진대, 지원하지 않는 어플이 다소 있다. 그 외에 광고라던지, SD카드 이동 또한 사용자에게 중요한 선택요소가 될 수 있다.

그보다 모든 어플에 아쉬운 점이야말로, 환승역별 경로검색이다. 이를테면 어딘가에서 종로3가역이나 노원역을 간다고 칠때, 가장 가까운 경로를 보여준다. 그런데, 노선상의 이동요소를 통해 나타나는 경로는 종로3가역이 통째로 나오지만. 사실 사람에게 있어서 이동의 요소는 땅밑뿐만 아니라 땅위도 고려되어야 한다.

장황한데, 요약하면 이렇다. 만약 종로3가 피카디리를 간다고 1호선 종로3가역을 가야되는데, 5호선 경로를 가르쳐줬다. 그럼 5호선에서 내려서 올라와서 한참을 걸어야.... 아..... 이를테면 낙원상가를 가기 위해 상월곡-종로3가 경로는 대부분 상월곡-동묘앞-
종로3가(1)의 루트를 안내하지만, 사실 종로3가(5)를 간다면 상월곡-청구-종로3가(5)를 타면 의외로 빠르게 갈 수 있다. 막장환승 노원역 또한 4,7호선의 거리 차이를 감안하면, 이런 루트가 다소 나올거같은데 쓸 일이 없어서 모르겠다.
 

제품별 평이다.

1. 지하철 내비게이션 b

 안드로이드 지하철 어플계의 갑이라 하겠다. 다만 불의의 타격이 자주 나타나는 수도권 전철 1호선이라거나... 2호선이라거나.... 시망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자를 위한 다양한 정보와 선택사항을 제공하는 것은 역시 많은 사용자들이 사용할만한 요소가 된다. 광고가 없는 줄 알았는데, 가끔씩 어디선가 뜨더라. 사용자에게 불편을 주지 않는 광고는 좋다.

 특이한 요소로, 경로의 발착역 전환이 가능하다. 매우 편하다, 쓰다보면... 의외로 데이터를 무서워하는 경우에는, 이런 프로그램이 오히려 좋으리라 생각한다.

2. Smarter subway
  도시철도공사 노선도를 바탕으로 한다. SD카드 이동이 안되는 것을 제외하곤, b와 비교할 때 의외로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터페이스나 경로정보상의 여러 요소가 b에 비교할 때 다소 떨어진다. 다만 아마도 출시된지 얼마 안됐을 것 같으니, 나중에 크게 좋아진다면 다른 프로그람의 지위를 넘볼지도 모르겠다.


3. 기타 평
 지하철노선도와 서울지하철, 메트로이드의 스크린샷이다. 지하철도착정보의 스크린샷이 없음을 양해바란다...


 지하철노선도는 그냥 지하철노선도다. 아무런 평도 필요없다.....

 서울지하철 어플의 경우, 스크린샷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텍스트 중심이면서도 상당히 많은 정보를 담고 있다. 이를테면 타고가다가 급하게 화장실이 가고 싶을 때 어느 역에서 내려야할지라거나.... 실시간 도착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만큼, 데이터 걱정없는 자에게는 상당히 편리하게 소용될 수도 있다. 미래가 아주 기대되는 어플이다.

  메트로이드는, 음...... 밥상에 숟가락 하나 올린 느낌이다. 노선도는 야심차게 쓰는 모양인데, 음.... 피쳐폰 지하철검색과 다른 점이 없다.

 지하철도착정보는...... 열리지도 않아서 죄송합니다. 다른분들 리뷰를 보세요.


<총정리>
지하철 내비게이션 b가 지금은 최고.
서울지하철은 정보량이 최고. 미래가 기대됨.
Smarter subway는 b와 유사한데, 둘중에 하나만 있어도 될듯. b를 추천하지만, Ss의 인터페이스가 더 좋다면 Ss를 추천.
지하철노선도는..... 프린트하세요.
메트로이드는........ 음........
지하철도착정보는 죄송합니다...... 

위 어플들은 모두 안드로이드 마케-ㅌ에서 받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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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에 가거나 책 볼 필요 전혀 없습니다. 매뉴얼만 숙지하시면 당신도 구라파 전문가가 되실 수 있습니다.

일단 구라파 전문가가 되기 위해 추앙해야하는 나라들이 있습니다.

구라파 전체에서는 절대 독일이나 불란서, 영국 따위를 꼽아서는 안됩니다. 그런 나라를 꼽는 것은 다른 구라파 전문가들에게 무시당할 수 있습니다. 제일 좋은 메뉴얼은 역시 룩셈부르크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뭐하는 나라인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책 한권 안 읽어도 됩니다. 라트비아 정도도 괜찮겠군요.

동구에서는 무조건 유고슬라비아보다 구 유고를, 러시아보다는 구 소련을 추앙해야합니다. 이도저도 다 싫으면 헝가리 정도 추천드립니다.

남구에서는 이태리를 타겟으로 잡고, 종자부터 게으른 쌍놈들이라고 까대면서 희랍을 추앙하십시오.서반아는 조금 애매한 존재군요. 코르시카 추천합니다. 나폴레옹 이런거 몰라도 됩니다. 독립운동 했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북구에서는 노르웨이, 덴마크는 안됩니다. 핀랜드보다는 라트비아를 꼽으시고, 아이슬랜드와 덴마크는 무시하시되, 덴마크령 그린랜드는 천국이라며 마지못해 인정하는 제스쳐를 취해주십시오.

좋은 나라는 불란서, 덴마크, 핀랜드 다 세금 너무 많이 낸다며 까시고 곧 죽어도 사람들이 모르는 희랍을 추앙하십시오. 그중에서도 교육복지가 좋습니다. 대학 식당도 무상급식이란것만 알면 됩니다. 걍 댓글마다 대학무상급식 ㄷㄷㄷ하시면 됩니다. 굳이 불란서를 언급해야겠다면, 이민자들 문제때문에 불난것만 이야기해주십시요.

대충 이 정도 입니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원복선생 먼나라이웃나라 읽고 구라파에 관심생겼다고 절대 고백하지 마십시오. 캐무시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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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씨슨 8인데, 이번엔 더럽게 안봤다. 갈치5년(2010년) 8월 12일부터 12월 31일까지다.
  1. 섹슈얼리티와 법 (이준일)
  2. (読む) 日本国憲法 (憲法を読もう会)
  3. ('암행어사 출두요') 조선의 법 이야기 (류승훈)
  4. 한국전쟁과 대중가요, 기록과 증언 (박성서)
  5. 농협법 (이승언)
  6. (회사등기의) 법률상식 (김정수)
  7. (지식제로에서 시작하는) 상법입문 (伊藤眞, 1958-)
  8. (회사등기의) 법률상식 (김정수)
  9. (註釋) 民法 (박준서)
  10. 現代日本の憲法 (元山健,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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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리즈도 벌써 일곱번째다. 결국 7학기가 끝났다는 소리일 것이다. 9번째에서 대충 씨-슨(season) 1이 끝났으면 좋겠다. 하여간 이번에는 금년도 1월 1일부터 8월 11일까지다.

  1. (そうだったのか!)日本現代史 (池上 彰) : 이 책이 아주 수작이다. 어디 일본어 배우는 사학과 학생들이 읽어도 아주 좋을 책.
  2. (만화)화엄경 (임일휴) : 재밌었다.....
  3. (사과향의)요리백과 (김지현)
  4. (상법·민법·상업등기법개정에의한정석)법인등기요해 (김용환)
  5. (알기쉬운)법령정비기준 (법제처) : 이 책도 법하는 사람, 번역하는 사람이면 반드시 옆에 두고 보아야 할 정도로 좋은 책이다.
  6. (일본잡지)모던일본과조선1940 (홍선영) : 이런 책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모던 일본 조선판 1940년도본을 번역을 떠놓은 책이다.
  7. <戦争責任>とは何か (木佐芳男)
  8. ドイツ憲法入門 (名雪健二)
  9. 경성리포트 (최병택)
  10. 경성상계 (박상하)
  11. 내셔널리즘 (강상중) :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좀 있다.
  12. 농협법 (이승언)
  13. 다양한 가족 출현에 따른 쟁점과 가족관련법의 방향 정립에 관한 연구 (변화순)
  14. 대한민국 아파트 발굴사 (장림종) : 미투데이에도 썼는데, 이런 책이 최근에 나타나고 있는 점이 바람직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1세대 아파트의 모습을 어느정도 보여주는 책.
  15. 대한민국을바꾸는61가지방법 (홍동식)
  16. 도쿄 게스트하우스 (角田光代,1967-) : 가쿠타 미쓰요의 책. 기억에 남을 정도로 상당히 즐겁게 읽었다. 물론 내용에 대한 논의는 사양한다.
  17. 모던걸 (신하경)
  18. 밥상 혁명 (강양구,1977-)
  19. 翻訳語としての日本の法律用語 (古田裕清)
  20. 法令用語の常識 (林修三,1910-) / 法令作成の常識 (林修三,1910-) / 法令解釈の常識 (林修三,1910-) : 세 책을 한데 묶은 것은 사실상 책이 쎄-ㅅ트이기 때문이다. 하야시 선생은 일찍이 법제국에 장관으로 계셨는데, 사실 1989년에 작고하셨다. 1959년에 초판이 나오고, 1975년도에 2판이 나왔는데 이것이 아직까지 나오고 있다. 책 뒤에 보면 이천9년 3월에 찍은 것이 제2판 제33쇄다. 그만큼 스테-디 쎌러라는 소리일 것이다. 법령용어와 법령해석, 그리고 법령작성이라는 주제하에 일반인이 읽을 수 있도록 적절한 해석을 가미하였다. 그럼에도 전문가들에게까지 꾸준히 읽히는 책이라는 것, 그리고 아직까지 읽힌다는 점은 분명 수작중의 수작이라는 증거이리라.
  21. 법원과 검찰의 탄생 (문준영)
  22. 法学マテリアルズ (茂野隆晴,1941-)
  23. 변용하는 일본형 시스템 (한상일)
  24. 分かりやすい法律·条例の書き方 (礒崎陽輔)
  25. 비교빈곤정책론 (김상균)
  26. 司法官僚 (新藤宗幸)
  27. 생명과 법 (이로문)
  28. 世界の名刺 ベストアイデアブック (山野英之) : 명함 데-싸인 하려고 봤는데, 너무 신기한 디자인이 많아서 도저히 참고할 수가 없었다................
  29. 섹슈얼리티와 법 (이준일) : 이준일 교수의 수작. 사실 섹슈얼리티라고 하면 야릇한 느낌이 들 수도 있으나, 사실 옛날 대학냄새나는 용어를 쓴다면 여성과 법, 법과 성같은 이름도 되었으리라.
  30. 소세키 선생의 사건일지 (柳広司,1967-) : 이거 예전에 봤던거 같은데, 기억이 안나서 또 봤다.
  31. 안녕 헌법 (차병직) : 아주 사기꾼들이다. 좋은 책처럼 위장하고, 오히려 일반인은 읽기가 더 힘들다.
  32. 梁柱東全集 (梁柱東) : 양주동 박사의 여요전주를 보려고 구했을 것이다.
  33. 옥새 (민홍규) : 전일에 민홍규씨가 옥새를 사실 전통이 아니라 요샛방식으로 만들었다고 뉴스가 나오던디.....
  34. 일본,저탄소사회로달린다 (김해창)
  35. 日本の統治構造 (飯尾潤,1962-)
  36. 日本共産党の硏究 (立花隆) : 빌리고 보니 하권이었는데, 상권이 없어서 못봤다....
  37. 日本國憲法の多角的檢證 (法學館憲法硏究所)
  38. 日本国憲法解釈の再検討 (高見勝利)
  39. 조선시대 왕실교육 (육수화)
  40. 조선총독부 법제 정책 (이승일)
  41. 注釈憲法 (伊藤正己,1919-)
  42. 창조 도시 요코하마 (野田邦弘,1951-) : 창조도시의 개념을 조선에 적용하는 데에 얼마나 고심이 필요한지 엿보게 해주는 책이다.
  43. 逐条解説·法の適用に関する通則法 (小出邦夫)
  44. 트로트의 정치학 (손민정) : "뽕짝을 불러야지 시원하지, 뭐. 팝숑같은거는 아무리 불러도 가심에 와닿질 않잖어."(신신애 曰)
  45. 폐쇄병동 (帚木蓬生,1947-)
  46. 학교를만들자! (工藤和美,1960-) : 학교를 만드는 이야기. 그렇다고 개교하는건 아니고, 건물짓는 이야기다. 학교를 왜 이쁘게 만들어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있으면 읽어라.
  47. 한국 도시디자인 탐사 (김민수) : 잼은 없더라.
  48. 한국 사회의 신빈곤 (한국도시연구소)
  49. 한국의 가난 (김수현)
  50. 헌법 (이국운)
  51. 憲法その眞實 (坂本修,1932-)
  52. 憲法の基本 (小泉洋一,1957-)
  53. 헌법논쟁 (長谷部恭男,1956-)
  54. 헌법재판소,한국현대사를말하다 (이범준,1973-) : 근간이었던듯. 헌재의 전사 후사 이면사를 담았다.
  55. 憲法絵本 (橋本勝)
  56. 芦辺憲法学を読む (高見勝利)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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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결산. 2009년 6월 21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대출 목록이다.

  1. 참을 수 없는 월요일 (柴田よしき, 1959-)
  2. 리인카네이션 (樹林伸, 1962-)
  3. 절대 울지 않아 (山本文緒, 1962-)
  4. 내 안의 특별한 악마 (姫野カオルコ, 1958-)
  5. 친구가 되기 5분 전 (重松清, 1963-)
  6. 사슴남자 (万城目学, 1976-)
  7.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海堂尊, 1961-)
  8. 憲法概観 (小嶋和司)
  9. 注釈憲法 (野中俊彦)
  10. 日本国憲法解釈の再検討 (高見勝利)
  11. (新) 国会事典 (浅野一郎)
  12. (Jurist増刊) 憲法の争点 (大石眞)
  13. 皇室事典 (皇室事典編集委員会)
  14. (朝鮮時代)山水畵 (국립광주박물관)
  15. 梁柱東全集 (梁柱東)
  16. 승자의 저주 (Thaler, Richard H., 1945-)
  17. (일본) 법제업무 편람 (한국. 법제처)
  18. 만세전 (염상섭, 1897-1963)
  19. 日本の自立 (北岡伸一, 1948-)
  20. 憲法9條 (畠基晃)
  21. 일본은 왜 평화헌법을 폐기하려 하는가 (伊藤 成彦, 1931-)
  22. 憲法第9條と自衛權 (粕谷進)
  23. 平和憲法の理論 (山內敏弘)
  24. 낙선재의 마지막 여인 (小田部雄次, 1952-)
  25. 옥중서신 (김대중, 1924-2009)
  26. 平和基本法 (前田哲男)
  27. 自民党 (北岡伸一)
  28. いまこそ輝け平和憲法 (石村善治)
  29. 憲法九条を沖縄‧アジアから見つめる (饒平名長秀)
  30. 護憲の論理18のポイント (小倉正宏)

금번에도 몇권 안되므로 총평만. 주석헌법(9번)이 유히카쿠에서 나온 책인데, 전문~9조까지 되어있다. 론문쓸 때에 많이 보았는데 참 좋은 책. 그 가운데에도 다카미 가쓰토시(10번 저자)의 기술이 탁견이다. 황실사전도 체계적으로 보기 좋게 정리가 된 책이다.

국보 양박사 전집은 참 재미있는 책이다. 양박사 책 안보고 누가 문학을 하나. 그 외에 야마우치의 23번책도 탁견이다. DJ의 옥중서신도 흥미로운 책이다. 기타오카 신이치의 자민당은 내가 게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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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上)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의 배경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中)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와 주변 인물


 실증의 주구로서 자료를 찾느라 한달이 걸리었다. 내가 장황하게 내용을 설명하고 있었으니 결국에 글이 끝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아 내용을 결국 대폭 생략하고 중심적인 내용만 훑어보기로 하겠다.

