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뻐쓰와 더불어

(6) 동대문 터미널

고영아범 2017. 10. 31. 14:36


 앞서서 누누이 이야기하였던 바처럼 1기 터미널 현황의 요지는 터미널이 산개하였다는 것이고, 당국의 정책은 터미널 통합과 외곽지 이전이었다. 특히 1기 터미널 정책의 핵심이 될 뻔한 것이 앞서 보았던 서울역 앞 터미널이었고, 실제로 반쯤 핵심이 된 것은 동대문 터미널이었다.


 동대문에 터미널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인구에 회자되어 있고, 그 당시의 모습 또한 사진으로 많이 남아있다. 이 동대문 터미널이라는 것은 당시에 신설동에 빌딩을 지었다가 로타리가 생기는 바람에 금싸라기가 되었고, 그 바탕으로 동대문종합시장을 세운 정시봉의 작품이다. 정시봉은 현재도 동대문종합시장을 운영하고 있는 동승그룹의 창업주다. 당시에 전차 차고지였던 해당 부지를 당국으로부터 불하받은 정시봉은 종합상가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시장 현대화를 역점에 둔 당국의 의도와 일치하면서 지금의 동대문종합시장과 함께 터미널을 건립한 것이다. 이 터미널이 지금의 JW 메리어트 호텔 자리이다. 하여간 이 자리에 종합시장이 들어서고, 곧 이어 터미널이 개업하면서 한일, 한남, 광주, 천일 4개사와 나중에 동부고속, 그리고 얼마 지나지않아 생기는 중앙고속이 들어오게 되었다.


1970년 4월 27일 경향신문 기사1972년 9월 7일자 동아일보 기사1973년 6월 11일자 경향신문 기사


 그럼 그 전에 한일-한남-광주-천일 4개사는 어디에 있었는가. 광주와 한일은 앞서 본 유신고속 터미널을 같이 사용했었다고 칠 수도 있으나, 사실은 한일-한남-광주-천일 4개사가 연휴連携되어 있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 이유는 바로 벤즈 고속 또는 벤스 고속이었기 때문이다. 벤즈 또는 벤스는 바로 지금 우리가 익히 아는 벤츠 社이다. 당시 고속도로가 완공이 되었고, 이제 버스는 고속으로 달릴 줄을 알어야 하는데 이것이 되려면은 좋은 기술이 필요하고, 그래서 개그린그레이하운드 버스가 들어온 것처럼 벤스에서 버스를 차관으로 들여온 것이다. 1968년 8월, 광주여객과 한남관광, 그리고 한일여객의 3개사는 서독의 다임러 벤츠社(당시 기사에서는 다이므라벤스)에서 3년반 상환의 조건으로 48인승 버스 각 40대씩을 들여오기로 하였고(당시 벤츠에서 화물차를 들여온 회사는 양양운수와 유신상운이었다), 1달 뒤에는 천일여객이 40대를 또 차관으로 들여오게 되었으니 바로 벤츠 고속 4개사인 것이다.


1970년 4월 24일 매일경제신문 기사




 달리는 궁전 벤즈고속버스를 도입한 한남과 천일, 한일은 1970년 5월 23일부터 서울운동장(동대문 운동장, 지금의 동대문역사문화공원-DDP) 앞의 터미널을 운영하기 시작했으나 한일은 다시 광주고속과 함께 유신고속 터미널을 함께 이용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1월에 이르러 한일고속과 광주고속은 동대문 옆에 터미널을 마련하게 되는데, 그 위치가 우리가 아까 살펴본 동대문 종합터미널 자리가 아니라 바로 맞은 편이었던 것이었다. 지금의 4호선 동대문역 7번 출구 일대이다.



 이 벤즈고속 4개사는 벤즈라는 이름을 걸고서는 공동 마케팅(?)을 펼쳤으니 묘할 따름이다. 4개사는 그 다음해인 1971년에도 벤즈 고속이라는 이름으로 영업을 하였는데 아마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모르겠지만 뻐스와 더불어 (4)에서 찾아보았던 기사에 나오는 벤츠고속터미널이 바로 이 벤즈고속 4개사의 두 터미널이다.



▲벤츠고속제1터미널(중구 을지로6가 18의21) ▲벤츠고속제2터미널(동대문구 창신동 440) (1972년 2월 29일자 경향신문 기사 "9개 고속버스 터미날 이전에 문제점")


 기사에서 바로 을지로6가의 벤츠고속제1터미널이 위 서울운동장앞 터미널, 즉 천일-한남 터미널을 말하고 제2터미널이 동대문터미널, 즉 광주-한일 터미널이다. 그리고 동대문종합터미널이 완공되고 난 뒤에도 유지되다가, 1971년 8월 중앙고속이 개업하여 종합터미널로 들어가고, 1972년 5월이 이르러서는 벤즈고속이 종합터미널로 들어가게 되면서 동대문종합터미널 시대가 개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벤즈고속이 종합터미널로 이전한 뒤에 을지로터미널(서울운동장 앞)은 동부고속이 사용하게 되면서 도심의 터미널이 줄지는 않는 꼴이 되긴 하였다.




 위 항공사진은 1972년의 것이다. 당시 이화사거리 방향 도로가 개통되지 않은 것이 눈에 띈다.


 위 항공사진은 1974년도의 사진이다. 그리고 우측 사진은 1970년대 초반이라고 하는데, 맞은편 종합터미널이 준공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1970~1971년의 모습으로 추측된다.


 위의 사진은 모두 1975년쯤의 사진이다. 이화대학병원 좌측으로 이화동-동대문간 도로가 이어지지 않은 것을 보아 1975년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의 두 사진은 창신동 터미널측에서 촬영한 것이고, 마지막 사진은 동대문종합터미널 쪽에서 촬영한 것이다.


 이것으로 1기 터미널 시대의 이야기는 모두 끝이 났다. 다음에는 2기 터미널 시대, 즉 남서울 영동이 개발되는 그 시대를 찾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