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야기/뻐쓰와 더불어

(8) 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날/센트럴시티 下

고영아범 2017. 10. 31. 15:08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반포동에는 서울고속버스터미날도 있었고 지금의 호남선 터미널인 센트럴시티가 있다. 앞서 보았던 항공사진을 다시 한 번 복습해보면, 1978년과 1979년을 사이로 센트럴시티 부지에는 버스는 꼬물꼬물 들어왔지만 지금의 건물은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2010년쯤이 되어서야 드디어 건물같은 것이 급속히 올라갔으니 바로 지금의 센트럴시티이다.


 본디 이 자리는 뭇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당시 성동구 반포동 영동제1지구 체비지 5만평에는 고속버스 터미날 3만 평, 시외버스 터미날 1만평, 그 외 시내버스 주차장 등 1만평을 계획하고 확보된 것이었다. 당시 도심지내 7개 터미널 면적은 도합 7천 평 내외였고, 시외버스 터미널 3개소는 도합 2천 평이었으니 단순 계산만으로도 4~5배에 달하는 면적이었다. 당시 조감도에서는 강남버스종합터어미널이라는 이름으로 12층의 건물 2개 동을 가운데에 두고, 좌측과 우측으로 각각 시외버스와 고속버스 정류소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이 시외버스 터미널 건립으로 아주 전에 보았던 용두동 동마장, 용산, 동자동의 터미널은 이곳으로 집결할 계획이었다.


1975년 10월 29일자 동아일보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속버스 터미널은 어쨌든 올라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나머지 시외버스 터미널 부지는 2만 평으로 확장되어 1977년에 문제의 율산실업이 낙찰받게 된다. 당시 율산은 터미널 부지 매각 조건으로 종합교통센터를 건립할 것을 내걸었고, 율산은 무려 18층의 교통센터를 짓겠다고 계획한다. 그리고 공사를 시작할까 했더니 이게 웬 일, 4배로 늘어난 강남 고속터미널(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날)이 고속버스를 수용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 시외버스 터미널 이전 계획은 무산되고 용두동 동마장 터미널은 천호동으로, 용산과 동자동 터미널은 강남역 인근으로 옮기기로 계획을 수정한 뒤 시외터미널 부지는 호남선과 영동선 터미널로 사용되게 되었다. 이른바 서울종합터미날이다.


1977년 4월 29일자 매일경제신문1977년 7월 25일자 경향신문



 그러나 단 꿈도 정말 진짜로 잠시였다. 당시 율산은 벽두부터 당시 신선호 사장이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지더니, 수출실적이 저조해 종합상사의 지위를 유지하느냐 마느냐가 문제가 되었다가 2월에 바로 금융단의 공동감리를 맞게 된 것이다. 이른바 율산 쇼크였다. 이어 율산은 종합상사 지정에서 탈락했고, 감원과 계열사 정리, 경영진 교체에도 불구하고 그해 4월 4일, 횡령과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신선호 대표가 구속된다. 당시 32세였다. (훗날 1심에서 징역 7년, 2심에서 징역 5년, 1983년 대법원에서 징역 5년에 집행유예 4년 선고)


1979년 8월 21일자 동아일보


 율산이 무너지자 당연히 서측 터미널(센트럴시티)은 땅만 파고 빈 터가 되었다. 잡초가 무성한 그 땅은 결국 동측 터미널(강남고속터미널)과 합쳐 그냥 일원화를 하는 것이 낫지 않느냐, 그러자 하는 계획이 무성했었다. 그런데 이 때에 알려진 바와 같이 이 땅이 아까 보았듯이 서울시가 종합교통센터 건립을 조건으로 매각한 것인데, 매각 당시에는 아직 환지확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소유권이 서울시에 있었고, 매각 이후에는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서울시가 터미널을 지어야 소유권 이전을 하겠다고 조건을 다시 제시한 것이다. 율산의 채권단으로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이 서울시가 가운데 끼어 돌려막기를 하고 있다가, 신선호 대표가 집유 선고 이후 다시 이곳저곳 기웃기웃하며 재기를 노렸고, 그 과정에서 호남선 터미널은 가건물로 20년을 버티게 된 것이다.


1989년 11월 20일자 동아일보


 율산 부도 이후 이 땅은 앞서 본 율산의 계열사인 서울종합터미널이 운영하는 터미널이 되었는데, 이를 통해 율산은 지속적으로 재기를 모색했다. 그 과정에서 1980년대 중반에 광주고속(현 금호고속)이 터미널을 짓겠다고 나서기도 하였다가 무산되었다. 이후 율산은 돈을 찾아 헤메었고,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상대는 삼성이었다. 당시 삼성 계열사였던 신세계는 롯데를 견제하기 위해 터미널 부지를 찾아보던 중에 율산이 가지고 있던 금싸라기 땅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이 계획에 호텔신라와 삼성건설도 가세했다. 백화점과 호텔은 신세계와 호텔신라가, 터미널은 율산이 경영한다는 계획이었다.


1990년 1월 1일자 한겨레신문


 그러나 이 계획도 곧 무산된다. 호텔신라가 먼저 빠져나갔다. 보증금을 먼저 내기로 한 호텔신라가 빠지면서 사업이 난관에 봉착했다. 이후 삼성건설도 빠져나갔다. 율산은 현대건설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15억을 들여서 지하수 수맥을 못찾았는데, 상도동 성당에 있던 모 신부님이 추 하나로 수맥을 찾아주는 바람에 수맥 하나와 온천을 얻게 되었다.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이후 비용 절감을 위해 현대건설 대신 센트럴건설을 설립했고, 메리어트 합작 투자, 온갖 융자란 융자는 다 끌어다가 드디어 20년만에 센트럴 시티를 완공한다. 여기서 또 단꿈도 잠시, 이후 바로 경영난에 시달리다 신선호 회장이 가지고 있던 99.7%의 지분 가운데 51%를 애경 계열의 아이앤알코리아로 매각했고, 이후 여러 주인을 거쳐 신세계가 60%의 지분을 확보하며 다시금 주인으로 들어서게 된다.


 이후의 모습은 뭐 지금의 센트럴시티이다. 다음에는 영동지구에 들어선 또 다른 터미널인 남부터미널(서초터미널)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