 이른바 민족사학측이 주장하는 내용 일곱 가지 가운데 가장 중요한 단군의 부정이 사실인가. 입수한 1974년도 『인문계 고등 학교 국사』(문교부 지음, 펴냄 / 한국교과서주식회사 되박아펴냄)와 1979년에 발행된 『고등 학교 국사』(국편 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 편찬)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전자는 누가 지었는지 잘 안나오지만, 후자의 경우는 연구진에 최영희 위원장을 위시하여 고병익, 김원룡, 백낙준, 신석호, 이광린, 이기백, 이병도, 전해종, 최완기, 한우근 교수를 비롯하여 그 외에도 수십인이 있고, 집필진에는 고대 및 고려편을 김철준 교수가 담당하였다고 나온다. 물론 김철준 교수에 대하여는 이전의 글에서 언급한 바 있다. 두 책 모두 내용이 대동소이하니 같은 사람이지 싶다. 여하간 그 10쪽에서는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과 곰의 변신인 여인 사이에서 출생한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였다는 단군 신화를 가지기에 이르렀다.

 단군은 제사장이라는 뜻이며, 왕검은 정치적 군장을 뜻하는 것이므로, 단군 왕검은 곧 제정 일치 시대의 족장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군 신화에 나타난 토테미즘이라든지, 바람신이니, 구름신이니, 비신이니 하는 것은 이미 신석기 시대에서부터 비롯된 것이나, 청동기 시대에 들어오면서는 이러한 여러 신들을 통솔하는 하느님(천신) 사상이 성립된 것이었다.

 천신의 아들이 내려와 건국하였다고 하는 단군 신화는 우리 나라 최초의 건국 신화로서, 당시 고조선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세계관의 구실을 하였으며, 뒤에 민족 문화 전통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왔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고조선은 주(周)와도 교섭을 가지면서 점차 동방 사회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1974년판: 우리 나라에서 ~ 고조선은 주나라와도 교섭을 가졌으며, 중국 춘추 시대에는 남만주와 한반도에 걸친 영역을 차지하여 동방 사회의 중심 세력이 되었다.)



 이처럼 단군을 부정한 바는 없었다. 영토에 대한 명확한 언급이나 중심지에 대하여는 언급하고 있지 않으며, 지도 또한 없어서 딱히 한반도 내에 한정하고 있지는 않으며 분명 만주를 차지하였다고 언급(1974년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뒤에 [고조선의 변천] 파트에서는 "처음에 산뚱 반도와 북중국 방면에 있던 동이족들은, 전국시대에 중국에서 각 지방의 소국가들을 통합하는 파동이 일어나자,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해왔다."고 하여 분명 위치까지 소개하고 있다.

 백제의 요서경락, 즉 이른바 민족사학측이 반영해달라고 주장하던 "백제가 3~7세기 동안 북경에서 상해에 이르는 중국의 동안(東岸)을 통치하였음."이라는 주장이나 "고구려, 신라 특히 백제 사람들이 일본문화를 건설하였음."이라는 주장은 정말로 당시의 교과서에는 없었는가.


 한편, 4세기 중엽 진이 약화되었을 때, 백제는 부여족이 살고 있던 랴오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 당시 백제는 기마 민족 세력이 일찍부터 진출하여 식민지 세력을 세워 놓은 일본 지역, 그리고 랴오시 지방, 산뚱 반도 등지를 본국과 연결할 수 있는 고대 상업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974년판 교과서 19쪽)

 한편, 4세기 중엽 진이 약화되었을 때, 백제는 부여족이 살고 있던 요서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하여, 백제는 기마 민족 세력이 일찍부터 진출하여 각 지방에 식민지 국가를 세워 놓았던 일본 지역, 그리고 요서 지방, 산뚱 반도 등지와 본국과를 연결하는 고대 상업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1979년판 교과서 22쪽)


 분명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교과서에 보충설명을 붙인 방통고등학교 교재에서는 "근거는 중국측 문헌인 송서, 양서 등의 백제전에 "백제는 본래 고구려와 함께 모두 요동의 동쪽 천여 리 지점에 있었는데, 후에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백제는 요서를 점거하였다." 라고 기록한 데 있다."고 근거까지 달아주고 있다. 문화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은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일본에 건너가 각처에서 식민지를 개척하였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사람들이 가지고 간 새로운 문화가 그 곳 토착 사회를 자극하여 일본의 고대 국가를 성립시키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가장 컸는데, (중략) 한편, 고구려도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74년판 교과서 36쪽)

 우리 나라 사람들은 일찍부터 일본에 건너가 각처에서 그들을 교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계, 백제계, 신라계 사람들이 가지고 간 새로운 문화가 그 곳 토착 사회를 자극하여 일본의 고대 국가를 성립시켰다. 그 중에서도 백제 문화의 영향이 가장 컸다. (중략) 한편, 고구려도 일본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79년판 교과서 44쪽)


 여기서 언급하는 교과서 인용에는 띄어쓰기 한 획 일 점도 고친 바 없는 원문 그대로이다. 서울대학 사범대를 뒤져보면 다 튀어나오는 교재이니 찾아보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 외의 주장인 신라의 처음 영토는 동부 만주라느니 하는 부분은 언급치 아니하겠다.

 여하간 잡론을 한참 하다가 드디어 안 박사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전략) 여기서 말씀드리기는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현재 우리의 역사가들은 대개 일본의 식민사관 이러한 허위의 식민사관을 배웠던 까닭에 오늘날 우리의 국정국사교과서를 완전히 일제 식민사관의 복사판을 만들어 두었읍니다. / 우리의 역사를 올바로 찾기 위하여선 우리는 우리의 옛이제(古今)의 책들은 물론이려니와 중국의 옛이제의 책들을 널리 또 깊이 연구하지 아니하면 아니됩니다.


 이러면서 동이(東夷) 글자에 대한 설명을 비롯하여 너무 장황한 이야기를 늘어놓으니 위원장이 한 말씀을 올렸다.


 안호상박사님! 이 국사청원은 오늘로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도 계속해서 공청회 기회가 있고 또 그때 진술할 기회가 또 있읍니다. 오늫 안박사님이 제일 먼저 나오신 것은 청원을 신청하신 분이기 때문에 국사교과서 내용의 시정될 그 부분을 중심으로 해서 어떻게 잘못되었다는 그 점만 오늘은 중점적으로 해주시고 그 뒤에 더 넓고 깊은 문제는 또 기회에 공술할 기회가 있을 것같습니다. 시간 제한도 있고 다음 공술할 분도 있고 해서 그 전문적인 분야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 주시기 바랍니다. 교과서 중심으로 또 청원낸 중심으로 말씀을 해 주세요.


 그리하자 안 박사가 다시 공술을 시작한다.


 그러면 교과서중심으로 말씀드리겠읍니다. 1974년에 국정국사교과서를 낼 적에 단군의 역사와 연대표를 빼어 버렸읍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이 국사교과서가 망국적이요 민족반역적이라고 떠들었더니 작년판과 금년판에는 서기 앞 2333년전에 단군 한배검이 고조선 임금이 되었다 해 놓고 교과서 글에는 오로지 단군신화만 기록했지 단군역사는 한 마디 말도 없읍니다. (중략)

 일제교육의 중독자와 공산주의의 광신자와 외래종교의 맹신자와 또 단군역사의 문외한을 빼고는 국 한문으로 단군역사를 쓴 큰 학자들이 많은데 그들의 이름을 대강 들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김교헌 어윤적 장도무 박은식 신채호 최남선 정인보 정렬모 안재홍 문일평 권덕규 박형표 최동 문정창 정명악 등입니다. (중략)

 1974년과 1977년의 국사교과서에선 고조선이 평양 대동강가에서 일어났으며 또 고조선의 문화중심지가 대동강가라 하였읍니다. (중. 국사 2, 9면:고. 국사 9면) (후략)


 여하간 이런 발언이 죽 이어지고 다시 한배검 단군 운운하다가 다음으로 당시 국편 최영희 위원장이 진술한다.


 지금 바로 전에 말씀해 주신 안박사님은 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고 또 가까운 사이고 어떤 회에 예컨대 무궁화회같은 데에서 제가 강연을 할 때에는 같이 들어 주시고 하는 분이었읍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제가 이렇게 서게 된 것은 저 개인으로는 몹시 서글프게 생각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이 모임이 또 이 공청회를 통해서 우리의 역사와 또 교과서가 올바르게 발전해 나가는 한 계기가 된다면 민족과 우리의 역사학을 위하여 참 좋은 일이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읍니다. (중략)

 돌이켜 우리나라에 있어서 해방이후에 우리나라 국사학계를 간단히 저 나름대로 정리해 봤읍니다. 해방후 우리 국사학계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새로운 발견이 많이 됐읍니다. 여기에는 고고학뿐만 아니라 고대사에서 최근세에 이르기까지 이제까지 우리가 몰랐던 많은 사료가 발견됐읍니다. 여기에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감춰졌고 발표못한 것도 많지만 우리 스스로 새로운 것을 많이 찾아냈읍니다. (중략)

 이제까지 우리 국사학자들은 솔직이 말씀드려서 가난속에서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연구를 계속해 왔읍니다. 그런데 일방적으로 이러한 학자들이 식민사관의 앞잡이 내지 주류라고 규탄될 때는 저 스스로 부덕한 것을 느끼고 몹시 서글프기 한이 없읍니다. 지금 청원내용안에 “조선사”라는 것이 지금 나와 있읍니다. 그런게 이것이 그 “조선사”가 일제들에 의해서 식민사관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만들어진 관념적인 조선사 같기도 하나 여러 가지 책을 읽어보면 그런 것이 아니라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만들어낸 “조선사”로 알고 있읍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조선사” 특히 고대사 부분을 이 책을 인용해서 연구하는 학자는 한사람도 없다고 봅니다. 우리는 이미 원전 즉 중국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의 새로운 원전을 자꾸 끄집어내고 새롭게 해석해 나가고 있읍니다. (중략) 이미 중국의 원전에서 잘못된 것 예컨대 일본서기나 일본의 고사기에서 잘못된 것을 우리는 시정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우리 학문하는 사람들은 자기 스승의 학설을 뒤집고 또 시정해 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가 가르친 이세의 역사학도들은 또 그렇게 저희들의 학설을 시정해 나가게 될 것이고 또 그렇게 돼야만 새로운 학문이 이루어질 줄로 압니다.

 여기에 청원서에 제3에 구체적인 지금 안선생님 말씀하신 대로 국사상의 사실과 현행 국사교과서에 잘못된 내용이라는 것이 있읍니다. 한데 여기에 페이지수가 잘못되어 있읍니다. 이 교과서에 페이지수가 왜 잘못되어 있느냐하면 이것은 현행 교과서가 아닙니다. (후략)



 여하간 이런 후에 드디어 이른바 민족사학계에서 서울대 박시인 교수가 나온다.


 (전략) 일제치하에 저들이 조작한 조선사라는 것을 전공한 분들이 국사학교수가 그 조선사를 편찬할 때에 가담했던 분들이 국사편찬위원장도 되고 그 분들이 쓴 국사교과서를 검인정교과서로서 문교부가 인정해서 사용해 왔읍니다. 그러한 결과 국민들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을 불행하게 생각하고 일본을 숭상하고 미국사람을 좋아하고 북한에서는 소련을 좋아하는 경향이 나타났읍니다.

 그러므로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작고하신 박대통령께서는 여러번 교육대회에 나가셔서 국적있는 교육을 해달라고 역설하였읍니다.

 그러나 국사교과서가 일제식민사관을 그대로 담고 있으므로 효과가 없기 때문에 드디어 68년 12월 5일에 국민교육헌장을 반포했읍니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상부상조 협동해서 새 역사를 이룩하자고 하지만 협동하지 않는 기풍과 반정부적인 언동이 계속돼 왔읍니다.(중략)

 믿기 어려운 이야기를 왜 교과서에다가 싣습니까? 우리 조상은 곰을 여자로 변하게 하고 그와 혼인했다고 하였으니 국민학교 교실이 얼마나 떠들겠읍니까? 웃음판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 실어서는 아니됩니다. 이 이야기는 단군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분의 아들 천자라는 뜻입니다.(중략)

 태조성은 이씨요 휘는 旦이고 자는 尹晉, 즉 임금이 앞으로 전진한다는 뜻입니다. 이성계라고 하는 것은 일본사람들이 한 말을 지금도 그대로 입버릇처럼 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태조대왕은 旦, 지평선 혹은 동해 지평선에 아침해가 떠올라 오는 때이고 나라이름은 조선국호와 태조의 이름이 딱 맞습니다. sunrise, morning bright에는 사대주의가 없읍니다. 대주의라는 국책은 있을 수 없습니다. (중략) 문제가 있으면 씨족회의에서 결정했다고 한 것은 인민대회나 인민재판을 한 것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제공한 것입니다.


 아오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이야기나 쓰려니 잼이 없어서 못쓰겠다. 궁금하면 그냥 공청회 회의록을 보아라 다음이다.

1차 회의록 / 2차 회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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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上)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의 배경에 이은 제2부입니다.


 국편에서 한 방 드시고, 재판에서도 한 방 드셔 총 두방을 드신 안호상 박사는 다시 재야(?)에서의 활동을 강화해 갔고, 특히 교육현장과 군대를 중심으로 강연도 하고 책도 주고 하면서 다시 전력(?)을 보충한다. 마침 문교부가 1970년~1981년에 걸쳐 초·중·고의 단계적 교육과정 개편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박정희 대통령 피격 이후 등장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갑자기 「교육의 정상화 및 가열 과외 해소 방안」을 발표해 버렸다. 그 내용의 큰 골자로는 과외금지와 함께 교육량의 축소와 수준의 하향이라는 것인데, 그 덕에 문교부는 단계적 개편 대신 새로운 개편안을 내놓을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배경 속에 다시 안 박사를 필두로 하는 이른바 재야사학자들은 이번에는 국회에「국사교과서내용시정요구에관한청원」을 제출한다. 당시 청원을 소개한 사람은 총 19명인데, 대충 소개를 하자면 5공의 실세라는 권정달 의원, 한국일보 정치부장과 서울신문 편집국장을 거쳐 5공 시절(후일이다)에 KBS 사장과 문화공보부 차장을 지낸 박현태 의원[각주:1], 민정당 중앙위원회 부의장을 지내는 조종호 의원, 중정 기조실장과 민정당 사무총장 및 원내총무를 지낸 이종찬 의원, 반공검사로 이름을 떨치다가 나중에는 대표적인 보수우익으로 불리던 오제도 의원, 민주정의당 정책위의장을 지내고 요새는 소망교회 계열로 알려진 이진우 의원, 민정당평화통일위원장을 지낸 이상선 의원, 5·16 당시에는 진보언론계를 대표하다가 5공때 언론 통제에 가담하였다고 비판을 받는 송지영 의원[각주:2], 대통령 특사와 체신부 장관을 지낸 김기철 의원, 관제야당으로 유명한 민한당의 전국구 1번 유옥우 의원, 그다음 민한당 전국구 2번 이태구 의원, 민한당 전국구 4번 손태곤 의원, 민한당 전국구 6번 정규헌 의원[각주:3], 민주한국당 문교공보위원장을 지낸 임재정 의원, 민주공화당중앙위원을 거쳐 나중에는 신민주공화당에서 대표를 맡는 국민당 신철균 의원, 요새는 월간 디플로머시(DIPLOMACY) 회장으로 더 유명한 임덕규 의원, 나중에는 국회부의장을 지내는 김종하 의원, 국회 내무위 간사를 지낸 조덕현 위원, 주일공사로 있으면서 총련 성묘단 운동을 지휘해 유명해 진 조일제 의원까지. 실세부터 실세가 아닌 사람까지 19명이 소개하여 1981년 8월 31일에 드디어 문공위에 제출된 청원서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현재 사용하는 교과서에 일제시대 식민사관에 의하여 왜곡된 내용이 많아 올바른 국사교육을 해치고 있으므로 이러한 허구적인 내용이 시정되어야 한다.

