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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나긴 로작이 드디어 대단원을 맞게 되었다. 마지막을 동서울 터미널로 마무리하는 것은 내가 절대 쓰다가 동서울 터미널의 존재를 잊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여하간 서울의 역사의 절반은 매립의 역사歷史요, 한강 개발의 역사役事이니 그 강변에 위치한 동서울 터미널을 마지막의 모습으로 살피어 본다, 뭐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겠습니다. 여하간 앞서 동마장 터미널에서 구구절절 살펴본 바와 같이 서울의 도시 발달 속에서 터미널이란 것은 도심으로부터 축출해야 하는 민폐시설이었고, 다른 터미널이 모두 외곽으로 쫓겨난 데에 비하여 동마장 터미널은 1990년 전후까지 이전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에 이르러 결국 터미널이 구의동으로 이전하였으나, 이미 구의동은 매립지는 커녕 잠실이 부도심으로 발달하기에 이르렀으..
불측의 사고로 차를 다시 저 세상으로 보내고, 새 차를 다시 모셔오게 되었다.물론 만나서 차량등록사업소에 가서 이전하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시간이 허락치 아니하여 인터넷으로 이전을 하게 되었으니 그 과정을 적어둔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계약서를 깨끗하고, 가장 최신 버전의 것으로 구해 작성해야 하는 것이다. 이전 양식을 쓰거나, 잘못 썼다거나 하면 반려되니 반드시 명심하자. 우선은 차를 파는 사람(이하 양도인 또는 매도인)이 자동차양도증명을 등록해야 한다. 자동차민원 대국민포털(http://www.ecar.go.kr)에서 등록하면 되고, 양도인은 그냥 정보만 입력하면 된다. 계약서 이런 것 업로드하지 않아도 되지만, 계약서에 기재한 사항(차종, 주행거리 등)은 일치하게 써야 이전이 된다. 양도인이 양도증..
번지라고 하는 것은 땅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누어서 매겨 놓은 번호나 그 땅을 말한다고 한다. 법적으로는 지번이다. 지번이란 측량·수로조사 및 지적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필지에 부여하는 지적공부에 등록한 번호를 말한다. 그 시행령에는 이 지번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하되, 임야대장 및 임야도에 등록하는 토지의 지번은 숫자 앞에 “산”자를 붙인다거나 지번은 본번(本番)과 부번(副番)으로 구성하되, 본번과 부번 사이에 “-” 표시로 연결하며, 이 경우 “-” 표시는 “의”라고 읽는다는 등의 내용이다. 도로명 주소론자(?)에 따르면 그야말로 비합리와 혼란의 점철이겠으나, 이제는 도로명 주소가 시행됨에 따라 지번은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던 것이다. [1번지 이야기에서 발췌] 일전에도..
이 기나긴 로작도 이제 대망의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앞서 보았던 터미널과 달리 내리막길로 함께 내려간 터미널이 있으니 바로 서부시외버스터미널, 이른바 불광동 터미널과 상봉동에 있는 상봉터미널이다. 우선 서부터미널은 문산-서울을 잇는 중요 거점으로 그 연원은 홍은동 터미널이다. 홍은동 터미널은 역시 문산과 파주로 연결되는 시외버스가 다니던 곳이었는데, 1969년에 도심지에서 홍은동으로 쫓겨나게 된 것이었다. 바로 지금의 홍은사거리 백련빌딩 자리이다. 그것도 잠시, 또 도심 확장에 따라 홍은동 터미널은 불광동으로 쫓겨나게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불광역이 불광동과 대조동에 걸쳐있는 것과 같이 서부터미널 또한 불광동과 대조동에 걸쳐있었으므로 그냥 불광동터미널 내지는 불광터미널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서..
