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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날/센트럴시티 下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반포동에는 서울고속버스터미날도 있었고 지금의 호남선 터미널인 센트럴시티가 있다. 앞서 보았던 항공사진을 다시 한 번 복습해보면, 1978년과 1979년을 사이로 센트럴시티 부지에는 버스는 꼬물꼬물 들어왔지만 지금의 건물은 없는 상태였다. 그리고 2010년쯤이 되어서야 드디어 건물같은 것이 급속히 올라갔으니 바로 지금의 센트럴시티이다. 본디 이 자리는 뭇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듯이 시외버스 정류장으로 계획된 것이었다. 당시 성동구 반포동 영동제1지구 체비지 5만평에는 고속버스 터미날 3만 평, 시외버스 터미날 1만평, 그 외 시내버스 주차장 등 1만평을 계획하고 확보된 것이었다. 당시 도심지내 7개 터미널 면적은 도합 7천 평 내외였고, 시외버스 터미널 3개소는 도합 2천 평이었으니..

(7) 반포동 서울고속버스터미날/센트럴시티 上

앞서 누누이 이야기했던 것처럼 도심에 산개한 터미널은 편리성과 함께 일각에서는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무론 도심에 터미널이 있으면은 버스를 손쉽게 탈 수 있고, 그렇겠으나 이 뻐스가 도심에 자꾸 들어온다는 것은 그만큼 길이 막힌다는 말이고 또 소요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게다가 당시의 도심 고속버스 터미널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 회사의 별로 세워져 있던 것이라 무슨 가건물을 불법으로 증축하는 식으로 운영하는 회사도 있었고, 또 지금의 동대구 고속버스터미널과 같이 행선별로 또 터미널을 찾아서 다닌다는 것이 편리한 일은 아니었다. 1975년 당시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지금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가 교통부 용역자료로 제출한 바에 따르면 시내에 7개의 터미널이 대부분 시설이 부족하나..

(6) 동대문 터미널

앞서서 누누이 이야기하였던 바처럼 1기 터미널 현황의 요지는 터미널이 산개하였다는 것이고, 당국의 정책은 터미널 통합과 외곽지 이전이었다. 특히 1기 터미널 정책의 핵심이 될 뻔한 것이 앞서 보았던 서울역 앞 터미널이었고, 실제로 반쯤 핵심이 된 것은 동대문 터미널이었다. 동대문에 터미널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인구에 회자되어 있고, 그 당시의 모습 또한 사진으로 많이 남아있다. 이 동대문 터미널이라는 것은 당시에 신설동에 빌딩을 지었다가 로타리가 생기는 바람에 금싸라기가 되었고, 그 바탕으로 동대문종합시장을 세운 정시봉의 작품이다. 정시봉은 현재도 동대문종합시장을 운영하고 있는 동승그룹의 창업주다. 당시에 전차 차고지였던 해당 부지를 당국으로부터 불하받은 정시봉은 종합상가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시장 현대..

(5) 시내 터미널(삼화·유신·속리산)

지난 시간까지 서울역앞 봉래동 일대로 모이게 된 고속버스 회사들의 터미널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그 이외의 지역에 있던 터미널의 궤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앞서서 지적한 것처럼 각 터미널의 개략적인 위치는 신문 기사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뻐스와 더불어 (4) 산개한 터미널의 궤적을 찾아 - 서울역앞 터미널(한진/동양/코리아그레이하운드) 참조) 종로2가에는 삼화고속 터미널이 있었는데, 그 위치는 지금 지오다노 매장이 위치한 종로빌딩 자리이다. 삼화고속은 지금에도 그러하듯 당시 경인고속도로가 개통되자 한진과 함께 경인 구간의 고속버스를 운행하였는데, 알다시피 삼화고속은 광주고속의 계열사이다. 이전에도 경인간 버스를 운행하였는데, 당시 광고(아래)를 보면 삼양타이어와 함께 삼화교통의 위치를 짐작할 수가 ..