 · 단군과 기자는 실존 인물임.
 · 단군과 기자의 영토는 중국 북경까지였음.
 · 왕검성은 중국 요령성(遼寧省))에 있었음.
 · 락랑군(樂浪郡)은 중국 북경지방에 있었음.
 · 백제가 3~7세기 동안 북경에서 상해에 이르는 중국의 동안(東岸)을 통치하였음.
 · 신라의 처음 영토는 동부 만주이고, 통일신라의 국경은 한때 북경이었음.
 · 고구려, 신라 특히 백제 사람들이 일본문화를 건설하였음.


 이러한 내용은 7번 외에는 과거에 국편에 낸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후에 무슨 협의를 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내용은 회의록 같은 것이 없어 알 수 없으나, 국사교과서 청원은 특히 1981년 11월 24일에 열린 제108회 국회 제17차 문교공보위원회 회의록에서 협의를 거듭했고, 공청회를 여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일시, 장소, 진술인 선정 등에 위원장과 간사에게 일임하여 개최하기로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아, 드디어 친일부역매국식민사학주구청산의 역사적인 날이 밝은 모양이다. 1981년 11월 26일 목요일에 열린 제108회 국회 제19차 문교공보위원회는 위원 21명(전원이 몇 명인가는 알 수 없더라..)에 그냥 의원도 7명이나 참석하고, 문교부 장관(당시 이규호씨)에 차관(당시 정태수씨)[각주:4]에 황철수 장학편수실장[각주:5]에 정태범 문교부 편수총괄관까지. 이 사람들은 차치하고, 이 날 참석한 사람은 한국교육개발원 홍웅선 원장을 비롯하여 이른바 재야사학 측의 안 박사(국사찾기협의회 회장이란 직함이었다.)와 박시인 교수[각주:6]였고, 이른바 식민주구측은 국사편찬위원회 최영희 위원장[각주:7]과 서울대 김철준 교수, 그리고 동국대 이용범 교수이다. 깊이 보지는 않으려고 했으나, 이들에 대해서 좀 설명하는 것이 식민사학주구론과 얼마나 다른지를 언급하기 위해서는 좀 부연을 하여도 괜찮다 싶어 적는다.

 김철준 교수는 서울대 인문대 교수로 1948년 서울대 사학과 졸업 후 국립박물관 학예관을 거쳐 단국대, 연세대, 서울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김철준 교수를 이기백 교수와 함께 이병도의 수제자라고 언급하면서 이 세 명 밑에서 우리 나라 식민사학계의 주류가 다 나왔다는 주장이 많다. 경북대학교 이영호 교수의 논문 「일계 김철준 : 해방 후 한국고대사학의 개척자」(한국고대사연구 53, 2009.3.)의 내용 일부를 길지만 인용해본다.


 일계 김철준은 이기백과 함께 해방 후 한국고대사학계를 이끌어 온 쌍벽이라 할 만하다. 해방 직후의 혼란한 시기에 서울대 사학과를 선후하여 졸업한 이들은, 인생의 동반자인 동시에 학문적 경쟁자로서 한국 고대사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중략) 그는 문화전통에 관심을 경주하여 박은식, 신채호 등 민족사가를 높이 평가하면서, 일본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문헌고증학은 민족의 시대적 사명을 외면한 식민지체질의 연장이라고 보았다. 나아가 단편적인 자료의 고증을 일삼는 문헌고증학으로는 문화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학위논문이며 주저서인 『한국고대사회연구』에는 그의 대표작인 첫 논문 「신라 상대사회의 Dual Organization」이 제외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인류학에 바탕을 둔 그의 연구는 이미 신라사의 실제와 일정한 거리가 있어 보였다.

 그는 신라말 고려초를 한국사의 전환기로 파악하였다. 나아가 고대사회와 중세사회의 차이점을 친족집단의 변화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러나 시론으로 발표된 그의 견해는 무리한 점이 많아 여러 연구자들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았다. 학계의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일부 제자들은 그를 떠나거나 경원시하였다. 처음 그의 영향을 받아 사회인류학의 지견을 원용하여 신라 골품제사회의 혈족집단의 의의를 추구했던 이기동이나, 종교사회학에 관심을 두면서 고대사상사, 특히 불교사상사를 연구하고자 했던 김두진은, 이후 인류학적 이론에 바탕을 둔 고대사연구를 접었다. 종전 자신들의 연구방법론을 일대 전환한 것이다. (중략) 한국고대사 연구에서 인류학적 연구와 실증적 연구, 직관적 연구와 분석적 연구 사이의 관계는 어느 정도 드러났다고 하겠다. 실증에 바탕을 둔 이기백의 사학이 돋보였던 것은 이 때(1980년 즈음)였다.

 동료, 제자들이 『김철준박사 화갑기념 사학논총』(지식산업사)을 간행한 것이다. 이는 4ㆍ6배판 970페이지의 방대한 분량으로, 모두 34편의 논문이 실렸다. 그러나 한국고대사 논문은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있던 노태돈이 쓴 글 등 모두 4편에 불과하였다. 학계에서의 그의 위상으로 보아 우리나라의 주요 고대사학자들을 망라할 것으로 생각되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정작 자신이 지도했던 학계의 핵심적인 여러 제자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그는 재혼을 하고, 인문대 학장과 한국문화재위원회 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988년 8월 정년 때에도 고대사를 전공한 제자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의 정년기념호인 서울대 국사학과의 기관지 『한국사론』제19집에 실린 고대사 논문은 전체 16편 중 3편이었다. (후략)



 이른바 재야사학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친일부역매국식민사학의 중시조의 위치가 어떤지는 가늠할 수 있겠다...

 이용범 교수는 동국대 사학과 교수로, 만몽사(滿蒙史)를 연구하다가 「중세 동북아세아사 연구」로 1975년에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로 첨성대를 천문대가 아닌 제단(祭壇)이라고 본 견해와 신라 고가(古歌)인 처용가의 처용이 나당항로(羅唐航路)에서의 고대(古代) 대식상인(大食商人:아라비아 상인)들의 행적으로 볼 때 대식상인이 틀림없다는 견해로 유명하다.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발해사를 연구하는 임상선 연구위원의 「취아 이용범의 만몽사 연구와 동북공정」(『동국사학』 제42집, 2006년. 동국대학교 사학과 창립 6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논문.)의 일부를 인용하면,


 취아 이용범 선생이 본격적으로 만주, 몽고사 연구에 나선 것은 대학 3학년 초, 동국대학교 사학과 유급조수로 학교에 돌아오면서부터이며, 한국전쟁 때 개명사판 요금사 3사의 역사책 2권을 손에 쥔 것도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 필자는 학부 4학년 때 발해사 연구성과를 정리한 선생의 글을 읽고,(이용범, 발해사연구의 회고와 국사, 한국사상, 1964.) 졸업논문으로 발해사 인식의 시대별 추이 : 당시의 인물과 사서를 중심으로(1986)를 작성한 후, 대학원에서의 학위논문 주제를 상의하기 위하여 선생을 뵈온 적이 있다. 당시 선생은 "할 것이 없어!"라고 하며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발해사 중에서 중요하면서도 아직 해결되지 않은 것이라며 주신 주제가 바로 '발해의 천도'였다. (중간 생략)

 고조선의 서쪽 경계와 관련하여 중요한 지점인 위략(魏略) 만반한(滿潘汗)을 종래 패수, 즉 금일의 청천강이라 하여 연이 이곳까지 영토를 개척한 것이라는 학설은 일본의 현대 동양사학을 개척한 시라토리 구라키치(白鳥庫吉)와 몽고학 대가 야나이 와타리(箭内亘) 두 사람의 공동 주장이나, 그 권위에 눌려 추단 과정에서 범한 허다한 독단과 불합리한 점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학계에 그대로 받아들여졌고, 이 영향 밑에서 성장한 몇몇 우리 학계의 선배들도 또 그대로 승복함으로써 이 설이 발표된 지 6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우리 국사의 한 구석에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하였다.

 또한 진(秦)의 장성의 요동의 지점에 대해서도, 현재 중국학계의 통설인 황해도 수안까지 장성이 연장되었다는 의견에 대해서도 예리한 비판을 하였다. 즉 진서(秦書)의 주장은 사료적 가치가 앞서는 위략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설이며 이 기사만을 근거삼아 진 장성의 종점을 한반도 내까지, 즉 황해도 수안까지 연장된 것으로 추측하여 단정하는 것은 아무런 방증이 될 문헌도 없으며, 진의 장성은 결코 현재의 요양(遙陽)을 넘지는 못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이용범, 고대의 만주관계, 한국일보사, 1976년.)



 또한 이용범 교수의 저서인 『중세 동북아세아사 연구』(아세아문화사, 1976년.)의 일부와 그 서평을 살펴보면,


 발해왕국자체의 구성이 고구려유민을 주체세력으로 이루어졌으나 문화와 혈연을 달리하는 이부족과의 복합국가로서의 취강성(脆强性)은 숨길 수 없는 사회였던 것이며, 이 왕국의 지배층인 고구려유민이 지연 혈연 또는 문화면에서 우리 국사와 밀접시킬 수 있다 하더라도 한 민족 또는 국가로서의 의식에 강력한 작용을 하는 요소가 빠져있다는 점이다. 즉 그것은 발해사가 한 민족사형성에 있어서 거의 결정적인 요소가 되는 공동추억체의식이 우리 국사에서 그 자취를 거의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연구, 27쪽)

 발해사연구는 우리 학계에서 열의를 가질만한 연구대상인 것은 틀림없으나 문제는 우리가 시도하는 바를 뒷받침할 뚜렷한 이론적 근거가 없는 한, 이와 같은 시도는 오히려 우리 국사에 공허한 내용을 첨가하는 결과를 초래할 뿐일 것이다. 발해사를 국사체계에 넣는데 먼저 우리가 하여야 할 것은 우리와의 추억공동체로서의 발해사연구가 더 진실하게 개척되어야 하겠다. (연구, 29쪽)


 여기에서 이박사는 발해사를 동북아시아사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고자 했다. 종래의 식민지사관에서 벗어나는 한 방법에서, 또는 신라를 유일한 왕통왕조(王統王朝)[각주:8]로 보았던 지난 날의 한국사체계를 탈피하는 새 민족사체계의 입장에서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보고자하는 욕심은 이교수에게도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박사는 한국에서 발해왕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시기가, 민족의 주체의식의 고조기에 있었던, 한국의 지난날의 발해관을 상기시키는 한편 그와 같은 시도가 오늘날에도 이론상으로 많은 문제로 남아 있어서, 앞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거론하여 냉철한 학자적인 자세를 재확립시키고 있다.[각주:9]


 그리고 그냥 재밌는 부분이 있어서, 임영정 교수의 「동국사학 60년의 성과」(『동국사학』 제42집, 2006년. 동국대학교 사학과 창립 60주년 기념 학술대회 발표논문.)의 일부를 옮기면,


 선생님은 천성적으로 급한 성격이었는데, 그것이 원고 집필과 식사시에 유감없이 드러났다. 원고 집필 자세를 보면, 양반다리로 앉은 채 방바닥에 엎드려 200자 원고자 한 권만 달랑 앞에 놓고 만년필로 세로 글을  쓰신다. 그 옆에는 담배갑·껌 종이·신문지조각 등이 널브러져 있는데, 이는 관계문헌과 사료를 밖에서 메모하여 온 것이었다. 또 집필된 원고를 보면, 어떤 문장은 한 단락이 200자 원고지 4~5매에 달하는데 도저히 간편하게 줄여볼 수 없으면서도 명문장이라고 소문이 자자하였다. 식사하실 때에도 미처 수저가 갖춰지지 않으면 손으로 집어 드시던 광경이 눈에 선하다.


 주변 이야기가 길었다. 드디어 오후 2시 11분에 공청회가 개최되었는데, 우선 한병채 위원장이 인사말을 올리는데.


 우리 한민족은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내외에 표방하면서도 아직까지 일본역사보다 길어서는 안되는 부분인 한사군이전의 2천년이 넘는 고조선의 민족사가 체계적으로 정립되지 않은 채 오늘에까지 이르렀읍니다.

 이로 말미암아 우리의 조상이 누구인지 조차에 대한 국사학의 논의가 분분한 상태에서 국민교육용 국사교과서에까지 그 실체가 정리되지 못하여 자라나는 청소년에게 조상의 뿌리를 알지 못하게 함으로써 국조 단군의 개국정신인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인격을 완성하고 자주적 능력과 공민의 자질을 갖추게 한다는 교육의 기본목표에 어긋나는 결과를 자초하였읍니다. 따라서 조상의 얼과 민족정기를 이어받아 민주국가발전에 봉사하며 인류의 평화와 공영에 이바지하여야 할 교육문화는 그 파행을 가져온 것입니다. (후략)



 여하간에 위원장은 광복 후에 식민사관 대토론을 가져야되는데 그런 과정없이 오늘에 이르렀고, 학계가 국사학 연구발전을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지만 사실이나 업적을 지금까지 민족정사로서 론란이 되는 까닭이 그에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점을 엄정한 중립적 입장에서 파헤치고 새 역사창조의 기본이 되는 사관 및 국민교육의 중요성을 재인식·검토하여야 할 시점이라면서, 자주적 철학과 민족정통을 계승해 나갈 사관의 정립 위에 새로운 민족의 가치관을 확립하고, 새 문화 창달을 위한 국민의 윤리관을 확립해야 한다고 한다.

 한위원장의 말에서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5공 색깔이 묻어나온다. 당연하다. 1958년에 사법과에 합격한 뒤로 판사, 변호사를 거쳐 국회의원으로 화려하게 입성한 뒤 81년부터는 민주정의당 의원으로 탄탄대로를 달리다가, 나중에는 국회 법사위원장을 거쳐 88년에는 새 6공 헌법재판소의 재판관으로 올라갈 정도로 5공의 한 축이었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노무현 탄핵심판 당시 국회 소추위측 변호인을 맡기도 했다.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또 애매하게 끊기로 한다. 사실 나도 실증사학의 뒤를 쫓는 사람이라 자료 수집에 무수한 시간이 걸리고, 또한 아직 수집하지 못한 자료가 허다하여 지금 모두 썼다간 나중에 보충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에 자료를 좀 더 보강하여 나머지를 쓰기로 약정하자니 여러 날이 걸리겠음이다. 하여간 다음 下편은 마지막 편이므로 공청회 내용을 모두 훑을 것이다. 아마도 下편 이후에 한 편을 더 써야하겠으니, 그 편은 보(補)로 하기로 하고 그에서 정말 "청문회 결과"가 나타났는지 살필 것이다.

