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만에 글을 쓴다. 기왕 글을 쓰는 김에, 발문을 겸하여 쓰는 이유를 잠시간 술하고자 한다. 서울 이야기는 내가 오래전부터 구상하던 이야기인데, 그간 사정이 되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아는 이들에게 서울 이야기를 잠간잠간 해주다보면 물론 내가 기억에 의지하는 것이라 다소간 과장도 있었을 것이고, 또한 지금에 생각하기에는 믿기 힘든 이야기도 있을 것이라 믿지 못하는 이도 있었다. 이번에 기회를 삼아 약간의 이야기를 써두고, 또한 그 근거를 몇 붙여두면 또한 나쁜 이야기는 없는지라 심심풀이로 읽을만한 것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아니하므로 그러한 사정에 따라 서울이야기를 써두도록 결심하였다.

 서울이야기라 함은 시중에 떠도는 학술서와 같이, 바덴바덴에서 쎄울 꼬레아할 시절에 도대체 서울이 무슨 뜻이냐 이런 것을 적으려 함은 아니다. 그러한 것은 재미도 없을 뿐더러, 시중에 있는 학술서적이나 서울시에서 내는 책들에 상세히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야기를 적는 것인가. 무릇 생각건대 서울이라 하는 거대 도시가 시작된 것은 가히 일정(日政)때의 게이조(京城:이른바 경성)부터이다. 그 이전에도 무론 한성부라는 도시(?)가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 시절의 한성부라는 것이 도성을 휘감은 성벽 안쪽과 바깥의 일부를 더한, 지금보다 아주 적은 규모였으니 지금의 서울을 살피는 데에는 불요하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당연히 사상이나 문화적인 측면에 있어서의 서울을 생각할 필요도 있겠으나, 내가 술하려는 이야기는 그러한 것이 아니라고 할 것이다. 여하간 구한말엽에 부제(府制)라는 것이 시행되었던 시절에는 연천에 포천까지 한성부라고 부르기도 하였던 시절도 있었다.

 여담이 길었으나 하여간, 내가 그래도 서울에서 잠시간 살고 있으니 이만큼 콘텐츠가 풍부한 도시가 아직 조선에서 찾기가 힘들다. 토박이에 증언까지 시에서 나서 다 모우고 있으니, 무궁무진한 콘텐츠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보고 있으면 여하간 서울은 재미있는 도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해방 이전부터 지금까지 서울을 보아오면서(뻥), 이러한 이야기를 남기지 않으면 이제는 쓸 이야기도 없고 하여 어거지로라도 쓰는 것은 아니지만, 같이 재미지게 읽으면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발단이다.

 앞에서 한성부가 어떻니 하였는데, 그럼 서울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무론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울특별시 범위 내이다. 그런데 이것이 모호한 것이, 이를테면 경성부 이후에 서울에 포함된 지역이 적지 않다. 또한 지방사람들은 이를테면 시흥(서울 시흥이 아니라 지금의 시흥시)이나 과천이나 매한가지로 서울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혹자는 수원까지 서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이것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할 수 없다. 서울에는 서울특별시말고도 '수도'(首都)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수도의 생활권 또는 교통권 등등등, 이른바 수도권도 서울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 항변이긴 한데... 어거지라고 생각해도 별 수 없다.

 그래도 심리적인 범위에서 경기북부, 즉 서울특별시 이북으로는 대체로 일산을 제하고는 서울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이 관습인듯 하고, 이남으로는 수원까지가 마지노선이되 여주 등은 약간의 검토가 필요하다는 것이 학계의 통설인듯 하다(뻥). 이 범위에서 가장 중요한 요인이 이른바 '신도시'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동네들인데, 서울 밖에서 서울 안으로 출근하는 새로운 형태가 만들어지면서 이 범위를 서울이라고 부른다고 하여도 문제가 있을까. (신도시 이야기는 나중에 별론하기로 한다.)

 여하간 이러한 서울의 범위가 만들어진 것은 갓 50여년 전후에 있었던 격변들의 산물이다. 일정때에는 성저십리 대부분이 떨어져나갔다가, 나중에 다시금 아현동, 신촌, 영등포, 노량진, 안암동 등을 시작으로 동작동, 흑석동, 신당동, 왕십리, 이문동, 합정동 등등등이 다시 경성으로 편입되었다. 호구가 늘었으니 학교도 늘고, 면적도 넓어지는 것이 도시의 도리일지라. 30만이던 인구가 100만에 육박하게 되었고, 서울은 끊임없이 팽창해갔다.

  그 시절을 보면 제대 예과와 고공(京城高等工業學校)·의전(京城醫學專門學校)이 동숭동 일대에 있었고, 법전(京城法學專門學校)이 청량리에, 고상(京城高等商業學校)이 종암동에 있었다. 해방 이후까지만 하여도 노면전차가 많이 다녔으니, 각각 그 일대의 중심이었다. 제대 예과가 있던 청량리에 전차가 다녔고, 멀리는 한강진까지도 다니며 해방 이후에도 서울의 교통을 책임지고 있었다.

 1960년대에 들어 노면전차와 경성궤도가 모두 중지되었는데, 그간 인구는 다섯배에 달하는 오백만까지 늘어났고, 지금의 잠실이나 강남, 강서구 일대가 서울에 편입된 것도 이 때였다. 무시무시하게 팽창하는 서울에서 역시 시달리는 것은 역시 사람들이라, 버스를 비롯한 자동차를 긁어모아도 천여대에 불과했고(지금은 버스만 만여대에 육박한다.) 그야말로 지옥같은 교통난을 겪어야 했다. 전차대신에 들여온다던 고무궤도의 트램은 어느새 지하철 계획으로 모습을 바꾸어 기약없이 흘러갔으니, 전차 운행 중지와 지하철 1호선 운행까지의 5년 이상의 간격동안 그야말로 서울에서의 출근길은 지옥길이었다. 시에서는 교통 제한도 걸어보고, 출근시간도 바꿔보고, 증차도 해보고 했지만 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서울에 새로 편입된 개화동 일대는 버스도 아예 없어 난리, 버스는 다니지만 포장되지 않은 화곡동이나 답십리 일대는 촌길 걷는다며 난리, 잠원동 일대는 비만 오면 배를 타고 나올 수가 없어 난리(당시까지는 제3한강교가 없었다.)였다.

 건설의 시대가 개막하고, 서울에 지하철이 놓이고, 나루터가 사라지며 아파트가 들어섰다. 와우아파트는 무너졌지만, 영동에는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강북에는 온갖 규제와 함께 유흥업소건 무엇이건 전부 비약한 강남으로 쓸려갔으며, 그와 함께 2호선 지하철 개통이라는 호재는 강남을 불패로 만들어 놓았다. 그 사이에 광주 대단지 사건도 있었지만,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울이 완성되었다.

 이어 올림픽을 앞두고 과천을 시발로 하는 신도시가 서울을 중심으로 곳곳에 지어지고, 지하철 건설과 전철의 연장은 서울의 범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새로지은 신도시들이 서울에 종속되면서 생활권·출근권에 편입되었고, 결국 이건 서울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서울이 아니라고 딱 잡아 말하기에도 모호한..... 뭐, 그런 것?

 이제는 서울과 서울 근교가 모두 전철과 버스로 연결되고, 이제는 국철 1호선이 충청도까지 내려가고, 경춘선은 전철이 되어 강원도까지 다니고 있으니 전차 시대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라고 할 것이다. 천안도 수도권 시대, 춘천도 수도권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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