(4) 서울역앞 터미널(한진/동양/코리아그레이하운드)

앞서서 계속 살펴본 것처럼 1기 터미널의 대부분은 서울 시가지 내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위치는 매일경제신문의 1970년 6월 27일자 기사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해당 기사는 "달리는 궁전(?)을 방불케한 딜럭스고속버스가 훤히트인 하이웨이위를 질주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고속버스회사들의 터미널가운데 한두곳은 비교적넓은 대지를 확보, 그런대로의 시설을 갖추어 고속버스터미널의 면목을 세우고있지만 여타회사의 터미널은 대부분이 협소한자리에 불비한시설로 체면치레를 하고있는 실정"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8개 터미널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현재 서울도심지에 자리잡고있는 고속터미널은 ▲종로구 공평동에 자리잡고있는 동양고속(3백여평)을 비롯하여 ▲종로2가의 삼화고속(2백평) ▲서울역..

(3) 용산 남부터미널

앞서 살펴보았듯이 1기 터미널 시대의 핵심은 산개한 터미널과 당국의 집중화 시도였다. 그 집중화의 첫 시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앞서 본 용두동 동마장터미널이 아니라 용산의 남부터미널이었다. 모두(冒頭)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용산 터미널의 위치에 대하여 오인식이 있는 것이 본 로작의 1차적 계기였지만, 그 위치가 너무나도 간단한 것이라 무어라 이야기할 방도가 없을 정도이다. 위의 1967년 기사는 서울시가 발표한 1968년도 특수시책사업계획의 일부이다. 시외버스종합터미널을 설치하여 도심의 터미널을 옮긴다는 것이 핵심이고, 그 위치가 바로 용산이다. 이듬해 8월 12일에는 역사적인 남부 "종합" 터미널을 기공하게 되는데, 그것이 1968년의 기사이다. 이 터미널은 1969년 8월 15일에 준공예정이..

(2) 용두동 동마장 터미널

모두(冒頭)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조선땅에 시외버스라는 것은 야금야금 다니기 시작하였고, 이어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본격적인 고속버스의 시대가 출범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터미널을 본답시면은 사실은 시외버스가 고속도로가 개통을 하면서 고속도로 버스로 고속버스로 전환이 된 것도 있고, 도심지에 위치한 시외버스 터미널이 외곽으로 이전하는 척 하고는 사실 고속버스 터미널로 변모한 것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양자는 사실은 떼어놓을 수가 없는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위 광고는 고속도로 개통에 따라 고속버스를 운행하게 된 한진관광의 광고이다. 광고에서도 보듯이 이 터-미날이 서울역 앞에 위치하여 있는데, 이에 대하여는 후술하기로 한다. 여하간 1968년에 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경인 구간에 한진, 삼화, ..

(1) 서울 버스터미널 전사

이 뻐스라는 것이 조선에 들어온 것은 1910년대의 일이라고 한다. 무론 지금과 같이 기십여 명이 탈 수 있는 대형뻐스라기보다는 몇 안되는 사람을 실어나르는 합승자동차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흔히 시내뻐스의 시초로 왜정때 운영되었던 부영뻐스를 첫머리로 삼는다. 경성부가 직영으로 뻐스를 굴리다가, 민영화(?)를 하여 경성전기에다 매각하고 말었으니, 곧 경전뻐스-경성전기승합자동차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뻐스라는 것에는 근거리를 가는 시내뻐스와 중장거리를 가는 시외뻐스 또는 고속뻐스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조선의 뻐스사(史)를 살펴보면 실은 시내뻐스와 시외뻐스의 구분이 모호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경인선이라는 철도가 부설되어서 열차가 지나가게 된 것이 1899년의..

1번지 이야기

번지라고 하는 것은 땅을 일정한 기준에 따라 나누어서 매겨 놓은 번호나 그 땅을 말한다고 한다. 법적으로는 지번이다. 지번이란 측량·수로조사 및 지적에 관한 법률에 따라 필지에 부여하는 지적공부에 등록한 번호를 말한다. 그 시행령에는 이 지번에 대하여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아라비아 숫자로 표기하되, 임야대장 및 임야도에 등록하는 토지의 지번은 숫자 앞에 “산”자를 붙인다거나 지번은 본번(本番)과 부번(副番)으로 구성하되, 본번과 부번 사이에 “-” 표시로 연결하며, 이 경우 “-” 표시는 “의”라고 읽는다는 등의 내용이다. 도로명 주소론자(?)에 따르면 그야말로 비합리와 혼란의 점철이겠으나, 이제는 도로명 주소가 시행됨에 따라 지번은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지지번은 부동산..