 자료를 수집하면서 교과서뿐만 아니라 그 해에는 또 중요한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이 전해지고 파동이 일어난 일이다. 국회 문공위는 그 때에 결의문도 채택하기도 했고, 불매운동까지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국회와 이른바 친일부역매국식민사학의 모습이 하나 나타난 것이 있다. 사실 회의록만으로는 결과가 어떤지 알기 어렵고, 또한 지금 파악하고 있는 회의록이 전산화 이후의 것이라 코옴퓨타로 내용을 보니 찾기가 힘이 든다. 그리하여 겨우겨우 하나하나 찾아가며 제11대 국회 문공위 회의록을 거반 훑었는데, 이와 관련하여 나타난 것이다. 글 쓰는데 실증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며 중요한지를 알 수 있는데, 하물며 국사 교과서나 역사 서술에 있어서랴. 곱씹을 필요가 있겠다.
  1. 윤종영씨는 박현열이라고 썼지만, 태(兌) 자를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인다. 11대 국회의원을 지낸 사람은 박현태 의원이다. [본문으로]
  2. 후일 KBS 이사장을 지냈는데, 이병도를 회개(?) 시킬 사람은 최태영 박사밖에 없다고 했다고 하면서 종종 등장한다. [본문으로]
  3. 윤종영씨는 정구헌이라고 썼으나, 박현태 의원과 마찬가지로 잘못 읽은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4. 여담이나 정태수 차관이 진주 출신에 이규호 장관이 진양 출신이라 당시 진주 마피아의 진주시 문교부라고 불렸다고도 한다. 그냥 웃겨서 첨언한다. [본문으로]
  5. 나중에 국회의원도 지냈다. 13대. [본문으로]
  6. 서울대 인문대 교수였으나, 국사학자는 아니다. 영문 전공하시다 나중에 「한국 상고설화의 연구 : 태양신화의 이동을 중심으로」로 국문과에서 박사를 받았다. [본문으로]
  7. 1950년에 고려대 사학과 졸업 후 해군사관학교와 숭실대를 거쳐 1972년부터 10년간 국편 위원장으로 활동. 1975년에 단국대 사학과에서 「임진왜란중의 사회동태에 관한 연구 : 의병을 중심으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석호 교수의 제자라고 한다(과자신보:쿠키뉴스 부고). [본문으로]
  8. 정통왕조의 오기가 아닌가 싶다. [본문으로]
  9. 황원구, 「서평 : 이용범 저 , 한만교류사연구」, 『역사학보』 123호, 역사학회, 1989년.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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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

청문회 개요
  1. 친일부역매국식민사학의 결정판인 국사교과서를 바꾸기 위해 뜻있는 민족역사학자와 국회의원 19명의 요청으로 1981. 11.26 ~ 27 양일간 국회에서 "국사청문회"가 열렸다.
  2. 민족사학측은 안호상(安浩相), 박시인(朴時仁), 임승국(林承國) 3인이었고
  3. 식민강단사학측은 최영희(崔永禧), 김철준(金哲埈), 이용범(李龍範), 전해종(全海宗), 이기백(李基白), 이원순(李元淳), 안승주(安承周) 7인 이었다(이들 명단을 기억하여 그들이 쓴 역사책을 확인해보면 도움이 될 것임 : 전원 그 당시 국사편찬위원임)
  4. 식민강단사학측은 식민사학의 거두 "이병도의 수제자"들 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음이며, 비전공자들과 토론하는 것이 격에 맞지 않아 불쾌하다는 둥 거들먹거리던 그들에게
  5. 국회는 국사편찬위원 전원 경질이라는 철퇴와 청문회 내용을 국사책에 반영할 것을 결정하였다.
    1. 이러한 민족 사학자들의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83년 국사교과서" 개편시 다음 사항이 반영되었다.
    2. 단군왕검의 고조선 개국사실 수록(역사로 인정)
    3. 백제의 대륙진출 수록
    4. 한 4군의 한반도 위치설 삭제 등
  6. 이것이 밀알이 되어 “제 2의 국사청문회”를 개최하여 "81년의 국사청문회" 보다 더 발전된 결과가 나와 매국식민사학 척결, 땅에 떨어진 민족정기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른바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 개요라는 이름으로 나도는 글이다. 원전(?)이나 작자 미상으로, 어느 누가 저런 이야기를 처음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오오 친일부역매국식민강단사학측의 핍박을 이기지 못하고, 아마 은둔한 모양이다.

 저 국사청문회라는 것의 원 명칭은 국사교과서내용시정요구에관한청원(공청회)이다. 1981년 11월 26일 목요일에 열린 제108회 국회 제19차 문교공보위원회와 1981년 11월 27일 금요일에 열린 제20차 문교공보위원회를 묶어서 이르는 말일 것이다. 다행히 근래에는 의사록이나 회의록이 모두 PDF 화일로 만들어져 국회에서 웹상으로 다 까놓고 있으니, 원전(?)이란 것을 보고 진짠지 짜간지 알 수 있게 되었다.

 26일 오후 2시 11분부터 시작된 공청회는 당일 오후 9시 16분에 산회된 후, 다음 날인 27일 오후 2시 17분에 개의하여 오후 10시 36분에 끝이 났다. 총 15시간을 넘는 마라톤 공청회였으니, 그 로고(勞苦)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번에 살펴볼 것은 이러한 초유의 공청회가 왜 열렸어야 했고, 그리고 저 개요라고 나돌아다니는 것(구글에서 검색하면 펌글에 펌글을 타고 돌아서 원본도 알 수 없다.)이 진짜인지 구라인지 밝히고자 하는 것이다.

박정희가 죽고 1980년 광주학살을 자행한 전두환 일당이 집권한 시기는 때마침 교육과정 개정 주기와 맞물려 4차 교육과정 준비가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박정희가 유신을 통해 국사 교과서에 자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을 엄청나게 집어넣은 것처럼 전두환 일당도 국사를 비롯한 국책과목 교과서를 자신들을 미화하는 내용으로 채우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호상 등 이른바 재야 사학자들은 이번 개정이 고대사와 관련된 자신들의 주장을 교과서에 반영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여기고 대대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유신 시기에 군에서는 5·16 군사반란 직후 혁명재판부 검찰부장으로 위세를 떨치다가 박정희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구속된 바 있는 박창암이 발행하던 <자유>라는 잡지를 정훈교재로 배부했는데, 이 잡지는 재야 사학자들의 기관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당시 군에는 젊은 영관급 장교들을 중심으로 왜곡된 형태의 민족주의가 대두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당당하게 미국을 향한 민족의 자주성이나 작전지휘권 문제 등을 제기하지는 못하고 엉뚱하게 고대사에 심취해 대리만족을 구하고 있었다. 이들 군 요소요소와 보안사 등에 포진한 장교들은 “국사 교과서는 국민들에게 민족의식과 민족적 자부심, 긍지를 심어주는 민족 경전과 같은 것”이라며, 따라서 “국사 교과서 내용은 학문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입증할 수 없는 내용이더라도 국민교육용으로 필요하다면 수록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약성경에는 믿을 수 없는 내용도 많지만, 이스라엘 민족은 이를 자기들의 고대사 교과서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당시 문교부 편수관으로 국사 교과서 편찬을 담당한 윤종용의 회고록 <국사 교과서 파동> 참조).

 저런 회고가 있는데, 실제인지는 내가 군대를 안가봐서 모르겠다. 여하간에 1980년을 전후로 이른바 재야사학이라 불리는 세력이 급격하게 성장하기는 했다. 어차피 이른바 재야사학과 소위 강단사학이라고 불리는 집단(?, 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의문이다.)의 대립이 국회까지 온 것은 안호상 박사의 영향이 크다. 일민 안호상 박사는 원래 철학박사인듯 하다. 독일 예나대학 박사인데, 귀국 후에 보전 교수를 지내고 해방 후에는 서울대, 동아대, 경희대(법인이사도 지냈다. 말년이지만.) 등에서 교수(강의를 했는지는 모르겠다.)도 지냈고. 안박사에 대하여는 초록불님이 상고하신 일이 있다. 자세한 것은 유사역사학 태두 중 하나인 안호상, 그는 누구인가?(누지름)을 참조.

 하여간 안박사를 비롯하여 임승국, 박시인씨 등은 안박사를 중심으로 원로 사학자 이병도 교수, 신석호 교수 등의 일제시대 조선사편수회 참여 기록을 들어 이들은 친일파이며, 이들에 의하여 형성된 지금(당시라고 하면 되겠다.)의 사학계는 모두 식민사학의 부류라고 맹공하였다. 그러나 국사학계는 별 반응이 없었다.

 안박사는 이에 감응을 받았는지, 국사의 고칠 점과 국사 교과서 내용 시정에 관한 건의서를 대통령, 국무총리, 문교부장관에게 제출하게 된다. 문교부도 나서 건의서를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이라 약칭.)에 보내고 협의하여 대책을 수립하는 한편, 관계학자 20여 명과 함께 대응방안을 논의하였다. 이 때에 참여한 사람은 국편위원으로 국편 최영희 위원장, 서울대 고병익 교수, 동대학 김원룡 교수, 동대학 김철준 교수, 동대학 한우근 교수, 동대학 이병도 명예교수, 인하대 유홍렬 교수, 연세대 백낙준 명예총장, 서강대 이광린 교수, 동대학 이기백 교수, 동대학 전해종 교수, 고려대 조기준 교수, 신석호 선생,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선근 원장과 위원 외 인사로는 로는 이화여대 강우철 교수, 숙명여대 이만열 교수, 동국대 이용범 교수, 서울대 이원순 교수, 국사편찬위원회 이현종 및 신지현이다. 소속을 하나하나 찾아 넣은 것은, 얼마나 그때의 의견이 일반적인 의견이었나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 건의서의 주요 내용은 ① 고조선의 영역은 북으로는 흑룡강까지 서남쪽은 북경까지이다. ② 단군 시대 1200년의 역사가 없다.③ 단군을 신화로 해석하여 부정하고 있다. ④ 연나라 사람 위만을 고조선의 창건주로 삼았다. ⑤ 위만 조선의 수도인 왕검성은 현 평양이 아니라 산해관 부근이다. ⑥ 낙랑은 중국 북경 지방에 있었다. ⑦ 백제가 400여 년 간 중국의 중남부를 지배하였다. 는 등이었다. 여하간 회의의 결론은 건의서의 내용이 학문적 검토의 대상이 되지 못하여 묵살하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일단은 정부에 정식으로 건의한 것이므로 이를 반박하는 검토의견서를 작성하여 회신키로 하였다. 그 당시 답변의 요지는 건의서의 내용이 역사의 발전과정을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사료에 대한 충분한 비판과 해석이 결여되어 있다. 특히 인접과학인 고고학적 검토가 전혀 없고, 근본 자료가 될 수 없는 단편적이고 지엽적인 자료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더욱이 교과서는 국민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교재이므로, 새로운 학설이 등장하더라도 학계의 정설로 정립되기 전에는 교과서에 수록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사료의 해석에 있어서 학계에서 전혀 인용하지 않는 사료를 사용하며, 단군신화 문제에 대하여는 어느 민족의 역사에서나 기원과 건국의 과정은 대개 신화로 표현하고 있으며, 신화 속에는 역사적 사실도 내포되어 있으나 전부를 사실로 인정할 수는 없다. 왕검성과 낙랑의 위치에 대하여는 건의자가 제시한 사료에 비하여 사료가치가 더욱 높은 사료에 바탕하고 있으며, 출토된 유적과 출토품과 일치하지 않는다. 등등등. 다음에 다시 언급할 내용이므로 넘어가도록 하겠다.

 안박사는 건의서 채택에 실패하자 이제는 법원에 제소하게 된다. 문교부 장관을 상대로 행정소송과 민사소송을 건 것인데, 2년 간의 재판 끝에 학문적인 내용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받게 된다.

 황급히 공사(公事)를 보러 글을 자른다. 나머지는 공사(公私)가 다망하니 곧 올릴 것이다.


 1981년 국회 국사청문회의 진상 (中) : 교과서시정청원공청회와 주변 인물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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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과 같이 한의과대학에서 예과 2년, 본과 4년의 6년제 학문으로 형성된 것이 1964년이다. 바로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의 전신인 동양의과대학이라고 하는데, 이 부분에 대하여 몇 가지 자료를 첨가하여 뒤집던 내용을 밑에 술(述)하여 둔다. 혹여나 관심이 있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해방(解放) 이후에 의생(醫生)이라고 불리던 한의사들, 즉 왜정(倭政) 때에 한의사 면허를 받았던 사람들이 미군정 시절에 「의생협회」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대한한의사협회 홈페이지에서 언급하는 「조선의사회」가 아닌가 한다. 「조선의생회」라는 명칭도 있는데, 어느 것이 진짜 명칭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이게 이야기할 대상은 아니니까. 전의(典醫) 출신이던 박호풍(朴鎬豊)·김영훈(金永勳) 양 선생을 비롯하여 여러 사람이 참여하여 이 때에 「동양학관」이라는 한의학 강습소를 만든 것이 당시 해방 이후 최초의 한의학 교육기관이 아닌가 한다. 박호풍 선생은 이후 1957년에 동양의약대학 학장 시절에 문교부에서 최초로 한의학 교수증을 받는다.

동양학관말고 1939년에 동양의학협회 창립총회에서 동양의학강습소를 창립했는데, 1946년에 조헌영 선생이 인수하여 동양의학전문학원으로 허가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것이 나중에 동양대학관이 된다는 말인데, 알 수 없다.

이후에 박호풍 선생을 설립대표자로 하여 1947년 12월 31일에 재단법인 행림학원(杏林學院) 설립인가를 받고, 1948년 3월 24일에는 동양대학관을 설립하게 된다. 인문과학 및 동양의학과를 갖춘 4년제 을종대학으로, 관장은 이사자이던 박호풍 선생이었다. 당시 위치가 서울시 성동구 마장동 365번지라고 하는데, 지금은 없는 번지라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 비슷한 시기에 딱 마장동 365번지에 지금 강동구에 있는 한영고등학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음은 물론이다.

전쟁 직전인 1950년 5월에 동양대학관 제1회 졸업생 20명이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6월 10일에 부산동양의학전문학원이 설립되었다고(한의사협회 홈페이지) 하는데, 이 부분이 모호해서 잘 모르겠다. 하여간 동양대학관도 부산으로 쫓겨 내려갔는데, 왜정 때의 『조선의료령』(朝鮮醫療令, 1944·8·21 제령제31호)을 대체할 새로운 의료 관련 법률 제정의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제2대 국회에서 국민의료법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당시 본회의 속기록 등을 살펴보면 확실히 양의(洋醫)를 우위로 두자는 의견과 함께 한의사(韓醫師)가 아니라 한의사(韓醫士)로 하자, 한의원이 아니라 진찰소라고 하자는 의견도 있을 정도로 양의가 우세했으며, 실제 국민의료법에서는 의료업자로는 의료·치과의사를 제1종으로 하고, 보건원·조산원·간호원을 제3종으로 하면서 그 사이에 제2종으로 한의사를 두게 되었다. 당시 의생을 한의사로 하면서 조선의료령을 폐지하고 문교부장관이 인가한 한의학을 전공하는 대학을 졸업한자 또는 검정시험에 합격한 자로 규정하였는데, 이때 부산으로 피란중이던 동양의학관은 천막 하나를 세워 서울한의과대학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고 한다. 1951년 12월 15일에 설립인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1953년 3월 5일에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확실치는 않으나 아마 후자가 유력하지 않나 한다. 승격인가를 받아 개교한 것이 1953년 4월 1일이다.

서울 수복 이후에 안암동 산10의15호에 목조건물 단층 3개동으로 서울한의과대학이 들어섰다고 하는데, 번지가 물론 지금과 달라서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 번지수로 따지면 안암동5가 개운사 근처인데, 찾아간 사람 말로는 안암동 2가에 한의대길에 대광빌라 자리(경동교회 옆)가 자리라고 한다. 거기 도로 이름 유래도 그러하니 아마 여기일 것이다.

서울한의과대학이 1955년 3월 10일에 동양의학대학으로 바꾸었다가, 8월 1일에 약학과 병설하면서 다시 명칭을 동양의약대학으로 고치게 된다. 동양의약대학 한의학과는 1959년 3월 27일에 제1기(통산8기)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다시 명맥을 이어간다.

동양의약대학는 5·16 군사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부의 이른바 개혁조치로 다시 철퇴를 맞게되는데, 교육에관한임시특례법을 만들어 학교의 정비 조치가 가능하게 만든 뒤 학교정비기준령을 통해 특정 종파의 신학교나 기준에 미달하는 학교를 폐지할 수 있도록 만들면서 기준에 걸리고 만 것이다. 결국 1962년에는 제1학년생 모집이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결국 1962년 3월 27일에 각종학교인 동양의약학교 설립인가를 얻어내 명맥을 유지하고자 하였으나, 의료법 개정을 통해 한의사 면허의 자격을 「국공립대학교의과대학에서 의과대학과정중 최종 2년간 한방의학과에서 한방의학을 전공한 자로서 한의학사의 학위를 받고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한 자」로 규정하면서 유일한 한의학 교육기관조차 폐지될 위기에 이르렀다.