앞전에 이야기한 산개한 시리즈에서 동마장도 떠났고, 서울역도 떠났고, 시내와 동대문도 떠났으니 남은 것은 용산시외터미널이었다. 그런데 이 용산이라는 땅 자체가 나쁘지 않기도 하였거니와 앞서 본 반포동 터미널의 우여곡절 끝에 시외터미널 부지가 없어 갈 곳을 잃은 용산이 되어버린 처지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땅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서초동 트럭터미널 부지였다. 서초동 트럭터미널은 1972년도에 화물트럭터미널로 계획되어 1975년에 개업하였던 것이다. 물론 버스와 마찬가지로 화물트럭의 도심진입을 제한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다. 그런데 알다시피 당시에 성동구 서초동이던 이 지역은 남서울개발과 더불어 영동과 쌍벽을 이루는 도심으로 거듭나게 되었으니 트럭터미널은 명색이 살지 않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 용산터미널을..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반포동에는 서울고속버스터미날도 있었고 지금의 호남선 터미널인 센트럴시티가 있다. 앞서 보았던 항공사진을 다시 한 번 복습해보면, 1978년과 1979년을 사이로 센트럴시티 부지에는 버스는 꼬물꼬물 들어왔지만 지금의 건물은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2010년쯤이 되어서야 드디어 건물같은 것이 급속히 올라갔으니 바로 지금의 센트럴시티이다. 본디 이 자리는 뭇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당시 성동구 반포동 영동제1지구 체비지 5만평에는 고속버스 터미날 3만 평, 시외버스 터미날 1만평, 그 외 시내버스 주차장 등 1만평을 계획하고 확보된 것이었다. 당시 도심지내 7개 터미널 면적은 도합 7천 평 내외였고, 시외버스 터미널 3개소는 도합 2천 평이었으니..
앞서 누누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도심에 산개한 터미널은 편리성과 함께 일각에서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무론 도심에 터미널이 있으면은 버스를 손쉽게 탈 수 있고, 그렇겠으나 이 뻐스가 도심에 자꾸 들어온다는 것은 그만큼 길이 막힌다는 말이고 또 소요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당시의 도심 고속버스 터미널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 회사의 별로 세워져 있던 것이라 무슨 가건물을 불법으로 증축하는 식으로 운영하는 회사도 있었고, 또 지금의 동대구 고속버스터미널과 같이 행선별로 또 터미널을 찾아서 다닌다는 것이 편리한 일은 아니었다. 1975년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지금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가 교통부 용역자료로 제출한 바에 따르면 시내에 7개의 터미널이 대부분 시설이 부족하나..
앞서서 누누이 이야기하였던 바처럼 1기 터미널 현황의 요지는 터미널이 산개하였다는 것이고, 당국의 정책은 터미널 통합과 외곽지 이전이었다. 특히 1기 터미널 정책의 핵심이 될 뻔한 것이 앞서 보았던 서울역 앞 터미널이었고, 실제로 반쯤 핵심이 된 것은 동대문 터미널이었다. 동대문에 터미널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인구에 회자되어 있고, 그 당시의 모습 또한 사진으로 많이 남아있다. 이 동대문 터미널이라는 것은 당시에 신설동에 빌딩을 지었다가 로타리가 생기는 바람에 금싸라기가 되었고, 그 바탕으로 동대문종합시장을 세운 정시봉의 작품이다. 정시봉은 현재도 동대문종합시장을 운영하고 있는 동승그룹의 창업주다. 당시에 전차 차고지였던 해당 부지를 당국으로부터 불하받은 정시봉은 종합상가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시장 현대..
지난 시간까지 서울역앞 봉래동 일대로 모이게 된 고속버스 회사들의 터미널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그 이외의 지역에 있던 터미널의 궤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서서 지적한 것처럼 각 터미널의 개략적인 위치는 신문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뻐스와 더불어 (4) 산개한 터미널의 궤적을 찾아 - 서울역앞 터미널(한진/동양/코리아그레이하운드) 참조) 종로2가에는 삼화고속 터미널이 있었는데, 그 위치는 지금 지오다노 매장이 위치한 종로빌딩 자리이다. 삼화고속은 지금에도 그러하듯 당시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자 한진과 함께 경인 구간의 고속버스를 운행하였는데, 알다시피 삼화고속은 광주고속의 계열사이다. 이전에도 경인간 버스를 운행하였는데, 당시 광고(아래)를 보면 삼양타이어와 함께 삼화교통의 위치를 짐작할 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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