이 때 동양의약대학 부활 투쟁이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대한한의사협회 회장자리마저 전임 회장이 사망하면서 공석이 되었다. 이 때 당시 종로에서 성제원한의원을 하던 김정제 선생이 회장이 되었는데, 그 당시의 학생대표였던 김병운 선생의 회고가 다음과 같다.

"의료법 개정을 요구하러 간 학생들에게 김 회장은 국가재건최고회의의 문사분과위원장이 누구냐고 묻더군요. 홍종철이라고 대답하자 '홍 장군은 내가 잘 알지, 내 환자야!' 하면서 얼마 후 돈화문앞 집으로 홍종철 위원장을 초대하였어요. 이 자리에서 김 회장은 한의계의 입장을 전달하였으나 홍 위원장이 거절하자 홍 위원장의 부인이 '김 회장이 생명의 은인인데 안 해주면 어떻게 하느냐'고 항의했어요.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이 폐기되고 의료법개정안도 14조 2항이 수정되어 최고회의를 통과하였습니다. 동양의약대학이 부활한 것이지요."

1963년 12월 13일에 동양의학대학이 부활되었고, 3일 뒤에 예과 2년 본과 4년의 6년제 의가대학 인가가 났다. 마침 의료법 개정안에서 면허 자격을 「의과대학 한의학과에서 한방의학을 전공한 자로서 한의학사의 학위를 받고 한의사국가시험에 합격한 자」로 규정하는 바람에 1월 21일에 다시 이름을 동양의과대학으로 바꾼다.

행림학원과 동양의과대학은 1965년에 경희대학교에 합병되는데, 당시 경영난에 봉착한 동양의과대학은 우선 동국대와 고려대에 합병을 타진했으나 불발되어서 경희대로 온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 이로써 3월 27일에 흡수 합병을 결의하고, 한 달 만인 4월 27일에 합병 조인과 함께 대지 6천 평, 건평 1만 592평의 의대부속병원을 착공한다. 이것이 오늘날의 경희의료원의 출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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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같이 반년이 지나가고, 또 다시금 결산을 해본다. 이번에는 2009년 3월 1일부터 2009년 6월 20일까지의 것이라 양이 적다. 책을 많이 안본 탓도 있고.

  1. 文明史のなかの明治憲法 (瀧井一博)
  2. ドイツ法入門 (村上淳一)
  3. (図解でわかる) 憲法 (高野泰衡)
  4. 道州制で日はまた昇るか (道州制.com)
  5. 세 천황 이야기 (安田浩)
  6. 천황과 도쿄대 (立花隆, 1940-)
  7. 法典論 (穗積陳重)
  8. 護憲の論理18のポイント (小倉正宏)
  9. 憲法が変わっても戦争にならないと思っている人のための本 (高橋哲哉)
  10. 日本憲法 : 学説と判例 (尾吹善人, 1929-)
  11. 헌법 (김효전)
  12. 憲法起草回顧錄 (유진오)
  13. 平和憲法の確保と新生 (深瀬 忠一)

쓰고 보니 정말 몇권이 안된다... 오부키 교수 책(10번)은 그냥 정리가 깔끔하다. 도해로 아는 헌법이니 하는 것도 사실 도해라고 할 만한게 별로 없고... 다카하시 교수의 책(9번)은 앞부분의 그림이 신선했다. 헌법이나 수치같은 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그런거, 정종섭 교수 책(이라고 하긴 뭣하지만)이 좀 원초적인 형태로 그런 느낌을 주고 있는데.

김효전 교수 책(11번)은 소화출판사에서 한국개념사총서의 세번째 이야기로 낸 것이다. 헌법이란 용어가 조선에서 어떻게 들어오고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 물론 그뿐만 아니라 당시 법학 전반에 대하여 재밌는 이야기를 상당히 해주고 있다. 당시 책에 나온다고 소개한 구절 가운데 하나를 옮겨보면 "헌법이란 자는 歐語로 칭하기를 매개내 촤테(Magna Charta)라. 其 意가 대개 후략". 일전에 놀랐던 사실이지만, 구한말엽에 이르러서는 외국 학자가 일본을 거쳐 소개된 사람이(소개만 된거지만) 적지 않았다더라.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다치바나 선생의 천황과 도쿄대. 3월쯤에 빌렸을 적에는 저 책이 작년 8월에 나온 2권짜리 양장본 두꺼운 책인듸, 아무도 빌려보지 않았던지 반년밖에 안된 주제에 불면 먼지가 날아다녔다. 하여간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못보다가, 4월 27일에 1권을 빌린 뒤로 2권까지 다 해서 딱 한달동안 읽었다. 정말 재밌다.... 아오 저런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있는지, 사실 천황과 도쿄대라는 제목처럼 천황제 질서에서 도쿄대가 하는 역할이었다기 보다는, 근대 일본 대학 질서에서 도쿄대라는 제국대학의, 근대 국립대학의 형성과 함께 다이쇼-쇼와초를 전후로 하는 그 물결들, 대학의 자치라던지 연구의 자유라던지, 그런 부분하고 역시 또 미노베 교수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재밌어서 잘 읽었다. 사실 천황제라던지 그런데 관심도 많고, 연구할 꺼리도 있다고 생각은 하지만 탁 까놓고 근본적인 관점에서의 천황제 존폐문제라든지 이런 것에는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다...

마지막으로 유진오 박사의 헌법기초회고록인듸, 이것은 보아야 제맛이다. 여기서 거론할만큼 두꺼운 책도 아니고. 1980년도에 일조각에서 나온 세로쓰기 양장이다. 어디 재판이나 그런게 있나 방금 찾아봤는데 없는거같고, 가끔 레퍼런스로 나오는 책이니 한번쯤 봐두어도 재밌을 것이다. 내용도 딱딱하지 않고 재밌다. 해방 정국의 풍경이나, 그 정치세력간의 다툼의 연장을 하나하나 지적하고 있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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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늦었다. 이번 것은 2008년 8월 28일부터 2009년 2월 29일까지의 것이다.

  1. 도서관과 저작권법 ( 홍재현 )
  2. 日本国憲法の同時代史 ( 同時代史学会 )
  3. 한국 형사소송법 ( 이영란 )
  4. 新刑事訴訟法演習 ( 이재상 )
  5. (이재상박사의) 형법 케이스의 바이블 ( 이재상 )
  6. 憲法學 ( 홍성방, 1952- )
  7. 일본총리열전 ( 宇治敏彦, 1937- )
  8. 메이지 천황 ( Keene, Donald, 1922- )
  9. (서양인이 본 일본 역사)일본 근현대사 ( McClain, James L )
  10. 최신 협동조합론 ( 전성군 )
  11. 세탁소 ( 森淳一 )
  12. 슈거타임 ( 小川洋子, 1962- )
  13. 수소 혁명 ( Rifkin, Jeremy )
  14. 메이지 천황 ( Keene, Donald, 1922- )
  15. 태어나는 숲 ( 島本理生, 1983- )
  16. 사랑, 사라지고 있습니다 ( 松尾由美, 1960- )
  17. 레몬일 때 ( 豊島ミホ, 1982- )
  18. 약지의 표본 ( 小川洋子, 1962- )
  19. 천사의 사다리 ( 村山由佳, 1964- )
  20. 미나의 행진 ( 小川洋子 )
  21. 한나라 기행 ( 사마료태랑 ) - 본거같지가 않다. 다른 사람이 달래서 줬나..
  22. (실전체계) 가족법 ( 정민철 )
  23. 위헌결정 판례정리 ( 정회철 )
  24. (要約) 憲法判例205 ( 植野妙実子 )
  25. 民法 ( 정민철 )
  26. 형사소송법강의 ( 이재철 )
  27. 民法演習 ( 지원림 )
  28. 야마토는 내가 만든다 ( 大久保隆弘, 1954- )
  29. 대학교수 되는 法 ( 鷲田小彌太, 1942- )
  30. 생협 인프라의 사회적 활용과 그 미래 ( 中村陽一 )
  31. 教材憲法判例 ( 中村睦男 )
  32. (글로벌시대의) 대외무역법 ( 김현지 ) - 누가 빌려달래서 줬는데 예수믿으라고 전도하는 사람이었다..
  33. (要約) 憲法判例205 ( 植野妙実子 )
  34. 憲法判例 ( 戸松秀典 )
  35. 만국공법 ( 김용구 )
  36. 民法學 ( 김형배 )
  37. 憲法論爭 ( 林修三, 1910- )
  38. 初学者のための憲法学 ( 麻生多聞 )
  39. 知ってる? 私たちの平和憲法 ( 藤末健三 )
  40. (戰爭と憲法危機の時代に) 政治をあきらめない ( 福島みずほ )
  41. 憲法學の現代的論点 ( 安西文雄, 1957- )
  42. 나는 일본 친구가 좋다 ( 박종현, 1969- )
  43. 궁궐의 안내판이 바뀐 사연 ( 아름지기 )
  44. 나쓰메 소세키 ( 권혁건 )
  45. 최후의 끽연자 ( 筒井康隆, 1934- )
  46. 텐텐 ( 藤田宜永, 1950- )
  47. 연경, 담배의 모든 것 ( 이옥, 1760-1813 )
  48. 宮沢俊義の憲法学史的研究 ( 高見勝利 )
  49. 芦辺憲法学を読む ( 高見勝利 )
  50. 日本國憲法新講 ( 一倉 重美津 )
  51. キーワードで読む白書入門 ( ぎょうせい白書研究会 )
  52. 基本法学入門 ( 蓮井良憲 )
  53. (最新) 法令用語の基礎知識 ( 田島信威 )
  54. 女性天皇は皇室廃絶 ( 中川八洋 ) - 빌리고보니 잡소리였다..
  55. 지구를 색칠하는 페인트공 ( 양귀자 )
  56. 노마만리 ( 김사량 )
  57. 30년만에 부르는 커피한잔 ( 배인순 )
  58. (역주) 이옥전집 ( 이옥, 1760-1813 )
  59. 고속도로 통행권에 복권을 붙이면 정말 좋겠네 ( 박원순 )
  60. 슬픔도 힘이 된다 ( 양귀자 )
  61. (양귀자 인물소설)길 모퉁이에서 만난 사람 ( 양귀자 )
  62. 구만리 하늘 ( 박혜원, 1939-2005 )
  63. 人間趙永植博士 101人集 ( 인간조영식박사 101인집 출간위원회 )
  64. (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 ( 이영미 )
  65. 우게쓰 이야기 ( 上田秋成 )
  66. 세밀한 일러스트와 희귀 사진으로 본 근대 조선 ( 김장춘, 1945- )
  67. 근대 일본의 학문 ( 鹿野政直, 1931- )
  68. 文明史のなかの明治憲法 ( 瀧井一博 )

각 권에 넣기보다 총평식으로 쓴다. 연경이나 이옥전집은 임야옹이가 연경연경하길래 빌렸다가 꽂힌 책이었고, 미야자와 도시요시의 헌법학사적 연구나 아시베 헌법학을 읽다와 같은 책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정리도 잘해놓았고, 다카미씨라는 양반에 좀 흥미가 생긴 계기. 키워드로 읽는 백서입문이나 법령용어의 기초지식은 정말 재밌었다. 조선에도 저런 책이 있으면 좋겠는데, 백서와 관련한 이야기를 한번 써보고 싶기도 하다. 원래 백서란게 잘만 쓰면 조선에서 맨날 떠드는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한 방안이기도 한데.. 양귀자 에쎄이도 참 재밌다. 원미동사람들 필이 나서 좋았다. 우게쓰 이야기도 일전에 겐지 이야기를 읽다가 만 기억이 있었는데, 이놈은 잘막잘막한 여러 편이 있어서 김향은네 집에 가는 버스에서 다 읽었드랬다. 인간조영식박사 101인집은 조박사에 대한 흥미를 키워준 좋은 책.

일본총리열전도 재밌다. 이건 그냥 보는게 낫고. 야마토는 내가 만든다는 일본 굴지의 택배사 야마토 운수의 사원들 이야기. 야마토 운수가 성장하는데 어떠한 바탕이 작용했는가, 라기보다 결국 직원이 어떤 사람이냐의 문제인데. 이 건과 관련하여 메모한 것이 있는데 이것도 나중에. 물론 우체국에서 쓸 수 있는 택배개선책이다. 대학교수되는法은 참 재밌는 책이다. 대학교수로 나아간 여러 유형에 대해서 서술했다...기 보다는 결국 웃고 넘긴 부분도 있긴 하지만. 조선에서는 아직도 광풍이 몰아쳐서 저런 책이 안통하지만. 고속도로 통행권에 복권을 붙이면 정말 좋겠네는 전유성씨랑 박원순씨랑 박준형씨랑 쓴 책인데, 아이디어 희망제작소와 관련하여 아이디어 이야기를 잔뜩 적어놓은 책. 이런 책도 상당히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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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글을 쓰거나 하면 반드시 번문(飜文)하듯이 새로 쓰고, 또한 퇴고도 거쳤는데 근래에는 그런 일이 팍 줄어들었다. 글 쓸 일이 좀 있는 탓도 탓이겠지만, 이것저것 번거로운 일이 귀찮아져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다.

근래에 번역을 여러차례 하면서도 퇴고를 거의 거치지 못했다. 그러고보니 일전에 번역한 글들을 보면서 고칠 부분이 적지않음을 깨닫기도 했다. 일본국헌법의 경우에는 번역 초기라서 한국어로 완전 편역하기까지 하면서 한국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하는 측면을 강조하는 바람에, 이제와서 일부분 이해하기 어려울지라도 원문의 느낌을 최대한 살리고 한국어에 존재하는 표현의 경우에는 난해한 표현이나 어려운 글자라도 무조건 살리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존속살 위헌 판결의 경우에는 좀 사정이 다르게도, 저러한 측면 대신 변경한 방침대로 충실히 번역하여서 그 건에 대하여는 문제가 거의 없다. 그러나 원체 장문인지라 번역에 두 달 가량 걸린 것과 마찬가지로, 이 퇴고를 거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문제로 드러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역시 문서는 인쇄를 하여 활자로 보아야 헛점이 드러나는 법인데, 이것 인쇄를 하여보니 중간중간 오타도 있고 또한 원문을 파악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음을 깨달았다. 친자(親子)가 바로 그것인데, 이것을 일본에서는 부모자식이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한다(물론 법률적 측면에서 한국과 같이 친자식을 의미하는 경우도 있다). 번역 당시에는 한자를 부기하니 궁구한다면 그 의미를 파악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 퇴고를 하면서 생각하니 도저히 조선에서 이를 부모자식으로 이해할 가능성이 희박하다. 게다가 여러 자료를 참고하니 조선에서 부모자식이라는 뜻으로 친자를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전무하기까지 하니 더이상 이 표현을 살려서는 오죽하랴. 그래서 이를 부모자식으로 표기하고 親子를 부기하는 것으로 고치고자 하고 보니 이 표현이 중간부분에서만 등장하였으므로 모두 고치게 되었다.

글 쓸 때에는 역시 퇴고가 가장 중요한데, 번역에 있어서도 퇴고하지 아니하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반드시 생기리라는 것을 깨달은 근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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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2. 이번 것은 2008년 3월부터 2008년 8월 오늘까지의 것이다. 이번은 내용이 좀 빈약허다.

  1. 국민요리책 (김민희) - 먹고 살려고 보았는데 허접이하다...
  2. 일본법 입문 (정종휴, 1950-) - 오랜만의 단물같은 책이다.
  3. 韓日關係와 東北아시아의 새로운 비전을 찾아서 (한국현대일본학회)
  4. 한일관계의 새로운 이해 (유영렬)
  5. 해방 후 한일관계의 쟁점과 전망 (한일관계사연구논집. 편찬위원회)
  6. 한국과 일본의 새로운 시작 (田中宏, 1937-)
  7. 일본은 한국에게 무엇인가 (김영작)
  8. 日·中·韓のナショナリズム (松本健一)
  9. 어떤 시도 (이두영) - 신선한 책.
  10. (註釋) 民法 (박준서)
  11. (註釋) 民法 (박준서)
  12. (註釋) 民法 (박준서)
  13. 헌법국가의 도전 (Kriele, Martin, 1931-)
  14. 민주주의 세계 혁명 (Kriele, Martin)
  15. (客觀式) 憲法 (민경식)
  16. (客觀式) 憲法 (민경식)
  17. (핵심) 헌법판례총정리 (신동욱)
  18. (기본강의) 헌법 (정회철)
  19. (비비천사의) 도쿄 다이어리 (서윤희)
  20. 헌법재판소 판례정리 (차강진)
  21. 刑法學 (이재상)
  22. 民法學 (金亨培)
  23. 한국의 법학자 (최종고)
  24. (투자자의 멘토 박용석의) 부동산 경매 권리분석 첫걸음 (박용석)
  25. 憲法 (網中政機, 1943-)
  26. (2차대비) 상법 (법률저널)
  27. 세계각국의 헌법재판소 (고문현)
  28. 스물 한 살의 프라하 (박아름)
  29. 경국대전의 편찬과 법이론 및 법의 정신 (김재문) - 참신한 책이다. 이거이는 잘 쓰고 있다, 아직.
  30. 憲法學 (홍성방, 1952-)
  31. (기본강의) 행정법 총론 (홍정선)
  32. 헌법 (김현석)
  33. 헌법사례연습 (김선택)
  34. 정치란 무엇인가 (竹下登, 1924-) - 다케시타 노보루의 자전적 회고록이다.
  35. (史傳) 이토 히로부미 (三好徹, 1931-)
  36. 일본의 민주주의 (김웅진)
  37. 憲法 (芦部信喜) - 이 후로 아시베 교수의 책을 한권 소장하게 되었다. 도서관에서 훔친 것은 아니다...
  38. MA와 하우징 디자인 (강인호)
  39. (권영걸 교수의) 공공디자인 산책 (권영걸)
  40. 로맨스 소설의 7일 (三浦しをん, 1976-)
  41. 사막 (伊坂幸太郞, 1971-)
  42. 슬로 굿바이 (石田衣良, 1960-)
  43. 나카노네 古만물상 (川上弘美, 1958-)
  44. (니시노 유키히코의) 연애와 모험 (川上弘美, 1958-)
  45. 명랑한 갱이 지구를 돌린다 (伊坂幸太郞, 1971-)
  46. 허수아비의 여름 휴가 (重松淸, 1963-)
  47. 마음 (夏目漱石, 1867-1916)
  48. 憲法 (芦部信喜)
  49. 나는 소세키로소이다 (小森陽一, 1953-) - 잃어버린 책을 도서관에 갖다주고 다시 보았다. 소세키는 역시 짱이다.
  50. 길 위의 생 (夏目漱石, 1867-1916)
  51. 전학생 모임 (角田光代, 1967-)
  52. 恋空 (美嘉)
  53. 잊지 않겠다고 맹세한 내가 있었다 (平山瑞穗, 1968-)
  54. 비오는 날 돌고래들은 (片山恭一)
  55. 세상의 끝에 머물다 (片山恭一, 1959-)
  56. 꿈을 주다 (綿矢りさ, 1984-)
  57. 나츠메 소세키 문명론 (夏目漱石, 1867-1916)
  58. 유리문 안에서 (夏目漱石, 1867-1916)
  59. 恋空 (美嘉)
  60. 한일 역사인식 논쟁의 메타히스토리 (한일, 연대 21)
  61. 럭키걸 (瀬尾まいこ, 1974-)
  62. 古書이야기 (박대헌, 1953-)
  63. (투자처가 한눈에 보이는 2008) 업계지도 (이데일리) - 이정도는 보아야 주식이를 하지.
  64. 憲法 (芦部信喜)
  65. 日本国憲法 (松井茂記) - 얘도 한권 소장한다.
  66. 아주 사적인 시간 (田邊聖子, 1928-)
  67. 그 거리의 현재는 (柴崎友香, 1973-)
  68. 이케부쿠로 웨스트 게이트 파크 (石田衣良, 1960-) - 이시다 이라의 책을 질리도록 보았다.
  69. 뼈의 소리 (石田衣良, 1960-)
  70. 소년 계수기 (石田衣良, 1960-)
  71. 도쿄돌 (石田衣良, 1960-)
  72. 화해와 내셔널리즘 (若宮啓文)
  73. 분홍빛 손톱 (あさの あつこ)
  74. 憲法理論과 憲法 (허영, 1936-)
  75. 일분만 더 (原田マハ)
  76. 하얀 거탑 (山崎豊子, 1924-)
  77. 돌풍지대 (山崎豊子, 1924-)
  78. 바람에 휘날리는 비닐 시트 (森繪都, 1968-)
  79. 동경 산책 (町田康, 1962-)
  80. 로마법 산책 (Knütel, Rolf)
  81. 日本国憲法 (松井茂記)
  82. 憲法 (芦部信喜)
  83. (註釋) 民法 (박준서)
  84. 슈크림 러브 (長嶋有, 1972-)
  85. 韓國 著作權法의 立法過程과 情報共有運動에 關한 考察 (이재길)
  86. 著作人格權에 관한 硏究 (김근우)
  87. 내 나이 서른 하나 (山本文緖, 1962-)
  88. 도쿄 밴드 왜건 (小路幸也, 1961-)
  89. 썸머 스노우 (小松江里子)
  90. 일본국회론 (김현우)
  91. 경국대전의 편찬과 법이론 및 법의 정신 (김재문)
  92. (세밀화로 보는) 한반도 조류도감 (송순창)
  93. 일본국회론 (김현우)
  94.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헌법학자) 윤후정 (이은경)
  95. 한국국회론 (김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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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하나 그리고 여럿 - 10점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 지음/강

문화정체성에 대한 수호 의지가 각별한 나라 프랑스. 프랑스의 이와 같은 애착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책은 프랑스 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관용 정신과 문화상대주의가 오늘날 프랑스 문화의 다양성과 역동적인 조화와 공존을 낳았다고 보고, 이와 같은 정신의 형성배경에 대해 프랑스의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맥락 아래 다각도로 살펴보고 있다.


이 책을 펼치고 가장 놀랐던건 웬 저자가 짠듯이 "서울대학교 불문과 졸업"이라는 학력이 17명 전원에게 붙어있는데다, "프랑스 파리x대학 불문학박사"나 "서울대학교 불문과 강사"가 줄줄이 붙어있길래 이게 무슨 조화냐 싶었더니 서울대학교 불어문화권연구소에서 지은 책이었다. 이런 망측한 일화는 집어치우고.

한국 사회에서 '프랑스'라는 나라에 가지고 있는 애증(愛憎)은 깊다고 생각한다. 아니면 말고. 하여간 "똘레랑스"라든지, "빠리의 택시운전사", "떼제베"와 같은 몇몇가지 상징적인 점들이 파고들어 이제 프랑스에 대한 지식이 많이 보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라는 나라에 직접적으로 접근할 만한 일은 보통 사람들에게는 적을테지만. 이 책은 무겁지 않은, 그렇지만 가볍지도 않은 적절한 문체로 프랑스에 대한 다양한 접근을 보여준다.

총 4부로 구성된 책에서, 1부는 "프랑스적 가치"라는 제목 아래로 흔히 보는 톨레랑스나 앙가주망과 같은 여섯가지 주제를 묶어 놓았다. 한 나라를 알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사상, 즉 위의 제목과 같은 "~적 가치"와 같은 부분을 알면 접근하기가 쉬워질 뿐만 아니라 문화나 사회, 역사와 같은 것들의 형성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런만큼 1부에서 이런 부분을 다룬 만큼 그 뒤에 있는 "프랑스인의 삶"이라거나 "프랑스 사회", 그리고 "간추린 프랑스 문화사"까지 책 전반을 관통하는 시선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책 전체에서 그에 대한 내용과 함께 다양한 사진과 그림을, 그리고 시사적인 부분과 같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어 이해가 더 쉽다.

한불수교 120주년을 맞이하는 이때에, 서로가 서로를 잘 알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픈가. 다양한 사상과 현상을 접하고, 또한 우리에게 다시 접목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겠다. 그런만큼 공존하는 원리, 행동하는 지성, 과거 존중과 개혁성 등은 한번 더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리고 하나 '프랑스어'와 '문화예술', 그리고 '미디어' 부분에서 느낄 수 있었던 문화적인 격차ㅡ는 문화의 우수성따위가 아닌 예술이나 그런 따위를 세우고 펼치는 그런 의미의 문화ㅡ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할 수 있었는데다, 부러움이 먼저 앞서는게 가장 큰 느낌이었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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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과 같이 정리해 보았다. 이번 것은 2007년 9월(7-8 양월간은 방학이었으므로 집에 가느라 없다)부터 그해 12월까지의 것이다.

  1. 우정사업경영합리화 (정보통신부) - 우정사업을 어찌 합리화하겠나. 내 글들을 참조하라.
  2. 光州. 全南 郵政 100年史 (광주. 전남 우정 100년사 편찬위원회)
  3. 한국우정 100년사 (한국우정100년사 편찬위원회) - 재미가 있는 책이다.
  4. 아베의 일본 (신지홍)
  5. 슈퍼마켓 스타 (桂望實)
  6. 우리가 모르는 일본인 (최관) - 이책 이후로 조선인이 쓴 일본이야기라는 것의 허망함을 깨달았다. 조선도 파악하지 못하는 자들이 어찌 일본이나마 파악하겠으며, 그런 자들의 일본인에 대한 파악은 또 어떠할 것인가.
  7. (형법·형사특별법) 죄명표 (박태곤) - 참으로 재미있다. 형법 및 형사특별법에서 성립가능한 죄명을 모두 열거해 놓았더라.
  8. 영원한 재야, 대인 홍남순 (양진형)
  9. 돈명이 할아버지 (간행위원회)
  10. (묵점 기세춘 선생과 함께하는) 성리학개론 (기세춘)
  11. (묵점 기세춘 선생과 함께하는) 성리학개론 (기세춘) - 책이 두번 들어가있는데 앞엣것은 상권인줄 알고 빌린 하권이고, 뒤엣것은 놀라서 빌린 상권이다.
  12. 韓國史大觀 (이병도) - 명저. 대관하라.
  13. 한국고대사연구 (이병도)
  14. 달라이 라마 하버드대 강의 (Bstan-'dzin-rgya-mtsho, 1935-) - 내가 좋아하는 달라이라마의 강의록이다.
  15. 朝鮮王朝 刑事制度의 硏究 (서일교)
  16. C로 배우는 프로그래밍 기초 (강환수)
  17. 한국사 (국사편찬위원회) - 이 책을 비롯한 여러 책들이 몇번째 권인지 나오지 않지만, 다 권수가 있다.
  18. 법학입문 (홍성방, 1952-) - 잘 쓴 책이고, 잘 만든 책이다. 다만 비싼 것이 일말의 흠.
  19. 법학방법론 연구 (김유미)
  20. 위대한 法思想家들 (최종고)
  21. 韓國의 法學者 (최종고) - 20번과 21번의 양 권은 최종고교수의 저서인데, 법학자에 대하여 재미있게 정리해 놓았더라.
  22. 필묵의 황홀경 (김정환) - 엇더한 책인지 기억이 아니난다.
  23. 한국 일본학의 현황과 과제 (진창수) - 조선것들은 베껴오기만 잘하고 배우려는 의지가 없어 안타깝다. 이걸 보고 혐일주의에 대한 글이노를 썼었다.
  24. (조선시대) 한양의 입지 논쟁 (김현욱)
  25. 諡號, 한 글자에 담긴 인물 評 (이민홍) - 좋은 책.
  26. (작은) 헌법 핵심정리 (정회철) - 시험기간이라 급했다.
  27. (註釋) 民法 (박준서) - 급했지만 그냥 봤다. 물론 이 책도 권수가 있다.
  28. 憲法學 (계희열) - Kay Hee-yol 교수의 명저.
  29. (객관식) 형법 (김일수) - 복사하려고 빌렸었다.
  30. (註釋) 民法 (박준서) - 27번과 동.
  31. 어떤 시도 (이두영) - 일본국과 조선의 관계에서 참고할만한 좋은 책이다.
  32. (註釋) 刑法 (박재윤) - 30번과 동.
  33. (註釋) 刑法 (박재윤) - 32번과 동.
  34. 憲法學 (계희열) - 28번과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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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속해있는 대학(농담대학은 아니다)의 도서관에서 대출이력을 살펴볼 수 있다. 이를 보아 내가 무슨 책을 읽었는지 대강은 짐작할 수 있으므로, 잠깐씩 적어보고자 한다. 다를 알 수 없는 것은 내가 타인의 명의를 모용하여 대출을 한 례가 있거나, 또는 보지 아니한 책,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읽거나 복사하여 본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내역은 2007년 3월부터 그해 6월까지의 기록이다. 추천서는 굵게 하였고, 읽지아니한 것은 엷게 처리하였다. 분실한 것은 붉게 적었다.

  1. 일본현대정치사 (김현우)
  2. 일본 정치의 이해 (平野浩, 1959-) :: 정치적인 쟁점을 대부분 보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서술되어 있다. 내가 처음 빌린 책으로 아깝지 않다. 3월 8일에 빌려가서, 3월 29일에 반납하였다.
  3. 일본 전후정치사 (石川眞澄, 1933-2004) :: 위의 두 책처럼 좋은 책이다. 같이 빌렸지만, 이 책을 먼저 보았으므로 같은 달 13일에 반납하였다.
  4. 대안의 그녀 (가쿠타 미쓰요)
  5. 인생 베스트 텐 (가쿠타 미쓰요)
  6. 거짓말의 거짓말 (요시다 슈이치) :: 요시다 슈이치의 책이 한국에서 그렇게 인기가 있게 될 줄은 몰랐다.
  7.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 소세키를 문호로 인식하고 좋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구매하여 지금은 김향은이네 집에 대여하고 있다.
  8. 당신곁에서 (野中終, 1964-)
  9. 봄 안개 피어나는 아침으로 가다 (唯川惠)
  10. (법을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춤추어라 (천정배) :: 드디어 법적 문제가 관련된 책을 빌리였다. 크게 중요한 내용은 없었지만 괜찮은 책이었다.
  11. 삼월은 붉은 구렁을 (恩田陸, 1964-)
  12. 일본정치론 (박영준, 1963-)
  13. 절대주의 국가의 계보 (Anderson, Perry) :: 왜 빌렸는지 모르겠다 라고 적고보니 아마 교양으로 듣던 서양근대와혁명의 추천도서였던 것 같다.
  14. 아내의 여자 친구 (小池眞理子)
  15. 韓國憲法史 (김철수) :: 헌법사 레포트를 쓴다고 봤었다.
  16. 오피스 2003과 Access (서영호, 1956-) :: 김라익이가 빌려간 책이다.
  17. 現代日本政治史 年表ㆍ解說 (戰後日本政治史硏究會)
  18. 근대 일본의 천황제 (영목정행)
  19. 55년 체제의 붕괴와 정치변화 (이면우)
  20. 근대 일본사상 길잡이 (鹿野政直, 1931-) :: 이 책은 분실하였다. 농협에서, 아마.
  21. 멸망하는 국가 (立花隆, 1940-)
  22. 법학을 위한 투쟁 (Kantorowicz, Hermann, 1877-1940)
  23. 일본 전후사 1945-2005 (中村政則)
  24. 빨간벽돌창고와 노란전차 (강동진)
  25. (서울대학교)法科大學百年史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동창회) :: 위키에 써보려고 빌렸었다. 결국 쓰지 않았다.
  26. 도쿄대생은 바보가 되었는가 (立花隆) :: 괜찮은 책이었다. 단 추천하고 싶지는 아니하다.
  27. 전환의 도시 목포 (sa) :: 목포는 항구다.
  28. 시민이 참가하는 마치즈쿠리 (西川芳昭, 1960-) :: 일본의 내용이다. 참고하라.
  29. 폐인과 동인녀의 정신 분석 (齋藤環, 1961-) :: 미친 책이었다.
  30. (단권화) 형법 (송헌철)
  31. 헌법의 바이블 (김현석)
  32. 民法의 爭點 (송영곤) :: 중간고사를 앞두고 빌리었다. 삼법을 동시에 하는 대학스럽다.
  33. 나가사키 (吉田修一, 1968-)
  34. 도쿄 스터디즈 (吉見俊哉, 1957-)
  35. 21세기 천황제와 일본 (박진우)
  36. 일본건축가 100 (김기수)
  37. 나는 소세키로소이다 (小森陽一, 1953-) :: 이 책도 분실하였다. 고깃집에서, 아마.
  38. 행정중심복합도시 백서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 :: 서고에서 꺼냈다가 그 자리에서 반납했다.
  39. 부산체신청 100년사 (부산체신청) :: 위키에 쓰려고 보았으며, 교양을 위해 보았다.
  40. 여름의 소금 (에다 유리)
  41. 플라스틱과 두 번의 키스 (에다 유리)
  42. 메시지 (에다 유리)
  43. 과민증 (에다 유리)
  44. 끝없는 하늘 (에다 유리) :: 에다 유리로 떡을 쳤다.
  45. 일본문화론의 계보 (大久保喬樹, 1946-)
  46. 다이쇼 문화 (南博, 1914-2001)
  47. 세계의 도시 (국토연구원)
  48. 분단시대의 법정 (한승헌) :: 이 책을 보다가 교수한테 수업 안듣는다고 한소리 들었다.
  49. 일본헌법제도론 (이상윤) :: 훌륭한 책이었다.
  50. 출판 프로젝트 X (長岡義幸)
  51. (출판 정신으로 무장한) 일본 小출판사 순례기 (小島淸孝, 1947-2005) :: 둘 다 비슷한 내용이다. 출판사의 중요성을 절감한다.
  52. 헌법 다시 보기 (김상준)
  53. 일본의 지역문화 경영 (서연호)
  54. 民法의 爭點 (송영곤) :: 시험이 또 날 불렀다.
  55. (영한대역) 국제조약 (박웅용)
  56. (일본) 최고재판소 이야기 (山本祐司) :: 번역이 중간에 틀린 것이 몇몇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좋은 책이다.
  57. 미술사의 기초개념 (Wilfflin, Heinrich) :: 김라익이가 빌려갔다.
  58. 헌법과 미래 (강원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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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은, 내가 다니는 학교인 경희대학교에서 2008년 연례보고서 목련리포트를 냈다. 부제는 경희의 미래, 대학의 미래. 이 대학교육이란 것, 즉 고등교육이란 것에 대하여 일전에 몇 차례 지적한 바가 있는데,[각주:1] 일단은 경희대학에서 이렇듯 고등교육의 희망에 대한 다양한 시도를 한다는 것이 반갑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들리는 소문을 규합하면, 이 경희대학의 경희(慶熙)라는 교명은 조영식 학원장과 학교의 초기 구성원들이 서울고등학교(당시에는 경희궁 터에 있었다)와 관련이 깊어서 뒷산인 경희동산을 따 경희대학교라고 하는 것이 정설이지만, 이 또 다른 들리는 소문을 몇 가지 엮으면 경희궁은 조선의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궁궐이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이 설은 거의 근거가 없고, 조영식 학원장이 설명한 바를 따른다면 bright and happiness이니 경(慶)과 희(熙)이다. 또한 학원장의 사상이 네오르네상스이니, 대학의 이념자체가 문화세계의 창조를 통하여 홍익인간의 이념을 구현하고, 이상적인 인류사회의 재건을 추구하는 것이다. 현 총장도 학원장의 아들인 조인원 박사이니, 이러한 정신이 끊어지지 않을 것은 대충 명확한 사실이다.

목련이라는 것은 이 학교의 교화이니, 가곡 목련화는 학원장 설립자 미원(美源) 조영식 박사가 가사를 짓고, 음대 학장이던 김동진 교수가 곡을 지은 것으로 음대의 엄정행 교수가 노래한 것이 잘 알려져 있다. 학교는 이 목련에 대하여 '봄의 길잡이이자 새 시대의 선구자'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평화와 공영의 지구공동체를 모색하는 상징이라고 하고 있다.

하여간 동 보고서는 대학의 역할이 시대의 뜨름에 따라 흔들리고 있으며, 학문 외적 논리가 대학의 권위와 위상을 실추시키고 있다고 진단하고 대학은 대학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학문적 권위를 재건하는 데에 힘을 쏟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특히 상업적 생산성은 더 이상 대학교육의 목표가 될 수 없다고 하고, 이를 위한 여러가지 대책을 내놓고 있다(자세한 사항은 생략한다).

분명 문제를 파악하고, 진단하면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지 못하는 것은 대학 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책임이다. 경희대학이 이러한 상황에서 내놓은 보고서에서 약간의 희망을 엿보았지만, 물론 좋은 말로만 씌운 보고서일지도 모르고, 또한 말로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비판을 뒤로하고, 대학에서 작으나마 희망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을 하고 싶다. 또한 고등교육이 진정한 고등교육으로 나아갈 수 있는 새 길을 한 학교가 열어가고자 한다는 것에 대해 좋은 말을 해주고 싶은 것이 나의 소망일지 모른다.
  1. 대표적으로 <A href="http://7t7l.tistory.com/579" target=_blank>한국의 한국어 교육과 교육체계의 상실 : 정신줄 놓은 인수위의 영어교육방안에 비추어</A>를 참조.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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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이 이 밤에 전소되어 버렸는데, 그 중에 편액만은 우선 건져내었으므로 이 편액 이야기를 잠깐 하고자 한다.

대중에 알려지기를 이 편액이 조선조 태종대왕의 장자이신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쓰신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익히 알려진 대로 지봉유설(芝峰類說)에서 설한 것을 받은 것인데, 이후에 이리저리 전해지면서 가장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또 일설은 조선의 명필가이자 신숙주의 부친이던 신장(申檣)의 글씨라고 하는데, 이것은 김추사(金秋史:추사 김정희)의 완당집에서 이른 것을 받은 것이다. 또한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오주(李五州:오주 이규경)는 그 저서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각주:1]에서 이 유래를 상세히 살피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하였다.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讓寧大君)의 글씨라 한다. 임진왜란 때에 왜적들이 그 액자를 떼어 버려 유실되었는데, 왜란이 평정된 후 남문(南門) 밖의 못[池] 근방에서 밤마다 괴이한 광선(光線)을 내쏘므로 그곳을 발굴하여 다시 이 액자를 찾아 걸었다고 한다.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이다. 그렇다면, 국초(國初)에 걸었던 편액이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양녕대군이 어째서 다시 썼단 말인가. 난리가 평정된 후 괴이한 광선으로 인하여 다시 찾아 걸었다고 하였으니, 정공(鄭公)은 또 어떻게 해서 그를 써서 걸었단 말인가. 하물며 정공은 세조 때 사람으로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비판(碑版)이나 종명(鐘銘)을 어명에 의해 많이 썼으니, 숭례문의 편액도 그의 글씨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자체(字體)를 보아도 바로 그의 서체(書體)임이 분명하다. 임진왜란 때에 왜노(倭奴)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 다시 찾아 걸게 됨으로써,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와전된 데다 괴이한 광선에 대한 설(說)까지 다시 부회(傅會)된 것이다.

이처럼 이규경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함께 이야기하면서, 숭례문의 편액을 정난종의 편액이라고 하고 있다. 그 또한 명필이니 일리는 있는 듯하다. 또한 이귤산(李橘山:이유원)은 임하필기(林下筆記)[각주:2]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숭례문은 공조 판서 유진동(柳辰仝)이 쓴 것이다. (중략) 연전에 남대문을 중수할 때 양녕대군의 사손(祀孫)인 이승보(李承輔) 대감이 윤성진(尹成鎭) 대감과 함께 문루(門樓)에 올라가서 판각의 개색한 것을 보았더니, 후판 대서(後板大書)는 공조 판서 유진동의 글씨였다 한다. 아마 이것은 옛날 화재가 난 뒤에 다시 쓴 것인가 싶다.

글을 더 할수록 여러가지 이야기만 늘어난다. 1935년에 문호암(文湖岩:문일평)은 그의 글에서 이 글씨가 서체연구로 유명한 추사의 견해를 따라 신장의 글씨라고 판정하였는데, 그러면서 유진동은 조선 중기의 인물이니 양녕대군의 필(筆)을 내렸다가 다시 유진동의 필을 걸었다는 것을 해명하여야 한다고 하였는데, 이미 이귤산이 화재론을 내었으니 이 사항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겠다.

이렇듯이 주로 네 견해가 주창되고 있는데, 아직 확실히 규명된 바는 없다. 고령 신씨 문중에서는 신장의 글씨라 하고, 중앙일보는 무턱대고 양녕의 글씨라 하는 바이니 이에 대하여 서체를 더욱 명확히 검증하여 누구의 글씨인지 감만 잡아야 할 것이다. 왜냐면 너무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연구에도 좋지 아니할 뿐더러, 상상력을 감소시키기 때문이다.

  1.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이 백과사전식으로 쓴 책으로, 조선과 중국 등의 여러 나라의 고금사물<FONT color=#8e8e8e>(古今事物)</FONT>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본문으로]
  2. 한말의 문신 귤산 이유원이 묶은 책으로, 조선의 여러가지 사항에 대하여 광범위하게 기록하고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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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삼십만방문문(賀參拾萬訪問文:삼십만 히트를 축하하는 글)


무릇 살피건대 셀 수 없는 사람들이 불로거(不路居:blog)를 열었으나, 개 중에 긴 시간을 이어온 사람은 많지 않았다. 또한 열었다 하더라도 독선적이거나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조롱을 얻은 사람이 적지 아니하였고, 그 마저도 받지 못한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예로부터 ‘가칠하다’는 말은 곧 수척(瘦瘠)하다는 말이었는데, 격한 형태인 ‘까칠하다’는 말이 곧 지금에 이르러서는 일이나 사람을 대할 때에 온화(穩和)하지 못하다는 말로 변하였다. 수척선생(瘦瘠先生:까칠맨을 이름)이 곧 이러한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그야말로 그러한 사람인가 무릇 살피니 정해(丁亥:2007) 4월 초4일(양력 5월 20일)에 3기를 면남방담(綿南方談:tistory)에서 시작하였던 것을 알았다. 선생이 수척함을 표하였으나, 이후에 사회에 그릇된 것을 보면 참지 못하고 글로써 강개(慷慨)하였고 바로 세우고자 하였으니 곧 그 수척함이 대중없는 수척함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번에 수척선생께서 3기 불로거의 30만 방문을 맞이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우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8개월 남짓한 시간동안 30만 방문을 맞이한 것은 선생의 뜻에 호응하는 사람이 많았고, 또한 그 이야기에 함께 소통하여 대화하고자 함이었으니 이러한 뜻이 마침 세상에 늘어나는 불로거의 기본 뜻과 어찌 다른 것이랴.

수척선생께서 이번에 그 기쁨을 다른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하니, 나도 졸필(拙筆)이나마 더하여 그 기쁨을 나누고자 한다. 내가 불로거를 연 것이 을유년(乙酉年:2005년)이었으나 횡설(橫說)하고 수설(竪說)하는 것이 지나쳐 다른 사람과 뜻을 교류치 못한 일이 많았다. 이에 수척선생의 일을 축하함과 함께 이를 반면(反面)하여 교사(敎師)로 삼아 나중을 기약할 지어다.


정해丁亥 납월臘月 천어天漁 근서謹書




이것은 이반토 참여용 떡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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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이 좀 넘는 시간동안 위키백과에서 편집 활동에 참여하다가 일전에 쓴 또는 번역한 글들을 모두 조망궁에 옮긴 일(여기서 일본 자료는 모두 일본물어로 이전하였다)이 있었다. 며칠 전에 다시 나는 위키백과에서의 진정한 탈퇴를 선언하였는데, 그간 생각한 사항을 정리하여 둔다.

ex(누지름)가 탈퇴의 변으로 밝힌 바와 같이 수 개월간의 편집 분쟁에서 위키백과에 대한 몰이해(이 부분이 나의 몰이해라고는 아직 생각치 않는다)에서 오는 온갖 궤변과 그 정보 제공자들의 어거지식 논리(특히 A모의 젓갈론과 J모의 국립론과 고등론)에 일일히 대응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달았고, 또한 위키백과에서만은 아니겠지만 이러한 자들과 이야기할 때에 한 잘못된 인식을 고치려면 같은 내용을 다른 식으로 몇 번씩이나 풀어서 이야기해 주어야 그 효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결국 효과를 보지못할 수도 있다)을 깨달았다.

위키백과는 백과사전이다. 그 존재의 목적성은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고, 또한 찾으려던 정보를 발견할 수 있는 접근성과 정보성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또한 위키백과의 가장 큰 특징인 다수의 편집은 잘못된 편집을 교정하고, 새로운 정보를 확충하는 효과를 주리라 믿었다. 영문판이나 일문판에서의 그 정보의 효과는 내가 보았지만(물론 영문판에서 오리엔탈리즘의 문제나 일문판에서의 시각 편향성에 대해 이야기 하는 일부 사용자가 있지만, 이 이야기는 효과가 아니라 후술하는 문제가 될 것이다),이 정보가 과연 그 가치성을 제대로 얻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측면에서 기술할 때 어떠한 부분이 씻겨버릴 수 있다거나 전문성을 띄지 못하는 경우에 잘못된 지식이 유입될 측면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다(여기서 A모의 젓갈론과 J모의 고등론이 문제가 된다). 특히 너무도 잘못된 소수설(이 소수설은 그냥 소수의 학자가 주장하는 소수의 학설이라는 뜻뿐만 아니라, 그 논리체계가 너무 빈약할 뿐더러 학자가 아닌 일반 아마추어나 비전문가가 잘못된 학설을 주장하는 것을 의미한다)의 경우에도 비전문가의 편집인 이상 그 잘못된 소수설을 일반적인 학설이나 이론과 동일시하여야 하는 문제를 노출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편집자가 극소한 한국어위키백과의 경우 과연 5만 항목의 돌파가 득(得)이 될 것인가, 아니면 다시 더욱 큰 실(失)로 반향(反響)하여 돌아올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여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별도의 블로그를 통해 내가 수집하고 기술한 정보에 대하여 공정성과 사실성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으며, 또한 이 정보에 대하여 내가 가진 책임 및 그에 수반하는 법적인 책임까지도 감수하면서 정보를 교정하기로 마음하였다. 그것은 1인의 이름으로 행하는 것이지만, 다른 편향된 시각을 배제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전에 내가 위키백과에 기술했던 여러 항목들에 비해 좀 더 충실하고, 또한 위키백과에서의 공정사용 논의에서 벗어나 좀 더 자유로운 정보공유성에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나싶다.

잡언이 길어지면 읽을 확률은 떨어진다는 사실은 이미 수 차례 인지하였지만, 아직도 습성을 버리지 못하여 쓸데없이 긴 글을 쓰게 되었다. 1200바이트 준수하라는 규칙에 너무도 어긋났던 지난 며칠간을 돌아보며 제언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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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란 무엇인가 - 10점
아미노 요시히코 지음, 박훈 옮김

전후(戰後) 역사학은 '일본'자체에 대해 진정한 역사적 시각을 전혀 지니지 못하고, 지극히 오랜 옛날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것처럼 '일본'이 존재했다는 식으로 막연하게 인식하는 데 머물렀다. 이 책은 일본 열도에서 수십만년 전부터 영위해온 인류사회의 역사 가운데 '일본국'의 위치를 설정하고, 약 1300년에 걸친 '일본국'의 역사를 철저하게 총괄하여 그 실체를 백일하에 드러내기 위한 작업의 일환이다. 패전 전의 '망령'들이 그 모습을 바꾸어 우리들 앞에 분명히 드러난 지금이야말로 그 총괄작업을 개시할 최적의 싯점이다.


위 박스에 들어있는 서평의 경우, 여러 사이트를 찾아 길이와 내용이 적절한 것을 찾는데, 대개 좋은 책의 경우 서평만으로 드러낼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은데 이 책이 바로 딱 그런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미노 요시히코(網野善彦)씨의 호칭을 뭣이라고 할까 마땅치 않으나, 생전에 카나가와 대학에서 교수를 지냈으므로 아미노 교수라고 약칭하도록 하자. 생전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된 2003년의 이듬해에 안타깝게도 향년 76세로 폐암으로 영면하였으므로 이미 고인이 된 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의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미노 교수의 학술적인 역사에 있어 말년에 나온 책이기에 그의 학술적 생애의 말미로, 일본인으로서 일본에 대한 역사적 시각으로 앞으로 펼쳐질 새로운 '일본론(日本論)'에 대한 시각을 제시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동북아 국가가 종전(終戰) 이후 새로운 아시아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는 데에도 충분히 생각할만한 화두를 떠올리게 했다는데 있다.

아미노 교수는 중세사학자로 분류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초기 연구에서 일본의 중세라고 할 수 있는 바쿠후[幕府] 시대의 여러가지 탐구가 드러나는데 비해 후기로 접어들수록 '일본론'이라는 주제와 열도(列島)의 역사에 대한 깊은 고민과 통찰이 드러나고 있기에 중세사학자가 아니라 한 일본인의 평처럼 '역사철학자'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는 분이다.

이 책의 옮긴이(박훈 옮김)의 말에서 지칭하는 '아미노 사관(史觀)'은  '국민국가론'ㅡ국가와 국민, 민족을 상대적으로 바라보는ㅡ의 성과를 흡수하면서도 우리가 익숙하게 접하는 '새로운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식의 국민사관론ㅡ이란 용어는 이 글에서만 통용하는 임시칭이다ㅡ이나 '요미우리-쮸우꼬오(讀賣-中公) 그룹'ㅡ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이들은 국민사관론과는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며 일본근대사에 대한 부정 일변도의 시각에 거부감을 보이며 '일본'에 대한 내용을 재구성하려는 집단이라고 한다ㅡ과 '진보사관'ㅡ의 경우는 맑스주의적 근대역사학ㅡ의 세 관점에 대해 모두 문제를 제기하는, 한국에서라면 '반골(反骨)'이라고 불릴지도 모르는 독특한 역사적 시각을 전개한다.

이 책은 '일본'이라는 관념에 대한 의문과 함께, '천황'이라는 명칭이나 '일본'이라는 명칭이 가지고 있는 특수성과 '민족성'이라고 부를만한 여러가지 상징들에 대해 비판을 제기한다. 그러면서도 또한 '일본'의 역사에서 드러나는 여러가지 특이한 점에 주목하면서, '일본'의 특징에 대해 꼼꼼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것은 한국에서 보기에도 상당히 정교하고 의미있는 기술(記述)임에 틀림없다.

또한 아미노 교수가 '일본인'으로서 '일본해(日本海)'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는 것도 우리는 고민해 보아야 할 문제일 것이다. 과연 '동해(東海)'나 '동한국해(東韓國海)'라는 명칭이 가지는 당위성이라거나, '청해(靑海/淸海)'라는 명칭에서 나타나는 부분이라거나.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한국과 일본간의 관계를 새로 구성해야 할 필요성이라는 점까지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또 덧붙이면 옮긴이인 박훈氏의 번역은 상당히 괜찮으면서도, 외래어 표기에서 한국어의 특유성을 잘 살린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외래어표기법'과는 맞지 않을지 몰라도,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외래어 표기법 개정'에 대한 논의를 생각하면, 상당히 합리적이고 편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 요시히코/요시히꼬)

그리고 이 책이 일반 독자의 시각을 고려해 쉬운 편이라고 해도, 여전히 일본사에 문외한인 한국사람들에게는 많이 어려울 것이므로, 일본사에 대한 짧은 개관 정도는 훑어본다거나 지도를 펼쳐놓는 것이 참으로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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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요금은 규격에 해당할 때에 5그람 이하는 220원, 5그람 초과 25그람 이하의 경우 250원, 25그람 초과 50그람 이하의 경우 270원을 징수한다. 본 글에서는 규격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봉투의 크기는 세로 9센티미터에서 13센티미터 이내에 들어야 하고, 5밀리미터 이하의 오차는 허용한다. 가로는 14센티미터에서 23.5센티미터 이내에 들어야 하며, 역시 오차 허용범위는 전과 같다. 두께는 최소 0.16밀리미터 이상이어야 하며, 최대 5밀리미터를 초과할 수 없다.

무게는 최소 3.27그람 이상이어야 하며, 최대 50그람을 초과할 수 없다. 50그람 초과시 규격외 우편물로 분류된다.

봉투는 평방미터당 70그람 이상의 무게를 가지고, 불투명도가 75퍼센트 이상인 종이로 70퍼센트 이상의 반사율을 가진 흰색 또는 밝은색의 봉투여야 한다. 따라서 근래에 애용되는 검은색 봉투 또는 빨간색 봉투는 규격이 아니다. 250원짜리 우표 붙이지 마라.

우편번호는 정확히 기재하고, 받는 사람의 우편번호는 상하좌우에 4밀리미터 이상의 여백을 두어야 한다. 특히 이름을 우편번호 우단에 기재하거나, 좌우에 "우" 이외에 어떠한 표식을 하면 규격이 아니다. 우표는 가로봉투의 우측 상단에 가로 4센티미터 세로 7.4센티미터 이내에 첩부하라.

봉투를 봉할 때에는 풀이나 접착제를 사용하여야 하며, 스테이플이나 핀, 금속재질 등을 이용하면 절대 안된다. 또한 표면 및 내용물은 편편하고 균일하여야 하며, 단추나 동전이나 도장 등을 삽입하지 말라. 또한 봉투에 발광물질이나 눌러새김, 돋을새김, 구멍뚫기는 금지된다. 특히 봉투에 다이모를 사용하면 규격이 아니다.

우편물은 우하단에 가로 14센티미터, 세로 1.7센티미터 여백을 두어야 기계처리가 가능하니 참조하라. 이상 박달을 위한 통상우편물 규격 사항 정리. 규격이 아닌 우편물에 250원짜리 우표를 사용치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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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천시天時와 지리地理가 갖추어졌으나, 인화人和가 갖추어지지 않아 실패한 사례는 고금古今에 셀 수 없이 많은 법이다. 무릇 기말고사期末考査를 맞이함에 있어서도 때가 갖추어지고, 환경이 갖추어지더라도 사람이 공부치 아니하면 양적(良積:좋은 성적)을 얻기는 어려운 법이다.

나 또한 인화 이외의 양 조건은 마땅히 구비하였으나, 그 인화를 다하지 못하였으므로 지금 이날에 이르러 이율곡(李栗谷:이이, 1536~1584) 선생의 『동호문답』東湖問答이나 읽는 처지가 되었다.

선생께서 해동(海東:조선)에 좋은 군주와 좋은 신하가 만나기 어려운 사정에 대하여 논하였으므로, 나 또한 선생께서 떠나신 뒤의 사정을 마땅히 상고詳考하고자 하노라. 무릇 아동방(我東方:조선)에 백성百姓이 주인이 되는 나라가 왔으니, 그 군주君主는 없을 것이나 군은 있다고 할 것이다. 민국(民國:대한민국)이 들어선지 여러 해가 지났으나 마땅히 도 펼치지 않으려는 자는 없었다. 허나 박통(朴統:박정희, 1917~1979)이 들어선 이래로 그 도를 세울 구상은 않고 양민(養民:백성을 먹여살리기만 하는 정치)하는 데에만 힘을 쏟았으니, 그야말로 자포자기自暴自棄하였다 할 것이다.

선생께서 이르시기를 “군주[人君]의 재능과 지혜가 출중하여 뛰어난 영재들을 잘 임용할 수 있으면 치세가 될 것이고, 비록 군주의 재능과 지혜가 모자란다 하더라도 현자를 임용할 수만 있으면 치세가 된다”고 하였으니,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의 치세가 이러하다. 또한 “군주가 〔재능과 지혜가 출중할지라도〕 자신의 총명만을 믿고 신하들을 불신한다면 난세가 되고, 군주가 〔재능과 지혜가 부족하여〕 간사한 자의 말만을 편중되게 믿어 〔자신의〕 귀와 눈을 가린다면 난세가 된다”고 하였으니 하걸(夏桀:하나라 걸왕)과 상주(商紂:은나라 주왕), 수의 양제煬帝와 당의 덕종德宗이 이러한 난세의 임금이라 할 것이다.

무릇 민국(民國:대한민국) 조정朝廷과 재야在野의 사정을 살핀다면 현군(賢君:어진 임금)이 등장할 것임은 무리라 할 것이므로 현신(賢臣:어진 신하)을 바라는 것이 옳겠으나, 양민養民에만 신경 쓰게 되어 한낱 숫자에만 집착하고 또한 나아갈 앞길을 보고자 하지 않을뿐더러 현신賢臣은 불구하고 양신(良臣:좋은 신하)조차 찾기 힘드니 슬픔에 절어 있을 수밖에 없도다.

시험試驗과 종교(終交:사귐이 끊어짐)를 비롯하여 공사公私가 다망多忙할뿐더러 애끊는 이 마음을 달랠 길이 없으므로, 하동관(河東館:조선 경도京都의 육탕肉湯 전문점)에 몸을 의탁코자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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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蜀漢) 소열제(昭烈帝:유비, 161~223)가 제갈무후(諸葛武侯:제갈량, 181~234)의 초려(草廬)를 재삼(再三) 찾아간 일이 있으니 이를 ‘초려삼고’(草廬三顧) 또는 ‘삼고(三顧)의 예’라고 하였다.
 

무후(武侯)가 후일에 「출사표」(出師表)에서 말하기를 “신이 비천한 신분임을 알면서도 싫어하지 않고 외람되게도 몸을 낮추어 제 초가집을 세 번씩이나 찾아 주어 당시의 상황을 물으셨습니다. 이 일로 저는 감격하여 선제께서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라고 하였으니 마땅히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비하는 무후일지라도 재삼(再三) 찾아갔다면 마땅히 응하는 것이 천하의 도리(道理)인 것이다.
 

내가 황재련(黃齋蓮)에게 상린추(相隣追:서로 이웃 추가)를 처음 신청한 것이 지난 갑자일(甲子日:11월 26일)이었다. 양(兩) 회를 부(否:거절)를 받고 나서 소열제(昭烈帝)의 마음으로 재삼(再三) 찾아간 것이 무진일(戊辰日:11월 30일)이니 또한 부(否)를 얻는다면 나흘에 걸친 삼고(三顧)가 모두 허망한 것이 되고 말것이다. 또한 그 불로거(不路居:블로그)에 지은 어궁(漁宮)이 부끄러운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제(帝)를 칭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고사할 지어다.
 

허나 옛 말에 운(云),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는다고 하였으니 이를 이른 말이리라. 상린추(相隣追)하여 상린관계(相隣關係)가 된다면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황재련은 내 말을 마땅히 명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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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애 양주동

무애 양주동

양주동(梁柱東, 1903년 3월 24일 ~ 1977년 2월 4일)은 한국의 국문학·영문학자이다. 호는 무애(无涯)로, 개성에서 태어났다.

개성에서 태어나 장연에서 자랐다. 중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다. 1923년에 동인지 《금성》(金星)으로 등장하여, 1930년에는 시집 《조선의 맥박》을 펴내기도 했다. 1919년에 염상섭과 함께 발간한 《문예공론》의 평론은 이른바 절충론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후에 향가 해독에 몰입하면서, 고 시가 해석에 힘을 쏟았다. 특히 1942년에는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향가 25수 전편에 대한 해독집인 《조선고가연구》(朝鮮古歌硏究)를 펴냈다. 이어 1947년에는 1939년부터 1940년까지 동아일보에 연재한 원고를 보완하여 《여요전주》(麗謠箋注)를 펴냈다.

1947년에 동국대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1954년부터는 대한민국 학술원 종신회원이 되었다.

  • 1950년 2월에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하였다.
  • 1950년 12월에 국가보안법 제정에 따라 북조선 부역자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가 구성되자, 부역행위에 대해 자수한 바 있다[각주:1]. 보도연맹에 가입된 것[각주:2]은 이 즈음으로 보인다.
  • 양주동은 1950년대 이후 자신을 가리켜 ‘국보 1호’라고 칭하고 다녔으며, 이와 관련된 다양한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 10살 연하였던 탄허에게 오대산에서 1주일간 장자 강의를 들은 뒤에는, 탄허에게 오체투지로 절을 했다고 한다. 이후 양주동은 탄허를 가리켜 “장자가 다시 돌아와 제 책을 설해도 오대산 탄허를 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 바 있다.[각주:3]
  • 양주동은 자신의 글 ‘연북록’(硏北錄)에서 “어려서부터 평소의 야망은 오로지 ‘불후(不朽)의 문장’에 있었으매, 시인 비평가 사상인(思想人)이 될지언정 ‘학자’가 되리란 생각은 별로 없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각주:4]
  • 양주동은 자신의 글 ‘한자 문제’에서 “아닌게아니라, 내 글에는 한자어가 많고 벽자(僻字)조차 수두룩함이 사실이다. 어려서 한학 공부를 했기 때문에 일상 용어에 한자어를 남보다 더 많이 쓰는 버릇이 있으니, 문장이 또 그럴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각주:5]
  • 양주동은 3인칭 대명사로 남자는 ‘그놈’ 여자는 ‘그년’이라 쓰자고 제안한 일이 있다고 한다.[각주:6]
  1. 부역행위 자수자 증가, 서울신문, 1950년 12월 11일자. [본문으로]
  2. <A class="external text" title=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23310 href="http://www.dailyseop.com/section/article_view.aspx?at_id=23310" target=_blank rel=nofollow>법에도 없는 학살지령 - 무법천지의 친일파 세상은 이랬다</A>, 한상범, 데일리서프라이즈, 2005년 5월 24일. [본문으로]
  3. <A class="external text" title=http://www.hani.co.kr/arti/happyvil/happyvil_news04/38305.html href="http://www.hani.co.kr/arti/happyvil/happyvil_news04/38305.html" target=_blank rel=nofollow>오대산 탄허선사</A>, 조연현, 한겨레, 2005년 5월 31일. [본문으로]
  4. <A class="external text" title=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9/h2006091919301685150.htm href="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0609/h2006091919301685150.htm" target=_blank rel=nofollow>말들의 풍경 &lt;29&gt; 戱文의 우아함</A>, 고종석, 한국일보, 2006년 9월 19일. [본문으로]
  5. 고종석, 위의 자료. [본문으로]
  6. <A class="external text" title=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amp;office_id=089&amp;article_id=0000083860&amp;section_id=102&amp;menu_id=102 href="http://news.naver.com/news/read.php?mode=LSD&amp;office_id=089&amp;article_id=0000083860&amp;section_id=102&amp;menu_id=102" target=_blank rel=nofollow>우리말과 2인칭 호칭</A>, 신기영, 대전일보, 2006년 10월 11일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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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천어 트랙백 0 : 댓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